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아침 8시.
평소라면 방학이라며 침대에서 꾸물대었을 테지만. 오늘만은 아니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인 어제보다 손꼽아서 기다려온 날이었으 니까.
“읏챠!”
눈을 번쩍 뜬 김도윤은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두 꺼운 이불도 착착 개어놓은 뒤. 재빨리 거실로 뛰쳐나갔다.
“엄마! 엄마! 삼촌 왔어?”
이미 크리스마스인 어제부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수십 통의 전화를 한 조카 덕분에.
“그래 벌써 왔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못 일어날 줄 알고 삼 촌이 일찍 왔는데.”
“응. 삼촌도 굿모닝.”
이른 아침부터 소환된 서도현이었다.
“삼촌! 나 오늘 샵에 들렀다 가는 거야?”
“샵도 알아?”
“당연하지! 오늘 나 촬영도 있으니까. 샵에 가서 예쁘게 하고 가야 돼. 서준이랑 같이 화면에 나와야 되잖아.”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엄마가 차려준 아침부터 먹자. 배고프 면 연기 못해.”
“엄마! 밥 주세요.”
서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평소와 다르게 재빨리 식탁에 다가와 앉는 김도윤이었다.
“너는 엄마랑 아침마다 그렇게 전쟁을 하더니. 엄마 섭섭해지 려고 그래.”
“엄마 미안.”
본인도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김도윤이 머리를 긁으며 살포시 웃었다. 뒷말에 엄마 사랑해요. 라는 말을 덧붙이 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휴, 말이나 못 하면. 넌 오늘 조카 잘 챙기고.”
“알았어.”
후다닥 아침을 먹고. 뜨끈한 물에 샤워까지 마쳐 뽀송해진 김 도윤을 데리고. 서도현이 부드럽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 차가 멈춘 곳은 차서준이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였다.
차서준이 차에 올라탐과 동시에. 격한 기쁨을 감추지 못한 김 도윤이 달려들었다.
“서준아!”
“도윤이 오랜만. 삼촌도 크리스마스 잘 보냈어요?”
“그래. 얼른 타서 도윤이 좀 진정시켜줘라.”
차에 탄 그 순간부터 입을 멈추지 않던 김도윤에게 시달리던 서도현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샛별반 친구들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게 된 차서 준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바로 오늘 촬영에 나올 김도윤 분량 대본을 꺼낸 것이다.
“도윤아. 가는 동안에 나랑 오늘 촬영 대사 연습하자. TV에도 나오는데 좋은 연기 보여줘야지.”
“좋아! 얼른 하자. 얼른.”
그 덕분에 차가 샵에 들렀다 촬영장에 도착하기까지. 서도현 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뒤에서 조잘거림 정도야, 여기 오기 까지의 김도윤의 방방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서도현은 흥미롭게 만드는 장면도 볼 수 있 었다. 숨겨졌던 차서준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거기서 조금 톤을 올려보면 어떨까?”
“아아. 이 정도로?”
“어. 그 톤으로 다시 한번 방금 대사를 해보자.”
“알았어.”
꽤나 능숙하다. 지금 김도윤을 보내는 연기 레슨 선생님보다 더 잘 가르친다는 걸. 서도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이루어지는 교정. 그리고 현재 부족한 게 무엇인지. 또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나아지는지. 어지간한 전문 가보다 더 전문가 같은 능력을 보여준다.
당장 순식간에 달라진 결과를 보여주는 김도윤의 연기만 보더 라도 효과는 확실했다.
‘저것이었나? 김우승의 연기력이 순간에 발전한 비밀이.’
아무리 구름엑터스의 대표인 서도현이라 할지라도. 차서준과 김우승의 연습 과정은 지켜볼 수가 없었다.
차서준이야 소속사 배우였지만. 김우승은 서도현과 연관이 없 는 드라마의 주연 배우였으니까.
그렇기에 둘이서 어떤 연습 과정을 거쳤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결과가 죽여주게 끝내줬다는 건 알았다. 당장 시작 전 우 려를 종식시킨 말도 안 되는 시청률이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조금 있다가 그렇게만 하면 돼. 카메라를 의식하지 말고 나만 바라보면 돼. 알았지?”
