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스튜디오 마운틴의 대표 박홍철은 달달 떨리는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만큼 방금 들은 내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정 작가. 우리 정말 다시 한번만 생각해보면 안 될까?”
“왜요? 대표님은 저 못 믿겠어요?”
작가 정은희의 말에 박홍철이 펄쩍 뛰며 두 손을 저었다.
“아니! 내가 우리 정 작가를 못 믿으면. 대체 어떤 작가를 믿겠 어. 다만···.”
이걸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박홍철은 베베 꼬인 머리 때문에 쥐라도 날 것 같았다.
이미 QTV 드라마국과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된 참이었다.
최이안.
얼마나 좋아. 이미 영화에서 한 차례 사극에서 얼마나 안정적 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지 보증된 수표였다.
그런데.
“나도 당연히 ‘너에게 다시’ 봤지. 그런데 이게 정 작가도 알다 시피 사극이랑 현대극이랑 연기톤 자체가 달라요. ‘거북선’에 나 왔던 배우 장우철 기억 안 나?”
“알아요. 근데 ‘너다’를 본 순간 확 삘이 꽂혔다니까요.”
“삘 좋지, 좋다 이거야. 그런데 이건 발성부터가 다르다니까. 현대극에서 날아다니던 배우들이 사극에서 죽 쑤는 거 한두 번 봐?”
“우리는 퓨전 사극이잖아요.”
“퓨전도 사극이잖아. 하아.”
결국 지끈거리는 머리를 참지 못하고 부여잡은 박홍철이었다. 벽을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이놈의 작가들 특유 쇠고집이 문제였다. 방에 틀어박혀 글만 써서 그런가. 뭔가 자신만의 삘이 꽂히면 말이 통하질 않았다.
지금처럼.
“그래서 거의 이야기가 끝나가는 최이안 대신. 잘 할 수 있을 지 없을지도 모를 차서준을 컨텍해보자고?”
“네. 이거 세자의 어린 시절인 4화까지 시청자들을 설득시키 지 못하면. 뒤에 세자 이환의 캐릭터가 붕 뜰 수도 있어요.”
“그러니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최이안으로 가자는 거잖아.”
“아뇨.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시청자들이 세자 이환의 감정에 몰입되게 할 수 있는. 그런 충격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아역 배우가 필요해요.”
“그게 차서준이고?”
“네.”
물론, 드라마 제작사 대표로서 박홍철도 최이안 대타로 들어 간 차서준의 합류가 ‘너에게 다시’가 초대박 날 수 있었던 비결 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아니! 지금 방송국 쪽에서도 무조건 최이안이면 한다니까. 최 이안이 딱 다리 부상도 완벽하게 나아서 차기작 찾고 있다잖아. 이건 드라마 홍보 소스로도 딱이에요.”
“홍보보다 중요한 게 내용이에요. 대표님.”
“이번에 괜히 저울 위에 올려보려다가 캐스팅 어그러지기라 도 하면. 우리 편성 날아갈지도 모른다니까? 김 국장 성깔 몰라?”
드라마 황무지였던 종편 채널의 QTV를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 올린 전설적인 인물이 김 국장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무리 퓨전 사극이라 할지라도 사극은 사극이다. 세트장부터 시작해서 전통 복장, 분장 비용, 소도구 제작비까지. 한두 푼 들 어가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방송국과 제작사인 자신의 입장에선 도박보다는 안정적인 맛 이 더 구미가 당기는 법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해요.”
“어떻게?”
한 발 물러나는 듯한 정은희의 말에 박홍철이 반색을 했다.
하지만.
정은희의 말이 이어질수록. 다시 박홍철의 얼굴이 거무죽죽해 져만 갔다.
“대표님이랑 감독님이랑 저까지 해서. 직접 확인해보자고요. 과연 차서준이 어린 시절의 세자 이환을 소화할 수 있을지 아닐 지.”
“어이쿠.”
이미 QTV에서 편성에 대한 오케이 사인을 보낸 상태. 그다음 캐스팅에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작가였다.
‘내가 내 발목을 찍었지. 저번에 그 개고생을 하고도 이 똥고집 을 또 잡았으니.’
특히나 한 고집하기로 유명한 작가가 정은희였다. 다른 사람 보다 전작을 같이 한 스튜디오 마운틴의 대표인 자신이 누구보 다 잘 알았는데.
