48화
아쉽게도 박우형과의 저녁 식사는 다음으로 미뤄졌다. 갑자기 내일 저녁 강수확률이 확 올라가는 바람에 촬영을 당겨 찍기로 했기 때문.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박우형을 뒤로한 채. 나는 쿠키 영상 촬영을 마친 후 탈출할 수 있었다.
“서준아.”
“네”
내가 차에 타자 수진 누나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혹시 박우형 씨 때문에 불편하거나 그러지 않아?”
평소 촬영장에서 과묵하기로 소문난 박우형이다. 쉬는 시간에도 대본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로 유명한 그 배우가, 내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른 채 입을 멈추지 않았다.
당연히 스태프들이 그런 우리 두 사람을 보고서 수군거렸을 테고.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인 수진 누나 역시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저런 질문을 하는 거겠지. 혹여나 내가 불편하다고 하면 해결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아니요. 사실 우형이 형이랑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꽤나 즐거워요.”
정말로 나는 꽤나 즐겁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끔 브레이크 없이 다다다 쏘아내는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아니, 많이 하긴 했지만.
그 수다 역시 연기에 대한 사랑이 넘치기에 하는 행동이기에 싫지 않았다. 서로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유익한 내용들도 많았고.
진짜 싫었다면 옆에 오기도 전에 도망쳤겠지.
“그리고 누나.”
“응?”
“저 쿠키 영상 찍는 거 마지막 화를 제외하고 계속 나오는 걸로 결정되었대요.”
“정말? 잘됐네. 안 그래도 내 친구들도 서준이 네가 5화부터 못 나온다니까 아쉬워하던데.”
생각보다 쿠키 영상에 대한 반응들이 더 좋았다. 거기에 더해 어린 시절 이환을 연기한 나에 대한 애정도 뜨겁고.
그 결과 촬영장에 찾아온 정은희 작가와 김준수 PD가 쑥덕쑥덕하더니 내게 말해주었다.
“원래 13화부터는 우형이 형이랑 지예 누나가 쿠키 영상에 나오기로 했는데.
예상보다 제 쿠키 영상 반응이 너무 좋아서 쭉 가기로 했대요.”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쿠키 영상 촬영을 위해 와야만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박우형의 표정도 활짝 폈다.
어차피 기존 계획에 없던 쿠키 영상인지라. 다행히도 박우형이나, 이지예나 모두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보였다. 박우형은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고.
“어? 서준이 네 핸드폰에 전화가 오고 있는데?”
진동 소리가 수진 누나 핸드폰인 줄 알았는데. 내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우형이 형이네요.”
박우형이었다.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는데 무슨 일이지.
[서준아.]
“네? 형 촬영 중 아니에요?”
[다음 씬 촬영 준비 중.]
쉬는 시간에 문자가 아닌 전화로 하는 걸 보니. 내게 급하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게 해주었다.
[김우승 씨랑 통화를 했는데. 다음 주 월요일에 저녁 같이 먹고 5화 같이 보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서준이 네 생각은 어때?]
응?
갑자기 잡힌 촬영 때문에 약속이 미뤄져 두 사람의 연락처를 서로에게 알려주긴 했다. 원래 오늘 만나기로 했었는데 연기되었으니까.
그런데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연락을 한 모양. 심지어 5화가 나올 월요일이 어떠냐고 말까지 끝난 듯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래? 그러면 그날로 하자. 고기는 내가 더 맛있는 걸로 준비할게.]
시크한 거 보소.
방금 전까지 촬영장에서도 쉬지 않고 떠들던 박우형이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재밌네.”
원래는 엄마, 아빠랑 드라마를 같이 봤지만. 아무래도 5화는 형들이랑 같이 보게 될 것 같다.
*
그래.
내가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게지.
“정말입니까?”
“예. 제가 사실 첫 촬영장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로 인해서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서준이가 그 트라우마를···.”
김우승이 나를 데리고 박우형의 집으로 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몰랐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전개될 거라고는.