“응. 그럴게.”
무엇보다.
차서준이 김도윤을 아낀다는 게 느껴졌다.
*
재밌다.
내가 잠깐의 이동 시간 동안 김도윤을 가르친 소감이었다.
“방금 그 감각을 잊지 말고. 조금 있다가 카메라를 신경 쓰지 말고 나만 바라봐. 알았지?”
“응!”
샛별반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가 가르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도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말을 잘 따랐다.
차에서 내려 촬영 현장에 도착한 뒤. 나는 김도윤을 데리고 다 니며 열심히 인사를 시작했다.
배우들, 감독님들을 시작으로 스태프, 마지막으로 단역으로 출연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보조 출연자들에게까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서준이 왔구나. 옆에는 말했던 친구니?”
“네. 오늘 촬영 같이하기로 한. 샛별반 친구 김도윤이에요.”
마인드가 중요한 법이다.
특히나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인기를 얻은 이들이 변하는 모 습을 종종 보여주곤 했다. 흔히 말하는 스타병에 걸리는 셈이다.
나야 인생 2회차니 그런 걱정 따윈 없었지만. 김도윤은 지금부 터 조기 교육을 할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김도윤이 배우가 되고 인기를 얻는다면. 오늘 내가 보 여준 이 모습들을 기억하고 따라 할 터였다.
“우리 차 배우! 벌써 왔어?”
“네. 감독님. 여기 제 친구 도윤이에요.”
“안녕하세요. 김도윤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래. 오늘 가벼운 촬영이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해요. 편하게.”
이미 허허 할아버지가 다 된 김도욱 PD였다. 처음 만났을 때 숭숭 구멍이 날 것만 같던 머리도 모두 치료가 된 상태니 말 다했 지.
“자! 그러면 마지막 리허설 체크하고 시작합시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처음 긴장한 듯싶던 김도윤도.
“야. 너 아빠도 없다며. 엄마밖에 없다며.”
“뭐? 내 친구 우주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마!”
“고마워. 도와줘서.”
“친구인데 당연하지. 그리고 저런 놈들 있으면 앞으로 쫄지 말 고 당당하게 싸워.”
막상 본 촬영에 들어가자 내 리드에 따라 잘 따라왔다.
역시나 김도윤에겐 배우로서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이 보인다. 어린 나이임에도 배역에 몰입할 줄 아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몰입할 줄도 모르는 배우를 이끄는 건 어렵지만. 김우승이나, 김도윤처럼 재능 있는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이끄는 건 오히 려 더 쉬운 일이었다.
덕분에 김도윤의 단역 촬영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잠시 쉬었다 이어 갑시다!”
김도욱 PD의 외침이 나옴과 동시에. 사람들이 허연 입김을 내 뿜으며 하나둘 히터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잠시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왔더니. 저쪽 구석에 김도윤을 비 롯한 김우승이 모여 있는 게 보인다.
벌써 친해졌나?
내가 다니는 가람 유치원 샛별반 친구라는 말에. 김도윤을 옆 에 데리고 다니는 김우승이었다.
다가가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봤더니.
“우와. 그러면 서준이가 상을 타는 거예요? 곧 있을 연기 대상 시상식에서요?”
“그럼. 서준이가 우주 연기를 엄청 잘했잖아.”
“맞아요. 샛별반 친구들도 서준이의 우주를 보고 깜짝 놀랐어 요.”
“방금 보니까. 도윤이 너도 나중에 서준이처럼 좋은 배우가 되 겠는 걸?”
“와와. 고맙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곧 다가올 연말 시상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덤으로 김우승의 김도윤 기 살리기도 진행되고 있었고.
그러고 보니 그랬다.
이제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당장 다가오는 수, 목에 9, 10화 가 방송되고 나면. CBS 연말 시상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 이러다 우리 서준이가 연기상 타고 그런 거 아니야?”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데? 솔직히 우리 드라마가 대박 난 지 분의 70프로 이상이 서준이 때문 아닌가?”
