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촬영장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만큼 중요한 씬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김준수 PD의 디렉팅에 따라 최종 리허설까지 마친 뒤. 본 촬영 시작을 외쳤다.
“자! 촬영 시작합니다!”
김준수 PD는 눈을 부릅뜬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핫!”
“흐압!”
화면에는 복면을 쓴 오랑캐들과 내금위들이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세자 이환과 그를 지키기 위해 둘러싼 세자의 호위무사들.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이들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세자 이환.
“아바마마는 대체 어딜 가셨단 말인가!”
소녀 계영을 만나기 위해 궁궐을 나섰던 세자 이환은. 이미 아비규환이 된 상황을 확인하고 곧바로 궁으로 돌아왔다.
자리에 뿌리박힌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는 세자를 설득하기 위해. 신하 하나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전하께선 이미 몸을 피하셨사옵니다. 세자 저하 저들이 노리는 건 세자 저하이옵니다. 얼른 몸을 피하시옵소서!”
“지금 저들이···. 저들이 나를 위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세자 저하! 지금 당장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복면을 쓴 오랑캐들이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궁까지 도달했을 리가 없었다.
분명 내부에서 내통한 이가 있다는 뜻.
그 내통자는 세자 이환의 아버지이자 왕인 연종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자임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연종이 대신들을 감시하겠다는 이유로 병력들을 한양 곳곳에 보내두었기에. 궁 안을 지키던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상황.
대규모 군대가 궁궐 안까지 쳐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 말은 피해가 있을지언정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뜻.
하지만.
“아바마마는 정녕 내금위들을 모두 데리고 몸을 피하셨단 말이더냐! 눈앞에서 신하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왕이 죽으면 오랑캐가 국경을 넘을 것이다. 허나, 그 상황이 두려워 저 몇 안되는 암살자들에게서 등을 보인다면. 그 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어야 한단 말인가.
서서히 붉어지는 어린 세자 이환의 눈. 꽉 다문 입이 보여주던 표정이 서서히 변한다.
“나는···.”
그걸 화면 너머로 지켜보는 김준수 PD의 눈동자에 희열이 차오른다.
김준수 PD가 정은희 작가에게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자신이 가장 감탄을 멈출 수 없었던 그 장면. 머릿속에서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가장 이상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 이거지!’
어린 세자 이환이 언젠가 폭군인 연종을 끌어내려야겠다는 결심을 내리는. 수동적이던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가는 메인 인물로 변모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세자 이환을 보여주고 있는 차서준도. 다시 저 장면을 시킨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할 터였다.
그렇기에 손에 땀을 쥐고 화면을 노려보는 김준수 PD였다.
그때였다.
“악!”
합을 맞추던 무술팀 스턴트 배우들 사이에서 실수가 나온 것. 큰 부상은 아니었으나 화면이 망가졌다. NG였다.
현장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방금 세자 이환을 연기한 차서준이 보여준 각성 연기가 끝내줬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가 있었다. 배우들이 마치 접신이라도 한 것처럼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는 때가.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그 순간이 바로 방금이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순간에 무술팀 한 명의 실수로 NG가 터졌으니.
“NG! 다시 갑시다. 아니지, 조금 쉬었다가 갑시다. 이게 뭐야!”
신경질적으로 헤드셋을 집어 던진 김준수 PD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NG를 낸 사람은 자신 때문에 차갑게 변한 촬영장 분위기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황.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씬이었기에 무술팀 감독조차 쉽게 상황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차서준이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안 다치셨어요?”
그런 차서준의 행동을 보면서 모두가 놀랐다.
방금 배우의 완벽한 몰입이 한순간에 깨졌다. 그것도 자신 때문이 아닌 타인의 실수로 인하여.
보통 그런 경우에는 배우가 짜증을 내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정말 어렵다는 감정 변화 연기였으니까.
그런데.
“어? 많이 다치셨어요?”
“아, 아니. 괜찮아. 미안하다 서준아.”
“아니에요! 사람 몸이 우선 아니겠어요? 안 다치셨다니까 다행이에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해맑게 웃는 차서준 덕분에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작은 몸으로 부축하겠다며 낑낑대며 일으킨 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작게 속삭였다.
“제가 감독님께도 다녀올게요. 걱정 마세요.”
“고마워.”
