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걸음을 옮기던 어린 세자 이환을 만난 소년 김헌. 세자 이환은 그 손에 들린 서책에 시선을 던지는데.
“너는 이름이 무엇이더냐.”
“제 이름은 김헌입니다.”
“이름이 참 멋지구나. 그래, 너는 왜 서당에 가지 않고 여기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더냐.”
세자 이환이 서책을 들고서 서당이 아닌 뒷산에 오른 연유를 묻자.
“옛 성인들의 말씀을 공부한다 한들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김헌이 분노에 찬 어조로 답했다. 어린 소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눈동자가 현실에 대한 답답함에 타오르고 있었다.
“열심히 학문을 정진하여 관직에 오른 이들 중. 주상 전하의 폭정 아래 목숨을 잃은 이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허어. 주상 전하를 욕하다니. 너는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게냐?”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배운 학문을 써먹지도 못한다는 현실이 더 두렵습니다.”
그 말에 눈빛을 빛내는 세자 이환.
저 눈동자에 담긴 의지. 그리고 목소리에 담긴 굳건한 심지를 읽은 것이다.
“정녕 네 뜻이 그렇다면. 이렇게 현실에 분노만 하지 말고, 숨을 죽이고 더 학문에 매진하거라. 머지않아 그 배움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날이 올 터이니.”
그런 세자 이환의 말에 갸웃한 표정을 짓는 김헌.
“그런데 누구신데 제게 그런 말을.”
“네가 열심히 학문에 매진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네가 그 참한 뜻을 잃지 않고 정진한다면 말이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세자 이환.
두 사람의 대사가 끝남과 동시에.
“컷! 좋습니다.”
모니터 너머로 두 사람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던 김준수 PD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케이를 외쳤다.
김헌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던 김도윤은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음으로 가장 먼저 김도윤이 한 일은 차서준을 따라다니며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는 일이었다. 그런 김도윤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 차서준이 소감을 물었다.
“도윤아 어땠어?”
“‘폭군의 세자’의 쿠키 영상에 서준이 너랑 나만 나온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떨렸는데.”
“떨렸는데?”
“막상 연기를 해보니까···. 너무 재밌어.”
김도윤의 말에 차서준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이따가 이동해서 한 씬 더 남았으니까. 방금 전처럼 내게만 집중하면 돼. 대사는 다 기억나지?”
“응. 서준이 너한테만 집중할게.”
장소를 이동 후 감독의 디렉팅에 따라 연기를 마친 순간.
“커엇!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밥 먹고 합시다!”
김준수 PD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오케이 싸인이 떨어졌다. 기다리던 밥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스태프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바삐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한 발짝 뒤에서. 사총사들 중 구경꾼으로 따라온 하지우와 최지환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와.”
“···!”
무슨 말이 필요할까.
TV에서 볼 때 차서준이 연기를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촬영장에서 본 차서준의 존재감은 어린 두 친구의 마음에 푹 박혀 들어왔다.
쿠키 영상을 찍기 전에 봤었던 배우 박우형만큼이나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지는 연기력이었다.
“서준이 진짜 멋있다!”
“···대단해.”
연신 감탄만 터트리는 두 어린이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지만. 거기까지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는 최지환과 하지우였다.
둘의 시선은 오로지 차서준에게만 박혀있었으니까. 뚫어져라 차서준만 보던 최지환의 시선이 조금 움직여 김도윤을 향했다.
“도윤이도 잘한다. 여기 오면서 보여준 연습 때보다 더 잘한 거 같아.”
“···매일 연기 수업도 가잖아.”
쿠키 영상인지라 촬영 분량은 많지 않았다. 다만, 그 짧은 시간 안에서도 두어린 친구가 감탄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런 둘을 향해 촬영이 끝난 김도윤이 우다다 달려왔다.
“얘들아, 나 방금 어땠어?”
“끝내줬어!”
“···최고야.”
친구들의 극찬에 김도윤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런 김도윤의 뒤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차서준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쿠키 영상에 필요한 아역 배우 자리에, 친구를 추천해도 되냐는 질문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김준수 PD였다.
