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배우 박우형.
그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사차원’이었다.
박우형과 함께 작품을 찍은 배우들의 증언. 그리고 실제로 한 달간 그의 뒤를 밟았던 파파라치의 발언까지.
연기에 미쳤고, 머릿속에 오직 연기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배우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 박우형이었다.
- 배우 박우형. ‘폭군의 세자’ 세자 이환으로 캐스팅 전격 완료.
그렇기에 ‘폭군의 세자’의 주연에 박우형이 캐스팅되었을 때 기뻐한 이들이 많았다.
└ 미쳤다! 박우형의 섹시한 연기를 또 볼 수 있는 건가?
└ 저번에 무사 박일도로 나왔을 때. 진짜 눈빛 연기랑 카리스 마가 지렸었는데. 이번 ‘폭군의 세자’도 대박 날 듯?
└ 어린 세자는 차서준이. 어른이 된 세자는 박우형이. 이거 ‘폭 군의 세자’ 이번 캐스팅 미쳤다.
└ 어차피 박우형 또 똑같은 연기 보여주는 거 아님? ㅋㅋㅋ 눈 부릅뜨기. 있는 척 분위기 잡기. 박우형도 그게 끝일 거 같은데?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괜히 사극에서 왕에 어울 리는 배우 하면 박우형이 언급되는 게 아님. 발성, 톤 그냥 그 시 대 사람을 그대로 보여줌.
원래는 자신과 관련된 기사조차 찾아보지 않는 박우형이었지 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흥미로운 소문을 들은 박우형은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오랜만에 핸드폰을 꺼냈다.
그걸 본 매니저가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 웬일이야. 핸드폰을 다 꺼내 보고?”
인터넷에선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들이 싸우고 있겠 지만. 박우형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배우는 오직 연기로만 말하 는 법이니까.
매니저의 말조차 듣지 못한 채. 무언가를 보던 박우형이 웃음 을 터트렸다.
“형. ‘폭군의 세자’ 기사 뜬 거 봤어?”
“나야 이미 다 봤지. 네가 나오는데 ‘세자의 폭군’에 관한 건 3 류 인터넷 기사까지 깡그리 읽는 중이다. 너 원래 그런 거 안 보 잖아. 왜? 너 캐스팅 기사 뜬 것 때문에?”
“에이. 내가 배우 생활 하루 이틀 하나. 그거 말고.”
“그럼? 아, 차서준?”
한솥밥을 먹은 지도 6년이 훌쩍 넘은 매니저다. 척하면 척이라 고 박우형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단박에 파악하곤 고개를 끄 덕였다.
“아주 재밌는 기사가 떴던데? 난 아역 배우들끼리 그런 선의 의 경쟁을 하는 건 또 처음 봤다니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더라. 당연히 우리 쪽에선 기분 좋은 난리라 다행이긴 하지만."
만약에 디스전이라던가, 내 배역을 뺏어간 괘씸한 차서준. 이 런 기사라도 터졌다간 시작하기도 전부터 아수라장이 되었을지 도 몰랐다.
하지만.
차서준이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에 걱정하던 이들조차 깜짝 놀 랄 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어디 한번 연기력으로 붙어보자는 식으로 기사가 쏟아지기 시 작한 것이다.
아마 방금 박우형이 웃음을 터트린 것도. 그런 기사들을 확인 해서 그랬던 모양.
“아쉽네, 아쉬워. 나는 최이안이 더 괜찮을 것 같던데. 걔 저번 에 준형이 형이랑 촬영할 때에도 제법 잘했다던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팀장님이 아까워는 하시더라. 이미 사 극에서 검증된 애를 건너뛴 거 아니냐고 하시면서.”
자신이 출연하게 될 ‘폭군의 세자’였다. 기왕이면 이미 사극에 출연하여 검증된 실력을 보여준 최이안이 더 마음에 들었던 박 우형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배우 김준형도 박우형에게 적극 추천했던 아역 이 최이안이었으니까.
그런데.
운전대를 잡은 매니저가 이어서 꺼낸 말은 박우형조차 의외란 표정을 짓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거 원래 최이안 쪽으로 거의 기울어졌던 건데.”
“그런데?”
“너 구름엑터스의 서도현 대표 알지?”
“당연하지. 이쪽 업계에서 서도현 세 글자 모르면 간첩 아니 야?”
“그 서도현 대표가 직접 차서준 데리고 가서 배역 따냈다더라.”
제법 솔깃한 이야기였다.
박우형 자신이 세자 이환에 캐스팅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 이던가.
농담처럼 떠도는 ‘사극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 덕분이 아니던 가. 그 정도로 연기력 하나로 감독과 작가를 사로잡을 능력이 있 었다.