“역시. 저도 원래 쉬는 기간에는 드라마는 일절 보지 않는데. 서준이가 어린 시절 이환 역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에 한 번 찾아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두 사람의 말 뒤에 점점점이 붙는 건. 그만큼 쉬지 않고 입을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주제는 나와, 내 연기에 관한 것. 마치 물 만난 물고기마냥 팔딱거리기 시작한 두 사람이었다.
“형들.”
“응?”
“어?”
내가 부르자 그제야 박우형과 김우승이 나를 바라본다.
“우리 밥부터 먹고 떠들면 안 될까요? 고기 다 식겠어요.”
그래.
밥상 위에서 오순도순 오가는 대화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고기가 식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떠들면 어떡하냐고.
“미안하다. 형이 서준이 네 덕분에 좋은 말동무를 만나게 되다 보니 정신을 못 차렸네.”
“저도 그렇습니다. 요즘 여러 작품을 해도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분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오늘 정말 서준이 덕분에 우연히 만들어진 자리에서···.”
제발.
제에발!
다행히 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기 전에 눈치를 챈 박우형이 입을 다물었다.
“형. 고기 진짜 맛있어요.”
“그렇지? 안 그래도 선물로 온 거 먹어본 다음에. 가장 좋은 고기로 보내달라고 따로 주문했거든.”
역시나 연기 관련 주제가 아니면 사람이 차분하다. 촬영장에서도 저러면 정말 좋을 텐데.
그와 별개로 정말로 고기도 맛있었고. 처음 만난 박우형과 김우승이 잘 맞는다는 사실도 좋았다.
“아. 그리고 조금 이따가 ‘폭군의 세자’를 보면서 가볍게 한잔하는 건 어떻습니까?”
“좋은데요?”
잠시 후.
나와 박우형, 김우승. 세 사람이 넓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원래는 드라마가 모두 끝나고. 그다음 나를 집에 데려다준 뒤에 한잔하기로 했지만. 김우승의 매니저가 데리러 온다는 연락에 두 사람의 손에 맥주가 들리게 되었다.
“시작해요.”
광고가 끝나고. ‘폭군의 세자’ 5화가 시작되었다.
결국 폭군 연종의 뜻에 따라 계영은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외척인 좌의정은 북방으로 보내지게 되는데.
원래라면 불가능할 일이었지만. 오랑캐 암살조 침투. 그리고 폭군 그 자체인 연종의 명에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상황.
-좌의정.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자 저하. 신은 그저 세자 저하의 강녕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될 따름입니다.
떠나기 전 좌의정을 불러 독대하는 세자 이환.
폭군인 연종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좌의정. 세자 이환은 그런 좌의정이 북방으로 가 있는 동안을 노리려는데.
-그간 좌의정이 있어주어 이 나라를 생각하는 충신들이 조금이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간의 노고에 아바마마를 대신하여 고맙다는 말을 드립니다.
세자 이환의 말에 서서히 눈동자가 커지는 좌의정. 그런 좌의정을 보며 무언가가 적힌 종이를 꺼내 건네는 세자 이환.
그제야 어린 세자가 늦은 밤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달은 좌의정.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 펼쳐보는데. 그 안에 적힌 것은 몇몇 이들의 이름.
-가는 길에 이들 중 몇 명이라도 데려가주었음 합니다. 훗날에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들입니다.
그 말에 순간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좌의정. 그런 좌의정을 바라보는 세자 이 환의 굳은 결심이 선 눈동자.
“크. 역시 서준이네. 저 나이에 저런 눈빛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친구가 있을까?”
“없죠. 그러니 지금 우리 사이에 서준이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화면 속 어린 세자 이환이 된 날 보며 김우승과 박우형이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저 말 안에 담긴 감정은 정말 순수하게 내 연기력에 대한 놀람이었다.
-저하. 저는 참으로 저하가 원망스럽사옵니다.
계영의 원망에도 눈을 감고 받아들이는 세자 이환. 좌의정에게도 손녀인 계영에게 자신의 뜻을 비밀로 해달라고 한 상황.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옵니까. 제게 무어라 말이라도 해주시란 말입니다.