“감독님. 제 친구 괜찮았어요?”
“좋던데? 사실 서준이가 연기를 잘한다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또 그렇게 어려운 역할이 아니기에 받은 건데. 예상보다 훨씬 잘하더라.”
“고맙습니다. 감독님.”
“아니지. 나야 우리 서준이 덕분에 요즘 입꼬리가 내려오질 않고 있는데.”
그랬다.
만약 ‘폭군의 세자’의 본편에 들어가는 인물이었다면. 아무리 차서준이 추천했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쿠키 영상은 차서준의 연기력에 반한 정은희 작가와 김준수 PD가 만들어 낸 것.
가볍게. 또 시청자들에게 주는 보너스 영상과도 같은 느낌인지라 차서준이 추천한 친구를 써본 김준수 PD였다. 만약 아니다 싶으면 차서준만 클로즈업해 버리면 될 테니까.
“서준이 친구도 꿈이 배우라면서?”
“네. 지금은 열심히 연기에 대해 배우고 있어요.”
“어려운 길을 선택했네.”
재능이 부족하다거나, 김준수 PD가 보더라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는 게 아니다.
같은 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친구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는 게 문제였다.
중년 배우 신준철과 한 화면에 잡아도 존재감이 밀리지 않는 7살의 아역 배우. 그런 아역 배우를 절친으로 둔 채로 배우에 도전한다는 게 쉬운 길은 아닐 테니까.
“잘할 거예요. 되게 멋진 친구거든요.”
친구 김도윤을 보는 차서준의 눈빛에는 뿌듯함이 있었다.
*
‘폭군의 세자’ 4화 방송이 끝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가장 주목을 받은 건 4화 시작부터 새롭게 변한 세자 이환이었다.
- 우리 차 배우 연기력 실화야?
아니. 3화까지는 폭군인 연종의 기에 눌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어제 마지막 장면에서의 결심 이후로는 완전히 달라졌네. 자신의 뜻을 함께할 대신들을 설득하는 거 보소.
제왕의 피가 뭔지 고작 어린 세자가 보여주는 거 진짜 실화임? ㄷㄷ
└ 보는 내내 미쳤더라는 생각만 들었음. 아직까지 나라에 대한 충심을 잃지 않은 대신들을 홀로 찾아가 설득하는데. 저런 연기는 서준이 아니면 안 되겠지?
└ 나는 그것보다 경연에서 당차게 말하는 이환이 보고 반해버렸음. ㅋㅋㅋ 특히 간신들을 향해 일갈을 할 때 왜 이리 멋짐? ㅋㅋㅋ└ 예고편을 보니까 다음 주부터는 성인이 되어서 박우형의 세자 이환이 나올 거 같은데. 너무 아쉽다. ㅠㅠ└ 저도요. 그렇다고 어린 세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으니. 아쉬워도 서 준이의 이환이를 보낼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아요···.
└ 하아. 세상에서 월요일이 제일 싫었는데. 이제는 ‘폭군의 세자’ 때문에 주말에도 빨리 월요일이 왔으면 하고 있음. ㅋㅋㅋㅋㅋ└ 님도? 제 친구도 질색을 하더니. 어제 퇴근하면 이환이 볼 수 있다고 싱글벙글함. ㅋㅋㅋ
4화에는 달라진 세자 이환의 모습. 그리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사람을 만드는 세자의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나 경연에서 연종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간신배들에게 버럭 화를 내는 세자 이환에 시청자들이 열광해버렸다.
“뭘 보고 있었어?”
핸드폰으로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박우형이 묻는다.
“사람들 반응 보고 있었어요.”
“그래?”
이미 촬영 분량에서는 박우형이 세자 이환이 된 상태였다. 그러면 당연히 내 분량이 없으니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찍을 쿠키 영상도 재밌던데?”
“저도 대본 받자마자 그 생각부터 했어요.”
쿠키 영상을 찍는 날인지라 촬영장까지 온 참이었다. 내가 등장하자마자 쉬는 시간마다 은근슬쩍 옆으로 다가오는 박우형이었고.