그런데 지금 매니저의 말은 차서준 역시 자신의 능력으로 당 당히 최이안을 밀어냈다는 뜻이니.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증이 불쑥 들었다.
“아니. 그러면 최이안 소속사에서 열 받아서 동시간대로 들어 온 건가? 일부러 한 판 붙어보자고? 진짜?”
“맞을걸? 최이안 쪽에서 정말 자신이 있었나 보더라. 거기 대 표가 그냥 동시간대인 NBC로 바로 연락한 모양이던데?”
“골 때리게 재밌네.”
그렇다면 제법 재밌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팀장이 ‘폭군의 세자’라며 대본을 가져왔을 때 걱정이 되던 박우형이었으니까.
사극은 이제 제작비가 워낙 많이 들어 저물어가는 추세였다. 그 대안으로 뜬 퓨전 사극 역시 아직까지 크게 터진 것이 없었고.
대본이야 끝내줬지만. 세상 명작 드라마들도 빛조차 못 보고 처참한 시청률로 사라진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좋은데?”
그랬다.
QTV가 제법 시청률이 많이 올라왔다곤 하나. 아직까지 종편 채널이라는 한계를 완벽하게 극복하진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NBC에 출연하는 최이안 쪽에서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유야 뻔했다.
김은율 작가의 복귀작인 만큼 NBC에서도 자신이 있다는 거다. 이런 화제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다음, TV 앞에서 놓아주 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안 그래도 홍보팀장님이 헤벌쭉해지셨더라. 이보다 더 좋은 홍보 소스가 어딨겠냐면서. 우형이 네 기사도 더 많이 내보내겠 다던데?”
“그 누님 아주 신이 나셨겠네. 그보다 형.”
“응?”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던 매니저는 박우형의 말을 듣고서는 얼 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차서준은 연기 잘해?”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박우형은 쉬는 동안에는 절대 TV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직 연기에 미쳐 사는 만큼. 쉬는 기간에는 일절 TV 프로그램 을 보지 않았다. 그것은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
해외 명작들의 배우 연기를 보면 배울 것이 많다면서. 쉬는 동 안에는 오직 집안에 틀어박혀 영화만 주구장창 보는 사람이 눈 앞의 박우형이었다.
그러니 ‘너에게 다시’가 최근 대박이 났더라도 예고편조차 본 적이 없던 것이다.
“우형아. 12부작이니까 한 번쯤은 봐도 괜찮을걸? 거기 배우 들 연기가 제법 괜찮아. 김순철 선생님도 나오셨고.”
“나를 잘 아는 형이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오늘 집에 가서 한 번 봐야겠는데?”
“휴지 준비해서 봐라. 보다가 찾게 될 테니까. 솔직히 나도 두 번 울었다.”
“하하. 형, 나 박우형이야. 어지간한 연기에는 내 가슴이 미동 조차 안 해. 나 몰라?”
박우형이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매니저의 수상 한 웃음뿐이었다.
다음 날.
밤을 샜는지 뻑뻑한 눈을 한 박우형이 매니저를 집으로 불렀 다.
“형. 나 차서준이랑 자리 좀 만들어줘.”
“뭐?”
“나 어제 하루 종일 ‘너에게 다시’를 다 봤거든?”
“그걸 어제 하루 동안 다 봤다고?”
“하나만 보려고 했는데. 정신 차리니까 다 봤더라고. 근데 미 쳤더라고.”
박우형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매니저에게 말했다.
“‘너에게 다시’가 작가나 연출이 괜찮긴 했지. 그러니 시청률 도 잘 나온 거고.”
“아니. 그거 말고. 그냥 차서준 걔가 미쳤다고!”
하루라도 빨리 차서준을 만나고 싶은지. 어제의 권태로운 표 정과 다르게 매니저를 재촉했다.
하루 만에 차서준의 팬이 되어서 돌아온 박우형이었다.
*
서도현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네? 박우형 선배님이요?”
“그래. 세자 이환의 성인 역으로 캐스팅된 그 박우형. 박우형 이 서준이 너를 꼭 좀 만나보고 싶다고 하던데.”
“저를요? 왜지?”
나랑 박우형이 작품에서도 접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현 재까지 나온 대본을 보면 4화 정도에서 하차할 예정이었고. 그다 음 박우형이 들어갈 차례였으니까.
게다가 나랑 박우형이 만나면 퓨전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가 될 판이었다.
그런데.
박우형 측에서 먼저 만날 수 있느냐는 연락이 왔다는 거다.
“저쪽 팀장이 이유를 말하긴 했는데.”
했는데?