“70프로? 난 80프로라고 보는데?”
이 사람들이 애를 앞에 두고 못 하는 말이 없다. 특히 김우승은 왜 저기서 김도윤을 데리고 연기상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승이 형.”
“으, 응?”
“일로 와요. 우리 다음 장면 해야죠.”
“알았어. 금방 갈게.”
김도윤에게 이상한 말을 해대고 있던 김우승을 다시 잡아왔다.
*
김도윤은 서도현의 손을 잡고 촬영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TV로만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 친구 차서준의 존재감이 차원이 달랐다.
분명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샛별반에서 같이 웃고 떠들던 친 구였는데.
지금은 마치 자신이 꿈꾸던 한 명의 배우. 아니, 김도윤이 꿈꾸 고 동경하는 TV 속 스타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도윤아.”
“삼촌 왜?”
“녀석.”
서도현이 김도윤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런 삼촌의 손길을 느 끼며 김도윤이 물었다.
촬영장에 도착한 뒤. 내내 자신이 곰곰이 고민하던 생각에 대 해서.
“삼촌.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서준이처럼 할 수 있을까?”
잠시 대답은 없다. 허나 김도윤은 왜 대답해주지 않냐며 삼촌 을 나무라지 않았다. 보고 있는 자신도 알고 있으니까.
연기 레슨 선생님도 저 정도의 연기는 보여주지 못한다는 걸. 김도윤은 잘 알았다.
“이야. 서준이는 진짜 미쳤네. 미쳤어.”
“나는 그 김순철 선생님이 촬영장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 건. 이번에 처음 봤다니까.”
“하긴. 서준이 아니었음 지금 시청률 자체가 안 나왔다니까.”
“저쪽 박윤후 팬들은 이제 포기했다더라.”
“진짜 미래의 톱스타의 첫 시작을 보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 네.”
당장 옆에서 쑥덕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친구 차 서준의 연기에 순수하게 감탄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김도윤은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문 뒤.
“삼촌. 나 더 열심히 할래.”
질투가 아닌 의욕을 불태웠다.
목표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가 이곳에 오기까지 친 절하게 자신을 가르쳐 주었다.
동화책에서 보았다.
반짝이는 별을 따라 열심히 가다 보면. 원하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제 김도윤에게 있어 차서준은 반짝이는 별이자, 이정표였다.
“그래. 열심히 해서 서준이 옆에 나란히 서렴.”
삼촌인 서도현의 말에.
“응! 근데 서준이 진짜 멋지다.”
김도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멍하니 촬영장에서 열연을 펼치는 차서준을 바라보았다.
*
7화 시청률 19.3%
8화 시청률 20.1%
9화 시청률 23.4%
10화 시청률 25.3%
말 그대로 파죽지세의 시청률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너에 게 다시]였다. CBS 내부에서도 12부작으로 시작한 걸 아까워하 고 있다는 말이 들릴 정도로.
동시간대 NBC의 [시크릿 라이프]의 8화 시청률 18.7%을 본 사 람들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 저 둘이 서로 맞부딪치지만 않았어도 둘 중 하나는 무조건 3 0프로 달성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정말이었다.
8화 마지막에 밝혀진 최우성-김우주의 부자 관계로 시작된 시 청률 폭발의 [너에게 다시]처럼.
NBC의 [시크릿 라이프] 역시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전개 로 시청률을 조금씩 끌어올리고 있었다. 내부에서도 대진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탄식이 터졌다고.
그와 별개로 우리 촬영 현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15프로 때만 하더라도 폭죽 터드렸는데. 이제는 25프로를 넘어섰으니.
샛별반 사총사 사이에서도 카메오로 출연한 김도윤에 대한 이 야기로 떠들썩했다. 최지환이 눈이 초롱초롱해져서 떠들고. 그 조용한 하지우도 눈을 반짝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이 다가왔다.
“서준아. 오늘 잘 다녀오렴.”
“네! 다녀오겠습니다.”
차서준으로서 6살 마지막 날.
나는 CBS 연기 대상 시상식에 참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