내가 쿠키 영상을 찍기 위해 촬영장에 방문하는 날이면. 마치 거대한 거머리처럼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촬영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수다스러운 박우형의 입에서 말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참고로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지. 평소처럼 조용하고 과묵하다는 게 아니다.
“오늘 촬영은 밤까지 안 할 거 같은데. 끝나고 밥 먹을래? 서준이 네 촬영이 가장 마지막 순서일 거 같은데.”
아니요!를 외치려던 내 입이 멈칫했다. 은근슬쩍 눈치를 보고 있는 박우형 때문에.
어젯밤 내가 촬영장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선 전화까지 한 박우형에게 버럭 하긴 했었다.
[형. 저 자야 돼요.]
아니.
사람이 전화를 끊질 않잖아.
처음에는 나도 좋았다. 4화부터 내가 연기한 세자 이환의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을 수 있도록. 어떤 연구를 했는지에 대한 박우형과의 수다는.
그런데.
“형. 어제 저 화낸 거 아니에요.”
“정말?”
“네. 8시에 전화를 걸어서 9시가 훌쩍 넘도록 끊질 않으면 어떡해요. 저 그러면 키 안 커요.”
“맞다. 서준이 너랑 있다 보면 가끔 7살이라는 사실을 깜빡할 때가 많네. 미안하다.”
연기 이야기에 또 눈이 돌아간 저 인간이 1시간이 훌쩍 넘도록 끊을 생각을 안 했다는 게 문제였다.
오죽하면 내가 적절한 선에서 끊기 위해 단호한 어조로 말했을까. 그대로 받아줬다간 새벽까지 통화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건 너무 끔찍한데?
어쨌거나 어제의 그 버럭 때문인지. 오늘은 옆에 다가와 눈치를 보면서 정승처럼 서 있기만 하던 박우형이긴 했다. 그 모습에 또 마음이 약해지긴 하더라고.
“잘됐다. 오늘 그러면 간단하게 나랑 저녁 먹고. 너무 늦지 않게 집에 태워다 줄게.”
“···어디서 먹을 건데요?”
“집에서. 마침 좋은 고기가 하나 선물로 들어왔는데. 서준이 너 고기 좋아하지?”
“네. 좋아해요.”
“잘됐네. 고기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자.”
응?
“보자. 오늘 촬영은 일찍 끝나기로 했으니. 끝나면 대략 6시쯤 될 테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서준이 너랑 캐릭터 연구법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9시 전에 데려다주려면 집에서 적당한 때에 나가면 되겠다. 그러면···.”
제발 누가 이 형 입 좀 다물게 해줘.
그런 애원을 담아 고개를 돌렸지만. 난 봤다. 박우형의 매니저가 저쪽 구석에서 여길 훔쳐보다 휙 숨는 걸.
다행히 박우형의 수다는 더 이어질 수 없었다. 때마침 김준수 PD가 촬영을 시작하자고 외쳤으니까.
박우형이 아쉬운 눈으로 촬영을 위해 사라지고. 그제야 나는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서준아. 오늘 형이랑 저녁 먹을까?]
김우승에게 연락이 온 것이.
선약이 있다고 거절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 머리를 스치는 기막힌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연기에 미쳐 사는 배우 박우형. 배우로 자리잡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인 김우승. 이 둘을 붙여놓으면 내가 평온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말이다.
[형. 지금 촬영 중이라 조금 있다가 말해요.]
물론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하니 잠시 답변을 미뤄두었다.
잠시 후.
“김우승? 아, 서준이 너랑 '너에게 다시‘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그 김우승 씨?”
“네. 형은 어때요?”
“오히려 좋은데? 안 그래도 저번에 ‘너에게 다시’를 보면서 재밌는 기사를 하나 봤는데. 원래 발연기를 하던 김우승 씨가 서준이 너를 만나면서 연기력에 꽃을 피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찾아보니까 정말로···.”
제발.
제에발!
그 순간.
문득 나는 머리를 스치는 불안감 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서준맘 김우승과 거머리 같이 떨어질 줄 모르는 박우형.
그런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는 게 옳은 선택일까?
이런 불안한 생각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