뭔가 이유를 말하려는 서도현의 얼굴이 허탈해 보였다.
“서준이 네 연기에 팬이 되었다던데? 뭐라더라. 그 상대를 이 끌어내는 연기에 반했다면서.”
그걸 봤다고?
서도현의 저 말에 정작 놀란 사람은 나였다. 김순철 선생님을 제외한 촬영장의 그 누구도 캐치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내가 호흡으로 이끌어준 김우승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박우형이 ‘너에게 다시’를 보면서 그걸 느꼈다는 거다.
“삼촌.”
“응?”
“그러면 한 번 시간을 잡아주세요. 최대한 빠르게.”
나 역시 궁금해졌다.
아무리 내가 세자 이환의 어린 시절에 출연하여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한들. 뒤에 등장한 박우형이 깽판을 친다면 말짱 도 루묵이었다.
그런데 그걸 캐치할 정도의 눈을 가진 배우라면. 분명 가진 재 능이 뛰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만나봐야지.
이틀 뒤.
나는 박우형을 만날 수 있었다.
“이야, 차 배우! 실물이 훨씬 잘생겼네. 반갑다. 나는 박우형.”
“안녕하세요 선배님. 차서준입니다.”
박우형을 만난 순간. 묘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체취 이런 거 말고. 연기 하나에만 꽂혀서 달리는 놈들에게서만 나는 냄새.
그나저나 첫 만남인데 묘하게 박우형의 텐션이 업 된 거 같다. 그것도 상당히 하이 텐션의 느낌이랄까.
“우선 이것부터!”
잠시 들고 온 가방을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불쑥 꺼내 내게 내 밀었다.
뭐지?
“사인 부탁한다!”
“···네?”
이번만큼은 20년 이상의 연예계를 경험한 나조차 쉽게 대응하 지 못했다.
나는 이제 한 작품을 끝낸 신인 아역 배우였고. 저쪽은 배우로 서 완벽하게 자리 잡은 연예인이었으니까.
원래 지금 상황이 반대로 펼쳐져야 정상이라는 건데. 그럼에 도 박우형은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내게 요구한 다.
“우주 연기 끝내주더라. 완전 팬 됐다니까. 그러니 빨리 싸인 좀!”
빨리 사인을 해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박우형에 결국 사인을 해주었다.
종이를 다시 받아 간 박우형이 보관할 케이스를 꺼내 사인지 를 조심히 넣는다. 저것도 챙겨왔어?
“팬이 된 기념으로 하나 물어봐도 될까?”
“네?”
“배우 차서준의 김우주 캐릭터 분석은 어떻게 한 거지?”
신기하네.
분명 박우형의 눈앞에 있는 나는 그저 7살의 어린 꼬맹이일 뿐 일 터였다. 그런데 박우형은 마치 동료 배우를 대하듯 나를 대하 고 있었다.
그러면 대답해줘야지.
“그러니까···.”
내가 김우주를 어떻게 분석했는지 설명해주자.
“크으.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박우형이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런 박우형을 보니 문득 어떤 한 사람이 떠오르는 거 같기도 하고.
김도경 시절에도 저런 캐릭터가 하나 있긴 했었다. 오직 집 안 에만 틀어박혀서 오직 연기 하나만을 보고 사는 배우.
30대 중반부터 꽃을 피우더니. 이우영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 어 국내 탑급 배우가 된 누군가가 겹쳐 보인다면 착각일까.
심지어 그 배우는 재밌는 사모임을 하나 만들었었다. ‘연기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이름이었던가. 만나면 오직 연기에 대해 서만 떠드는 더럽게 재미없는 곳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면 질문 하나만 더!”
“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박우형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 닌 ‘폭군의 세자’ 대본이었다.
“배우 차서준이 생각하는 ‘폭군의 세자’ 이환은 어떤 사람인지 들을 수 있을까?”
“아하.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하셨구나.”
“그렇지! 하나의 배역을 가지고 두 사람이 연기하는데! 당연히 어린 시절 세자를 연기하는 차서준의 분석이 중요하지!”
그러니까.
박우형은 첫 만남 인사를 제외하곤 오직 ‘연기’에 관한 이야기 만 주구장창 꺼내고 있었다.
심지어 서준아, 이렇게 애를 대하는 느낌이 아닌 한 명의 동등 한 배우로서 말이다.
“내가 엄청 흥미로운 제안 하나를 하려고 하는데.”
“제안이요?”
내 말에 좌우를 홱홱 살핀 박우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 니 내 귓가에 입을 가져오더니, 누구도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너. 형이랑 여행 가지 않을래? 사극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연 기 연습을 위해 꼭 가는 나만의 장소가 있거든.”
재밌다.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