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너에게 다시’ 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최이안이 부상으로 하차를 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 말은 어린 세자 배역을 두고 내가 최이안과 경쟁을 해야 하 는 상황이라는 뜻.
본격적인 테스트 시작 전에 스튜디오 마운틴의 대표인 박홍철 이 그 부분을 먼저 언급했다.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이 자리에선 확답을 드릴 수가 없 습니다. 최종적인 캐스팅 확정 전에 확인하기 위한 자리이니 말 입니다.”
“괜찮습니다. 일단 저희 차 배우의 연기가 궁금하실 테니 확인 부터 하시죠.”
서도현의 말에 박홍철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한 말 안에 담긴 자신감을 읽은 것이다.
잠시 박홍철의 시선이 나를 훑는다. 저 안에 담긴 시선을 느껴 보자면 ‘외모는 합격,’ 정도가 되겠다.
“대표님. 빨리 시작합시다.”
연출을 맡게 될 김준수 PD가 박홍철을 재촉한다. 그 옆에 ‘폭 군의 세자’의 대본을 쓴 정은희 작가도 거들었다. 그 둘을 애써 무시하며 박홍철이 내게 물었다.
“차서준 군. 지금 바로 가능하겠습니까? 잠깐 시간을 좀 줄까 요?”
“아니요!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내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눈을 빛냈다.
가벼운 자리가 아니었다. 최이안을 밀어내고 어린 세자 역을 따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린 중요한 자리.
그럼에도 내가 중압감 하나 느끼지 않는 표정으로 당차게 고 개를 끄덕였으니 당연한 반응.
“그러면 제가 도와줄게요. 괜찮죠?”
“네! 감사합니다. 작가님.”
특별히 정은희 작가가 대사를 받아주기로 했다.
나는 잠시 호흡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 특별한 습관 같은 건 아니다. 그저 더 강한 임팩트를 주기 위한 장치일 뿐.
“비 내리는 궁궐. 왕이 등장하고. 기다리고 있던 세자가 그 앞 에 엎드리는데.”
그 지문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
박홍철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습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첫 번째로.
분명 이 자리는 중요한 자리였다. 어린 세자 역을 최이안에게 서 뺏어올 수 있느냐가 결정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박홍철이 놀란 점은 차서준이 대본을 꺼내지도 않았다는 것이 었다.
‘대사를 다 외웠어? 심지어 상대방 대사도?’
최이안을 원하는 자신 때문에 어떤 장면을 요구할지 몰랐을 터였다. 심지어 방금 어떤 장면을 할지는 박홍철 자신이 선택했 단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도 차서준은 대본 자체를 꺼내질 않았다.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대사들이 다 들어있다는 듯이.
“아바마마! 부디 그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그깟 신하들의 목소리에 흔들린다면. 장차 나아가 국정을 어 찌 운영할 수 있겠느냐!”
“소자의 불찰이었습니다. 허나 대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 이고,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 한 국가 왕으로서의 자격이라 하였 사옵니다. 이번 한 번만···.”
“네 이놈!”
두 번째로.
대사를 치는 정은희 작가는 발성부터가 정말 형편없었다. 아 니, 그 대사를 받아주는 사람이 차서준이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바마마! 제발!”
‘그러니까··· 저게 7살이라고?’
연기야 잘한다는 것쯤은 ‘너에게 다시’를 봤으니 안다. 그래도 그렇지. 저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닌가?
옆자리에 앉은 김준수 PD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는지. 참 았던 숨을 터트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배우 차서준이 어린 세자를 연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읽었 던 ‘폭군의 세자’ 속 어린 세자가 눈앞에 있었다.
잠시 후.
“대표님. 뭘 고민해요. 빨리 나가서 계약서 가지고 오지 않고.”
“그게···.”
박홍철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저기 차서준 뒤에 서도현 대표의 미소가 보이고 있었으니까.
좋다.
최이안을 밀어붙이려던 자신의 눈이 옹이구멍으로 보일 정도 로 좋았다. 아니, 미쳤다!
제작사 대표로서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눈앞의 차서준을 잡 으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고.
그런데.
테스트가 끝나자마자 브라보를 외치면 어쩌자는 건가. 심지어 구름엑터스 대표가 뒤에서 보고 있는데.
‘하아. 앓느니 죽지.’