총총걸음으로 사라진 차서준이 돌아올 때는. 표정이 한결 풀린 김준수 PD의 손을 잡고서였다.
“자! 다시 갑시다. 중요한 씬입니다. 다들 긴장해서 집중해주세요!”
과연 차서준이 방금 전처럼 신들린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 시선을 보내는 이들 중에는.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중년 배우 신준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잠시 후.
“···내가 잘못된 모든 것들을 바로 잡을 것이다. 아바마마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차서준이 마지막 대사를 내뱉고.
“오케이! 안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만족감이 흠뻑 젖은 김준수 PD의 외침으로 세자 이환의 각성 씬이 종료되었다.
“크. 미쳤다 미쳤어. 솔직히 실수한 스턴트맨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그냥 연기로 보여주네요. 솔직히 방금이 더 끝내준 거 같던데요?”
“그렇지. 저기 신준철 선배님도 기가 차다는 듯 웃는 거 못 봤어? 그냥 타고났네, 타고났어.”
“쟤 이제 7살 아니에요? 저 정도면 나중에 진짜 할리우드까지 진출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스태프들도 감탄을 멈추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놀란 이들이 촬영 현장을 보고 있던 배우들이었다.
방금 전 흐름이 깨졌을 때. 이번에는 같은 연기를 보여줄 수 없을 거라고들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괜찮다며 밝게 웃어 보인 차서준이 보여준 연기는 경력 10년 차 이상의 배우들조차 입을 멍하니 벌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냥 쟤는 이 바닥에서 무조건 성공하겠다.”
“그죠?”
“그렇지. 생각해봐. 연기력 미쳤지. 인성 죽이지. 거기다가 방금 그 상황에서 NG 터져도 인상 한 번 안 찌푸리더라.”
“저는 저번에 다른 드라마 찍을 때. 주연 배우 하나가 그냥 쌍욕을 박아서 우는 것도 봤어요.”
“그러니까. 아까 그렇게 욕을 해도 아무도 뭐라 못할 텐데. 자기가 나서서 NG낸 사람 진정시키고. 감독님도 풀어서 데리고 왔잖아.”
그렇게 수군거리는 시선의 끝엔, 어느새 한 몸처럼 촬영장에서 붙어 다니는 신준철과 차서준이 있었다.
종방 이후 차 배우에 대한 미담 하나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
- ‘폭군의 세자’ 3화 추가 예고편 공개. 위기에 처한 세자 이환.
└ 어? 이러면 궁금해서라도 오늘 QTV를 봐야 되잖아. 친구랑 술 약속 있는데.
└ 친구랑 술은 다음에도 마실 수 있는데. 서준이의 폭군의 세자 3화는 오늘뿐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게 뭔 소리야. 재방송으로 보면 되잖아.
└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반응 보면서 보는 맛 모름? 그게 술맛보다 끝내줄 텐데?
└ ㅇㅈ 가뜩이나 실시간 생방으로 안 보면. 쿠키 내용 스포당한다고. 스포?
그건 못 참지. 내가 먼저 보고 스포해야지.
└ 스포 자제요. 그나저나 차서준에 대한 연기 검증론들이 쏙 사라졌네요. ㅋㅋㅋㅋ
그랬다.
‘폭군의 세자’가 방송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향해 무수한 검증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3화 방송을 앞둔 지금은 모조리 사라진 상태였지만.
“서준아.”
“네?”
“우리 서준이는 전생에 진짜 세자가 아니었을까?”
심지어 엄마도 세자를 연기하는 TV 속 나를 보고서 저런 말을 할 정도였다.
“아니에요. 전생에도 엄마 아들이었을 거예요. 아! 그러면 맞아요. 엄마는 왕후. 저는 세자!”
내 말에 엄마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세자가 아니라 김도경이라는 배우였는데.
“아빠가 오늘은 좀 늦으시네?”
시계를 보던 엄마가 아직까지 열리지 않는 현관을 보며 말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을 열고서 아빠가 뛰어 들어왔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토하면서.
“아들! 아빠가 늦지 않았지?”
“네! 얼른 씻고 오세요. 아직 시작하려면 시간 남았어요.”
“아빠가 미안해. 오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대신 우리 서준이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에 집에 오려고 열심히 달려왔어.”