그런 계영의 원망에 감았던 눈을 뜨는 세자 이환.
-지금은 그저 기다려달라는 말밖에 해줄 수가 없다. 아직 어린 내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허나···.
끝내 입으로 나오지 못하고 삼켜지는 말들. 그런 세자 이환의 속을 몰라주는 세자빈 계영.
그렇게 엇갈리는 두 사람. 허나 계영은 원망하면서도 세자 이환에게 거리두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세자 이환 역시 마찬가지.
왜구의 약탈에 관한 상소가 올라온 어전회의.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인한 상소문이 끊이질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이하여 토벌을 반대하는 것입니까.
-세자 저하. 원래 이 시기엔 항상 왜구들이 빈번히 들끓었습니다. 하오나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 저들이 잠잠해질 것이옵니다.
신하의 답변과 동시에 쾅 내리치는 어린 세자 이환. 화면이 잠시 줌아웃한 손에서 얼굴로 서서히 향하면서 변하는 앵글.
그리고.
마침내 등장한 성인이 된 세자 이환.
-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저들을 엄벌하러 가겠다. 아바마마께서도 윤허한 사항이니 그대들은 그 입들을 다물라!
성인 세자 이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그런 이들을 고요히 바라보는 세자 이환.
“크. 이 장면 보고 있는 시청자들 난리 났겠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김우승이 결국 참지 못하고 감탄을 터트렸다.
실제로 그랬다.
나는 슬쩍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만큼 방금 어린 세자에서 성인이 된 세자 이환으로 변하는 순간이 끝내줬으니까.
└ 와. 방금 우리 차 배우에서 박우형으로 세자 이환이 변할 때 소름이 쫙 돋았어요. ㄷㄷ└ ㅇㅈ 3화 마지막 각성 씬부터. 4화 빌드업. 그리고 5화 중반에 딱 성인이 된 세자 이환이 나오는데. 미쳤다···.
└ 지금 성인이 된 세자빈 계영도 나오네요. 두 사람 미모 무엇. 아직까지 꼬여있는 두 사람의 감정 실타래가 어떻게 풀릴지 기대되네요.
└ 이래서 서준이가 세자 연기할 때 무예도 연마했구나. ㅋㅋㅋ 이 장면을 위해서였네. 카리스마 넘치는 세자가 되었네요.
└ 연출 미쳤고. 연기하는 두 배우들은 더 미쳤네요.
반응은 역시 뜨거웠다.
폭정 끝에 서서히 노쇠해가는 연종과 서서히 대립각을 세우는 세자 이환.
이제는 폭군인 연종조차도 쉽게 세자를 찍어 누르지 못하는데. 두 사람의 긴장감 선 대립각.
그리고.
└ 어릴 때 계영과 이환은 귀여웠는데. 성인이 되니까 달달하네요.
└ 좋다. 토라진 세자빈을 달래주기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하는 이환 멋지네.
ㅋㅋ
└ 와. 저기 4화에서 이환이랑 계영이가 추억을 쌓은 장소 아닌가요?
└ 맞음. ㅋㅋㅋ 이환이 준비한 선물 보면서 계영이 풀어지는 거 봐. ㅋㅋ└ 아, 마지막에 이러면 또 내일 안 볼 수가 없네요.
긴장감을 조성하며 마무리되는 5화 엔딩.
고개를 돌려보니 만족스러운 표정의 박우형과 김우승이 보인다.
“아쉽지만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는데요?”
“집에서도 서준이 기다릴 테니. 다음에 또 오시죠.”
5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밀려오는 졸음에 하품을 쩍 해버린 나 때문에 일어나는 두 사람.
“서준아. 오늘 네 덕분에 정말 좋은 친구 하나가 생긴 거 같다.”
“저도 그런데. 우리 앞으로도 서준이까지 해서 종종 모이면 어떨까요?”
“이야!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죽이 척척 맞는 박우형과 김우승을 보면서. 문득 불안한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김도경 시절의 ‘연기를 사랑하는 모임’이 여기에서는 이렇게 탄생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