최이안을 은근슬쩍 언급하며 출연료를 협상하려던 박홍철의 계획은 시작하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옆에서 게거품을 물고 있는 김준수 PD와 작가 정은희 때문에.
“하아. 서도현 대표님. 따로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박홍철의 말에.
“그러시죠. 감독님과 작가님이 우리 차 배우와 작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대표님과 저는 일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서도현이 미끼를 문 생선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분명 협상 전부터 꼬인 상황. 그럼에도 박홍철의 표정은 나쁘 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쿡 찌르기만 한다면 웃음이라도 터트릴 표정이 었다.
*
“차서준 군. 편하게 서준이라고 불러도 될까?”
“네! 감독님.”
“뭐? 그렇지. 이제 서준이랑 같이 작품을 할 거니 감독님이지.”
내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린 김준수 PD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허나 그보다 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옆에서 기회 를 호시탐탐 엿보던 작가 정은희 작가였다.
“혹시 어릴 때부터 사극을 많이 봤니?”
“네. 아빠가 사극을 좋아하셔서 옆에서 같이 봤어요.”
“그래서 그런가? 톤 자체가 되게 안정적이네.”
내 말에 역시, 하는 표정으로 정은희 작가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작가님. 제가 서준이에게 물어보려던 질문이었는데.”
“감독님. 우리 아직 물어볼 게 많잖아요. 누가 먼저 물어보는 게 뭐가 중요해요.”
정은희 작가의 저 말에 김준수 PD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까 어린 세자와 폭군인 왕과 대화하는 부분에서. 왜 그렇게 표정을 지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공포가 아닌 꼭 다른 걸 느끼는 표정 같던데.”
김준수 PD의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가방에서 꾸 깃꾸깃해진 대본을 꺼냈다.
작은 손에 들려 나오는 대본을 바라보는 김준수 PD와 정은희 작가의 눈이 반짝인다.
꼬깃꼬깃해진 대본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얼마 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를 보여줬으니까.
실제로도 내 스스로 만족스러운 연기를 선보이기 위해 제법 많은 시간을 투자한 나였다.
“서준이는. 연습을 정말 많이 했구나?”
“네! 오늘이 테스트라고 해서 대본도 다 외웠어요.”
“정말? 지금 여기서 확인해볼 수도 있어.”
“정말이에요.”
믿을 수가 없었는지. 정은희 작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2화 대본 속 몇몇 대사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에나···.”
막힘없이 나오는 내 대사에 멍한 표정으로 입만 벌렸다.
마치 ‘세상에 저런 일이’에 나오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 한 사람처럼.
그러면 작가는 공략 완료했고.
사실 대본은 정은희 작가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꺼낸 것일 뿐 이었다.
“아까 감독님이 물어보신 이 장면에서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 어요. 세자는 분명 왕이 폭군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장차 왕이 될 자신이 그런 왕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알지만?”
“너무나도 무섭다. 눈앞의 폭군인 왕보다, 저 폭군의 피를 물 려받은 자신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분노가 더 무섭다. 이렇게요.”
“옳거니! 그렇지! 거기서 어린 세자가 고민하는 건 폭군에 대 한 두려움이 아닌. 내면에 잠재된 아비를 닮은 자신에 대한 두려 움이거든!”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준수 PD가 벌떡 일어나 물개박수를 친다.
옆에 있던 정은희 작가의 입은 조금 전보다 더 벌어졌다. 저대 로 두다간 턱이 빠질지도 모르겠는데.
슬슬 상황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흠흠. 여기는 아주 훈훈하구만.”
서도현과 박홍철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조금은 떨떠름한 얼 굴을 한 박홍철과. 그 옆에서 포커페이스 같지만 내게는 보이는 웃음기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서도현.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삼촌. 어떻게 됐어요?”
돌아오는 차 안.
나는 굳이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도현에게 물었다. 서도현 의 표정이 꼭 마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달라는 것 같아서.
정답이었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서도현이 말을 꺼낸다.
“됐다. 서준이 네 차기작으로 ‘폭군의 세자’가 확정 났다. 캐스 팅 기사는 저쪽과 조율해서 일정이 최종 확정되면 내보내기로 했고.”
“정말요? 역시 삼촌이에요!”
“그럼. 삼촌만 믿으라고 했잖아.”
처음 사극을 한다 했을 때 걱정하던 서도현은 이제 없다.