새끈하게 빠진 5화짜리 대본에. 뭐라도 홀린 듯 계약서까지 찍 은 사람이 박홍철이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발등을 자기가 찍은 셈이다.
‘갑자기 그놈의 차서준에 꽂혀가지곤.’
아무리 차서준이 ‘너에게 다시’로 라이징 스타가 되었다곤 하 나. 연예계에 한 작품 반짝 떴다가 사라지는 배우가 한둘이었던 가.
물론, 차서준이 어린 나이답지 않게 미친 연기력을 선보였다 는 건 박홍철 역시 잘 알았다.
다만.
‘쩝. 최이안 쪽에서 푸시해주기로 한 걸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데.’
최이안과 함께 주렁주렁 딸려올 과실들을 놓치기엔 너무나도 아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작가가 드러누우면 다 된 판에 재 뿌리기가 될 터인데.
“오케이! 그러면 직접 만나서 확인하고. 아니다 싶으면 정 작 가도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는 거다. 알았지?”
“네. 좋아요.”
‘너에게 다시’가 첫 작품이라고 했다. 이제 7살의 꼬맹이가 처 음 하는 사극톤 연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박홍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
“‘폭군의 세자’라면···. 퓨전 사극?”
“네!”
퓨전 사극이라는 말에 서도현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마치 굳 이 왜 그런 도전을? 하는 얼굴이다.
물론, 당분간 휴식을 갖겠다던 내가 작품을 한다 해서 반겼지 만. 갑작스러운 사극 도전 선언은 납득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서준아. 삼촌 생각에는 한두 편 정도는 현대 배경의 드라마를 찍고. 천천히 준비하면서 사극에 도전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 하는데.”
서도현의 말이 정론이었다.
일반적인 현대 배경으로 한 연기와, 과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의 연기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사극 전문 배우라는 특수한 호칭까지 생겨났을까.
“혹시 ‘폭군의 세자’ 대본 나온 거 있어요?”
“안 그래도 저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서준이 너를 세자의 어린 시절 역에 캐스팅하고 싶다고.”
“정말요?”
“그래. 서준이 너만 좋다면 바로 일정 잡아보마.”
잘됐다.
안 그래도 확인한 참이었다. ‘폭군의 세자’의 작가 정은희의 이전 작품들에 대해서.
“정은희 작가라. 일단 기본 이상은 해주는 작가니. 대본 먼저 구해보마.”
정확히 다음 날. 서도현이 ‘폭군의 세자’의 대본을 가지고 나 타났다.
대본을 구하자마자 읽어봤는지.
“확실히 읽어보니 욕심이 나긴 하더라. 서준이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알았니?”
서도현이 용한 점쟁이라도 보듯 나를 본다. 마치 자신도 대본 을 읽고 나서야 느낌이 왔는데. 너는 대체 무얼 보고서 감이 왔냐 는 얼굴이다.
20년 배우 생활을 하면 감이 와요. 라고 대답할 순 없으니.
“그냥 세자 역이 엄청 재밌어 보였어요.”
이런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보는 눈이 다른가?”
용하다는 눈빛을 보내던 서도현은. 이내 코코아 한 잔을 가져 와 내 앞에 주고선 자신의 자리로 간다.
사락사락. 대본을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가져온 대 본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어때?”
서도현이 내게 물었다. 이제는 7살 꼬맹이가 아닌 한 명의 배 우로 대하는 게 당연시된 우리였다. 이렇게 날 대하는 사람은 서 도현과 김우승 단 두 사람뿐이었지만.
“재밌어요. 특히나 이 세자의 고뇌가 너무나도 재밌어요.”
“그래? 안 그래도 세자의 어린 시절이 중요하니까. 저쪽에서 도 최이안을 염두에 두고 있던 모양이더라.”
최이안?
안 그래도 묘하게 자꾸만 얽힌다는 생각이 든다.
다리 부상으로 ‘너에게 다시’ 우주역을 시작으로. 전속 계약을 맺은 ‘피치노’까지.
모두 최이안에게 가려던 것이 내게 왔으니.
“삼촌이 보기엔 누가 더 잘할 거 같아요?”
내 물음에 서도현이 잠시 말없이 바라본다. 그러더니 피식 헛 웃음을 흘린다.
“음. 삼촌이 봤을 땐. 최이안은 그 나이치고는 제법 잘하는 편 이지.”
바로 뒷말을 잇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도현은.
