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움직이는 차 안에는 운전대를 잡은 박우형.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나. 이렇게 단둘뿐이었다.
며칠 전 나를 향해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은 차분한 표정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우형이 형.”
“왜?”
“우리 지금 어디 가요?”
“저기.”
박우형의 손끝이 가리킨 곳엔. 목적지가 떠올라 있는 네비게 이션 화면이 있었다.
어느새 서로를 부르는 호칭도 편하게 바뀌었다. 선배님, 차서 준 하고 부르는 건 거리감이 느껴진다나 뭐라나. 아무리 봐도 7 살을 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세상 어디에서 7살 꼬맹이와 30대 남성이 세 번째 만남에서 형, 동생으로 호칭을 부르겠냐고.
정작 호칭을 그렇게 하자고 한 박우형은 전혀 개의치 않아보 였다.
“저기가 형이 말한 특별한 곳이에요?”
“말했잖아. 사극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들러야만 하는 곳. 아마 서준이 너도 가고 나면 또 가자고 그럴걸.”
며칠 전 내 손을 잡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사람이라고는 상 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
엊그제 만난 박우형 매니저가 내게 설명해주었다. 원래 평소 에는 저렇게 조용하고, 차분한데. 유독 연기만 관련되면 사람이 돌변한다고.
괜히 차 안에서 촬영, 연기,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간 돌 변하니. 편하게 가고 싶으면 그냥 옆에서 자라고 했다. 박우형도 신경 쓰지 않고 그 편이 나도 편할 거라면서.
무슨 초록 변신 괴물도 아니고.
“우동 먹을래?”
“맛있는 곳 있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휴게소 하나가 나오는데. 거기 우동이 끝내주게 맛있어. 가는 길엔 매번 거기서 점심 먹었거든.”
“그럼 가요.”
“오케이.”
뭐랄까.
마치 시크한 친구 하나와 여행을 가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7살 꼬맹이와 성인 남자 한 명이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라는 거지.
“생각보다 엄청 멀리 있네요?”
“거기가 진짜 명당이야. 내 연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신성한 곳이지.”
무슨 로또 명당을 찾아 떠나는 것도 아니고. 목적지를 입력한 네비에는 남은 거리가 146km가 남았다고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다가 목적지까지 침묵으로 갈지도 모를 판이었다. 결국 나는 박우형 매니저의 당부를 무시한 채 금지된 단어를 꺼내기 시작했다.
“형. 제가 사극 촬영은 처음이라 그런데. 사극 촬영 현장 분위 기는 어때요?”
“끝내주지!”
촬영 이야기를 꺼냄과 동시에 박우형의 고개가 이쪽을 향해 홱 돌아선다. 워워, 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앞을 봐야 하는데.
텐션부터가 확 살아나는 거 보소. 방금 전까지 무료한 표정으 로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눈빛이 돌 변했다.
동태 같던 눈깔이 순식간에 녹아내려 팔딱 뛰는 생태의 눈빛 이 되었다고 할까나.
“일단 분장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얼굴에 붙이는 수염은 좀 간 지러운데.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서 괜찮지. 머리에 가발도 처 음 쓰면 은근 신경도 쓰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극의 재밌는 점 은 선배님들의 연기 내공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있지. 또···.”
“형. 운전할 때는 앞을 봐야죠.”
“아, 맞다.”
내 지적에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지만. 박우형의 입이 쉬지 않고 열리기 시작했다. 출발 후 30분 넘게 침묵을 지키던 입이라 곤 믿기지 않을 만큼.
“전투씬이나, 승마씬에서는 부상을 조심해야 돼. 가뜩이나 아 직 추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지금은 작은 넘어짐에도 크게 다칠 수 있다니까.”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조개처럼 앙 다물었던 입 을 열었더니. 그 안에서 진주 대신 말 폭탄이 튀어나온 기분이다.
이래서 매니저가 절대로 금지라고 알려준 단어들을 내뱉지 말 라고 한 거구나.