보여줬으니까.
대본을 가져온 날. 그 자리에서 서도현에게 보여주었다. 그래 야 서도현도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
“아, 삼촌. 그리고 이번 ‘폭군의 세자’를 하면서 좋은 생각이 하 나 떠올랐는데요.”
“좋은 아이디어?”
“네. ‘피치노’와 연계해서 좋은 프로젝트 하나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서도현이었다.
*
우리집에 새로운 씽씽이가 생겼으나. 엄마, 아빠와 함께 움직 이는 주말이 아니면 주차장에서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아빠. 왜 씽씽이를 타고 출근하지 않아요?”
“서준아. 아빠는 주말에 서준이랑, 엄마랑 같이 여행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무엇보다 서준이가 선물해준 씽씽이잖 니. 소중하게 타야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회사에서는 보는 눈이 많을 터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빠가 내가 사준 차를 타고 나타났다? 아마 뒤에서 수군수군거림이 있 을지도 몰랐다.
아빠는 그런 상황을 애초부터 차단하고 싶은 모양. 더 정확하 게는 내가 구름엑터스와 계약하면서부터 말했던 엄마, 아빠의 결심을 지키고 싶은 듯했다.
좋다.
이런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렇기에 내가 우리 가 족을 위해 차를 선물하는 큰 결심을 한 것이고.
“맞다. 당신이 면허를 따면 어때?”
“제가요?”
“응. 주말에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장을 보는 것도 즐겁고 좋은 데. 내가 출근한 동안에 당신이 서준이 데리고 다녀도 좋을 것 같 아서.”
내 질문에 답하던 아빠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엄마에게 말 했다.
그 말을 들은 엄마가 나를 본다.
“서준아. 엄마랑 평일에도 마트에 같이 놀러 가면 재밌을 거 같니?”
“네! 유치원 끝나고 엄마랑 여기저기 같이 다니고 싶어요.”
“아빠에게 맛있는 걸 해줄 장도 보고?”
“맞아요! 이제 마트에 갔다가 무겁게 낑낑거리며 들고 오지 않 아도 되잖아요.”
내 말이 도화선이 된 것일까.
엄마는 바로 결단을 내렸다.
바로 운전면허를 따기로 한 것.
지금까지야 엄마가 차를 끈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면허도 없었 지만. 차가 생긴 이상 나와 함께 다니고 싶어진 모양이다.
“서준아. 엄마가 빨리 면허를 따서. 서준이와 함께 나가자.”
“좋아요!”
그런데.
최근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는 아닌 데 고려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겨버렸다.
엄마의 뱃속에 동생이 생긴 것.
이미 면허 학원에 등록하여 다녔기에. 필기는 합격한 상황.
“여보. 괜찮겠어?”
“걱정하지 말아요. 무엇보다 애기가 태어나면 병원에 갈 일도 많을지도 모르는데. 그때가 되면 서준이까지 데리고 움직이기 힘들잖아요.”
이런 걱정을 하는 아빠와 나를 보며 엄마가 당당히 말했다.
“이제 애기가 태어나면 더 따기 힘들잖아요. 초기는 피해서 일 정 잘 조율할 테니 걱정 마세요.”
역시나 엄마는 강했다.
*
최이안의 소속사 지엔디 엔터테인먼트 대표실에선 어처구니 없다는 웃음이 터지고 있었다.
“허허. 뭐라고? 폭군의 세자 쪽에서 우리를 퇴짜 냈다 이거지?”
“예. 최근에 구름엑터스의 서도현 대표와 미팅이 있었다는 소 문이 있었는데.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봅니다.”
지엔디 엔터테인먼트 대표 박한수는 콧등을 찌푸렸다. 대외적 으로는 진척된 것은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 이안이보다 차서준이 낫다는 평가를 내렸다라. 그렇다 면 알려줘야지.”
“어떻게 하시려고요?”
“잠시만 기다려봐.”
잠시 책상을 툭툭 두들기던 손가락이 멈춘다. 그러더니 핸드 폰을 들어 번호 하나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오랜만입니다 김 작가님. 저번에 말씀하셨던 우리 이안이 캐 스팅 건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언제 시간 괜찮으 십니까?”
‘폭군의 세자’가 종편 채널인 QTV라면. 지금 수화기 너머 들 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상파인 NBC에서 복귀작을 준비 중 인 김은율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