“서준이 너는 그냥 연기를 위해 타고난 천재고.”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교선상에 올리는 거 자체가 실례다.”
“헤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그보다 저쪽에서 한 번 보자는데. 언제가 좋겠니?”
얼굴 보면서 대화나 나누자는 게 아니다. 내가 과연 최이안을 밀어내고 세자의 어린 시절 역에 어울릴지를 확인하겠다는 것.
배우에게 있어 숙명이나 다름없는 경쟁이었다. 매력적인 하나 의 배역을 두고서 경쟁자들을 밀어내야 한다는 것은.
“이틀 뒤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정말?”
내 대답에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는 표정이 돌아온다. 당장 사 극톤을 잡는 데까지 며칠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하지만.
이미 사극 촬영도 수차례 경험했던 나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까지.
어땠냐고?
30대부터는 제왕의 역할에 김도경만한 배우가 없다는 평가까 지 들었던 나였다.
*
박홍철은 찌푸린 미간을 펼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 고 있는 광경 때문에.
“역시 정 작가님! 저도 차서준의 연기를 보면서. 크으, 쟤를 데 려오면 느낌이 빡 살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요? 역시 감독님이라니까. 솔직히 ‘너다’가 대박 난 이유 도 우주 때문이잖아요. 작가가 대사를 아무리 찰지게 쓰면 뭐해. 배우가 현장에서 개판 치면 끝인데.”
“바로 그겁니다! 연출로 아무리 살려보려고 해도. 발연기는 안 되는데. 이걸 위에선 몰라요. 아직도 이름값으로 커버가 되는 줄 안단 말입니다.”
아주 쿵짝이 잘 맞았다. 제작사 대표로선 저 환상적인 궁합에 기뻐해야 할 터였지만. 지금 박홍철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작가인 정은희만 하더라도 골치가 아팠는데. 연출을 잡은 김 준수 PD의 반응은 아예 한술 더 뜨고 있었으니.
“대표님. 어디 속이라도 안 좋으십니까?”
너 때문에 그렇다! 라고 소리치려던 박홍철은. 이내 표정을 풀 고 속으로 위스키를 외쳤다.
“하하. 아닙니다. 아까 점심때 먹었던 짜장면이 체했나. 소화 제 먹었으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어쨌거나 드라마가 대박 나기 위해선. 눈앞의 환장의 쿵짝을 선보이는 두 사람이 잘 맞는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박홍철이었다.
그때였다.
문을 열고 두 사람이 등장했다.
하나는 이 상황을 벌어지게 만든 아역 배우 차서준.
다른 하나는.
‘서도현 대표?’
이런 자리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고 소문 난 구름엑터스 의 대표 서도현이었다.
보통 구름엑터스의 기둥급 배우들이나, 대작급 미팅이 아니면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는 사람이었는데.
고작 아역 배우의 미팅. 그것도 20부작에서 고작 5화 초반부까 지만 출연하는 배역을 결정하는 자리에 나올 거라곤 박홍철조차 예상치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구름엑터스의 서도현입니다. 여기는 저희 소 속사 배우 차서준입니다.”
“안녕하세요. 차서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차서준이 서도현의 인사에 고개를 꾸벅 숙이자.
“어머, 감독님. 지금 제 앞에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던 어린 시 절의 세자 이환이 나타났어요.”
“작가님도 그렇습니까? 저는 작가님이 설명하던 세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줄 알았습니다. 차 배우 어서 앉아요.”
환장의 쿵짝이 호들갑을 떨며 반겼다. 분명 방금 전까지의 박 홍철이었다면 또 속이 뒤틀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괜찮은데?’
정작 차서준을 직접 확인한 순간 가장 놀란 사람이 박홍철 자 신이었다.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작가 정은희나, 감독 김준수보다 더.
같이 등장한 서도현 때문이 아니다. 탑급 배우들은 직접 마주 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이쪽 업계에서 오랫동안 구른 박홍 철 같은 이들만 볼 수 있는 ‘배우’만의 아우라가 있단 말이다.
그런데.
정말 말이 되질 않긴 한데.
서도현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차서준을 본 순간.
‘뭐, 뭐야.’
박홍철은 그 아우라를 보았다.
고작 7살이 된 아역 배우에게서.
“자자. 차서준 배우는 여기 앉으시고. 서 대표님도 이쪽에 앉 으시죠.”
박홍철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안내했다. 조금 이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