아빠가 재빨리 씻고 나오겠다면서 화장실로 들어가고.
“서준아. 요즘 사람들이 서준이 덕분에 월요병이 없어졌다고 하네.”
“월요병이요?”
“여기 볼래?”
엄마가 보여준 핸드폰 화면 안에는 정말 사람들의 반응이 주르륵 달리고 있었다.
└ 드디어 ‘폭군의 세자’ 3화 시작!
└ 나 이환이랑 영이 보고 싶어서. 주말도 빨리 지나가라고 기도했잖아. ㅋㅋㅋ└ 요즘 ‘폭군의 세자’ 보는 직장인들이 농담조로 하는 말이 하나 있음.
└ 뭔데?
└ ‘폭군의 세자’가 월요병 치료제가 되었다고. 출근해도 퇴근해서 3화 볼 생각에 다들 힘낸다고. ㅋㅋ
어쨌거나 3화 방송을 앞에 두고 있는 지금. 나는 엄마, 아빠와 TV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3화였다.
좌의정의 손녀 계영을 세자빈으로 만들려는 폭군 연종.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계영과 세자 이환의 관계.
-그대들인가?
-그렇다. 왕의 목을 따기 위해 누하사치의 명을 받아 왔다.
폭군 연종에게 친우들의 가문이 멸문당해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이 국경을 열어주고. 오랑캐들은 쉬지 않고 한양을 향해 달려가는데.
“어머. 지금 세자가 궁을 나서면 안 되는데?”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미 복면을 쓴 오랑캐들이 암살 작전을 시작하는데. 오히려 계영을 만나기 위해 궁을 나설 준비를 하는 세자 이환.
“어? 서준아?”
“안 돼요.”
급박하게 진행되는 전개에 아빠가 황급히 내게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스포는 안 되는 법이다.
“여보. 드라마 볼 때는 서준이 괴롭히지 말라고 했죠?”
“···알았어.”
아빠의 시무룩함은 잠시였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에 시선을 뺏긴다.
소수의 호위들만 데리고 궁을 나선 세자 이환. 결국 암살자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궁으로 돌아가야 하옵니다!
-저기 나를 지키기 위해 호위들이 목숨을 던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세자 저하를 모셔라!
결국 계영도 만나지 못하고 궁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세자 이환. 허나 궁궐 안은 더 아수라장인 상태였고.
-(왕을 찾아라!)
-(세자를 인질로 잡아라!)
이미 누구보다 빠르게 몸을 피한 폭군 연종. 문제는 도피 과정에서 내금위들을 모두 데리고 가버린 것.
결국 참혹한 피의 현장이 되어버리고 만 궁궐 안. 그걸 보며 입술을 깨무는 어린 세자.
-지금 보이는 저들의 숫자가 고작 서른 남짓이다. 그런데도 아바마마께선 내 금위들을 모두 데리고 가셨단 말이더냐! 자신의 신하들을 저리 두고선!
모든 것이 폭군 연종이 원인이었다. 그의 폭정에 희생된 이들이 국경을 열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고작 30명이 넘는 숫자에 겁을 먹은 왕이 내금위들을 데리고선 몸을 피했다.
결국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이들은 분노에 찬 검에 희생될 뿐이었다. 어린 세자 이환의 눈앞에서.
-내가···, 내가 잘못된 모든 것들을 바로 잡을 것이다. 아바마마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클로즈업되는 세자 이환의 얼굴.
엔딩 OST.
└ 미쳤다! 우리 이환이 각성하는 거 보소!
└ 결심한 세자가 커서 폭군 끌어내릴 듯.
└ 4화!!! 4화를 줘!!!
└ 쿠키 영상 봄? 어린 이환이 스승에게 묻네. 왕이란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하는지.
└ 와. 3화 마지막이랑 쿠키 영상을 보니까. 이환이 연기가 미쳤네요. ㄷㄷ└ 내일부터는 진짜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될 듯. 우리 서준이 몇 화에 박우형으로 바뀌죠?
└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ㅠㅠ 근데 서준이가 보여준 이환 덕분에 박우형의 이환도 너무나 기대가 되네요.
이렇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기뻐하는 그때.
내 시선을 사로잡는 기사 하나가 있었다.
- 차서준 vs 최이안. 두 아역 배우 대결의 승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