후회는 해도 이미 늦었다.
“서준이 너는 아직 어리니까 승마씬이 없을 테니 다행인데. 그 래도 추운 겨울. 그것도 세트장이라지만 야외 촬영인 만큼 감기 조심해야 돼. 감기 걸리면 목이 잠기고. 그러면 발성이 제대로 나 오질 않아서···.”
그만.
제발 그만.
내 귀가 평화를 되찾은 것은. 저 앞에 휴게소가 보일 때쯤에서 였다.
휴게소에 도착한 뒤. 차에서 내리는 박우형과 나는 선글라스 에 모자도 썼다.
워낙에 얼굴이 알려진 우리 둘이라. 혹여나 사람들이 알아보 면 시끌시끌해질 것 같아 사전에 방지한 것이다.
“김치 우동?”
“그게 맛있어요?”
내 물음에 박우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형 온도 차이 좀 보소.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말이 다시 짧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 많은 괴물에서 다시 과묵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변신을 본 기분이다.
“그러면 형이랑 같은 걸로요. 그리고 제가 살게요. 도현 삼촌 에게 카드 받아왔어요.”
“됐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쿨하게 거절해버렸다.
김치 우동 맛은··· 제법 괜찮았다. 왜 굳이 수많은 휴게소들 중 에서 그곳을 찾아가는지 알 수 있는 맛이었다.
문제는.
“그러니 서준이 너는 발성에 특히 신경을 써야 돼. 이게 현대 극과 다르게 사극에서는 꽉찬 소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캐릭터가 가볍게 느껴져서···.”
차에 돌아와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음과 동시에. 다물어져 있 던 입에 쉬지 않고 떠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제발.
제에발.
*
좋다.
서울에서 2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산 속 폭포였다.
그 있잖아. 명창들이 득음을 하기 위해서 찾는 그런 산속 수련 장소 같은 느낌의 폭포.
“어때?”
“좋은데요?”
“여기가 과거 판소리 소리꾼을 하던 명창 한 분이 득음을 한 장소라고 하더라.”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박우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 더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 채 아아, 하며 목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이 다 풀린 순간.
박우형의 눈빛이 돌변했다.
“정녕 입으로는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 떠들면서. 그대들이 한 것이 대체 무엇이 있소! 저 북에 있는 오랑캐들의 번번한 침략에 도 화친만 종용하는 그대들이 이 나라의 신하들이란 말이오!”
좋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세자 이환의 분노와 슬픔이 무겁게 담겨있었다.
내가 감독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들어 이 모습을 담고 싶을 만큼.
괜히 사람들이 사극 배우를 언급할 때 박우형을 가장 앞에 두 는지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어때?”
“좋아요.”
“그래?”
정말이다.
왜 많고 많은 장소. 그리고 자신의 집을 두고서 여기까지 찾아 왔는지 알 수 있는 발성이었다.
소리가 꽉 찼다. 저 요란한 물소리를 내며 내려치는 폭포수의 소리조차 먹어 치울 만큼.
“특히나 여기 오면서 형이 수십 번 말했던 묵직한 소리가 무엇 인지 알 것 같아요.”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라는 표정으로 박우형이 나를 바라본다.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고작 7살의 꼬맹이가. 그것도 사극 한 번 도전해보지 않은 아이가. 단 한 번의 시범을 보고서 깨달았다 는 말을 하고 있으니.
아마 오늘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도 저 발성을 가르쳐주 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 번의 숙달된 조교의 시범 을 보고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그렇다면 보여줘야지.
“정녕 입으로는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 떠들면서. 그대들이 한 것이 대체 무엇이 있소! 저 북에 있는 오랑캐들의 번번한 침략에 도 화친만 종용하는 그대들이 이 나라의 신하들이란 말이오!”
방금 박우형이 했던 세자 이환의 대사를 그대로 읊었다.
쏴아아.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 퍼질 뿐. 박우형에게 선 반응이 없다.
잠시 떨리는 손으로 나를 가리키던 박우형은.
“이, 이거지! 그래! 바로 이거였다니까! 이래서 내가 서준이 너 를 여기까지 데려온 거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내 어깨를 잡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 다.
‘연기’에 미쳐 산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박우형이다. 그런 그 가 진짜 ‘재능’을 직접 눈으로 봤는데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 리 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몸을 부르르 떨던 박우형은. 이럴 시 간도 아깝다는 듯 서둘러 다음 대사를 연습하자며 재촉한다.
“크으. 그러면 이것도 한 번 해보자.”
눈에 희열이 가득 담긴 박우형이 재빨리 다음 대사를 시작했 다.
“내 그대를 어찌하면 되겠느냐.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그 대를 지키기 위하여 대신들과 반목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신들의 뜻을 따라 그대를 보내야만 하는 건지. 나는 모르겠구 나.”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고뇌와 애환을 담은 세자의 번민.
아마 작가 정은희가 방금 박우형을 봤다면 무릎을 탁 쳤을 것 이다. ‘저기 내가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세자 이환이 있어요!’ 라고 외치면서.
단순히 연기력이 좋아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수없 는 캐릭터에 대한 연구. 그리고 수십 번도 더 내뱉고, 또 녹음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연습한 결과라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배우의 길을 걸어왔으니까.
“아, 이건 7화 대본의 대사니까 서준이 네가 모를 수도 있겠구 나. 잠시만. 대본을 내가 여기에 두었는데.”
너무 흥분하여 내가 받지 못한 대본에 있는 대사를 쳤다는 생 각에. 박우형이 서둘러 대본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배우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암기력이었다. 수많은 대사들을 머릿속에 빠르게 넣어야 했으니까.
방금 정도의 대사는 내게 있어 일도 아니란 말씀.
“내 너를 어찌하면 되겠느냐.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너를 선택하여 대신들과 반목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신들의 뜻을 따라 너를 내보내야만 하는 건지. 나는 모르겠구나.”
내가 방금 보여준 대사를 그대로 따라 읊자. 마치 고장 난 인형 처럼 박우형의 몸이 덜컥 멈춘다.
그러더니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떤다. 마치 로또 1등이라도 당첨 된 용지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이 형 이상해. 그런 생각을 떠올릴 시간도 없었다. 흥분을 감추 지 못하고 다다다 말을 내뱉는 박우형 때문에.
“크으! 서준아! 안 되겠다!”
“네?”
“오늘 형이랑 여기서 자고. 내일 하루 더 있다가 가자! 내일까 지 여기서 세자 이환을 완성시키고 가는 거다!”
“네???”
물음표가 두 개가 더 늘었지만. 이미 눈깔이 돌아간 박우형에 겐 들리지 않는 모양.
이미 혼자만의 일정 짜기에 돌입한 박우형이 손가락까지 접어 가며 무언가 계획을 세운다.
그러더니 뭔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 화를 건다. 서울에 있는 매니저에게.
“여기 근처에 숙소 하나만 잡아줘. 최고로 좋은 곳으로. 뭐? 시 골이라 없다고? 그러면 잘 수 있는 곳을 찾아줘. 왜 흥분했냐고?”
저 사람 이상해.
*
다음 날까지 폭포수 수련을 마친 뒤에야. 나는 서울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뭔가 진이 빠진 얼굴로 등장한 나를 보며 서도현이 그럴 줄 알 았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어땠어?”
서도현은 이미 알고 있었구나. 박우형이라는 배우가 어떤 사 람인지.
“재밌고, 힘들었어요.”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둘이 그냥 보낸 건 박우형이 서준이 네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볼 거라 생각해서였거든. 나쁜 소문도 전 혀 없었고.”
“···네.”
제대로 알아봤지. 그리고 무슨 각성한 것도 아니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입을 쉴 새 없이 다물질 않았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드디어 ‘폭군의 세자’의 세자 이환 역을 연기할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었다.
기다려진다.
첫 촬영에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 그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