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거리에 캐롤송이 가득 울려 퍼진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크리 스마스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서준아.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엄마, 아빠와 먹고 싶은 거 있니?”
“짜장면이요!”
깜짝 선물로 준비한 차는 내일 도착할 예정이었다. 차가 있었 더라면 더 멀리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지.
“서준이는 짜장면을 정말 좋아하네?”
“탕수육이랑 같이 먹으면 진짜 맛있어요.”
정말이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새로 이사한 대단지 아파트 근처에 우리 가족이 특별한 날에만 다니던 중국집이 있었다.
덕분에 중국집을 갈 때에도 전처럼 한참을 걷거나 하지 않아 도 되었다.
“그러면 아빠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오늘은 거기서 더 맛있 는 메뉴를 시켜줄까?”
큰마음 먹은 듯 아빠가 유산슬이니, 양장피니 말했지만.
“아니요. 짜장면에 탕수육 먹을 거예요.”
내게는 정말 짜장면에 탕수육이 최고였다. 며칠 뒤 7살을 앞둔 어린 차서준의 입맛은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을 느꼈으니까.
“우리 서준이 말대로 해요. 거기 가면 서준이가 엄청 잘 먹잖 아요. 그리고 그 집이 요리도 잘해서 맛있어요.”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외식은 짜장면에 탕수육으로 결 정되었다.
차서준이 어릴 적부터 가던 중국집은 예전과 다르게 손님이 북적북적해진 상태였다. 심지어 전화 주문도 쉴 새 없이 밀려들 어 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쇼!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준이도 왔 구나.”
우리 가족이 도착하자.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던 사장님이 뛰 어나온다.
“저쪽에 앉으시죠. 사람들의 시선이 최대한 닿지 않는 자리입 니다.”
중국집 사장님이 이렇게까지 극진한 대접을 하는 이유는 간단 했다.
내가 TV에 나오는 연예인이 되어서?
그것도 절반은 맞았다.
“우리집이 서준이가 자주 방문하는 맛집이라는 소문이 나서 말입니다. 요즘 손님이 아주 문전성시입니다. 배달 주문도 끊이 질 않아요. 하하.”
워낙 귀여운 애기 시절 차서준 덕분에 얼굴을 익힌 사장님이. 주머니 사정 때문에 우리 가족이 짜장면만 시킬 때면 탕수육을 서비스로 내어주곤 했었다.
그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내가 사장님이랑 사진도 찍고 사 인도 해주었다. 사장님은 그 사진을 크게 걸었고, 그걸 본 손님들 에게 입소문이 퍼진 모양.
실제로 대박 난 이유는 사장님의 요리가 맛있기 때문이겠지만. 입소문을 타게 해준 내게 너무나도 고맙다고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은 서준이는 짜장면. 어머님은 우동, 아버님은 짬뽕. 그 리고 탕수육 맞으시죠?”
“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니. 제가 특별히 서비스도 드리겠 습니다. 식사 후 남은 건 포장도 되니 편히 드십시오.”
괜찮다고 말리는 엄마, 아빠의 말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줘 야 된다는 말을 남긴 사장님이 주방으로 사라졌다.
“자! 제가 가장 자신 있는 요리인 전가복입니다. 이건 제가 오 랫동안 봐온 서준이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고요. 여기는 어머님, 아버님을 위한 고량주!”
이런.
뜻하지 않은 곳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게 되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커 다란 빨간 양말도 샀다.
“서준아. 이걸 서준이 방에 걸어두고 자면. 오늘 밤에 산타 할 아버지가 와서 선물을 줄 거예요.”
이미 봤다. 며칠 전부터 산타 할아버지 옷과 수염을 사와 구석 에 숨겨두던 아빠의 모습을.
하지만.
“정말요? 그런데 자다가 깨서 마주치면 어떻게 해요?”
엄마, 아빠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속아 넘어가 주는 나였다.
배우로서의 재능이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내가 순진한 척 연 기를 했음에도 엄마, 아빠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그러면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해야지. 그래야 산타 할아버 지도 서준이에게 선물을 주고 기뻐하지 않겠니?”
고맙습니다하고 인사 메모.
집에 도착한 뒤. 서도현이 보내준 미니 크리스마스트리를 만 들었다. 작은 전구들도 달고 완성하고 나니 집이 환해진다.
“와. 엄청 예뻐요.”
“예쁘네. 그런데 엄마는 서준이가 더 예쁜데?”
“저도 엄마가 더 예뻐요!”
내 말에 엄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브가 지나고 크리스마스가 된 12시. 방문이 열리고 부스럭 거리며 무언가를 옮기는 소리에 내가 깼다.
그리고.
“···산타 할아버지?”
졸음이 대롱대롱한 눈 너머로 빨간 산타 복장과 하얀 수염을 붙인 아빠가 보인다.
“허허허. 네가 서준이구나?”
잠시 당황하던 아빠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너털웃음을 터트 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올 1년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서준 이가 받고 싶어 한 선물을 줄 테니. 내년에도 부모님 말을 잘 들 어야 한다. 알았지?”
“···눼.”
솔직히 아빠의 산타 할아버지 연기는···. 형편없었다. 만약 김 우승이었다면 내게 한 소리 듣고서 당장 레슨에 들어가야 했을 정도로.
하지만.
속어 넘어가야지. 저렇게 이마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산 타 웃음을 연기하는 아빠가 보이는데.
“산타 할아버지. 정말로 제가 소원을 빌었던 컴퓨터인가요?”
“허허허. 그렇단다.”
“그런데 왜 설치 안 해주고 그냥 가세요?”
예리한 질문에 아빠가 흠칫 놀란다. 지금도 들킬까 얼른 방을 나서려는데. 컴퓨터를 설치해주다간 내가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 기 때문에.
“이 선물은 내일 엄마, 아빠와 함께 설치하려무나. 그러면 이 산타 할아버지는 다음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러 가야겠구나. 허 허허.”
아빠가 뒷걸음으로 방문을 닫고 나가고. 나는 방문에 귀를 대 고 엄마, 아빠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엿들었다.
들린다.
안방으로 향하면서 엄마, 아빠가 나누는 대화가.
“오빠. 서준이의 연기 재능은 오빠 닮은 게 아닌가 봐.”
“그렇게 티 났어?”
“응. 서준이도 한눈에 아빠인 걸 알아봤을 걸? 허허허. 그게 뭐 야.”
“그래도 서준이가 깜빡 속던걸?”
“우리 서준이 배우야. 오히려 오빠가 속은 걸지도 몰라.”
토닥토닥하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안방의 문 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진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래도.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행복한 첫 크리스마스였다.
다음 날.
점심이 되었을 무렵 서도현에게 전화가 왔다.
- 서준아. 딜러가 곧 차를 가지고 도착한다고 하는데.
“정말요? 마침 엄마, 아빠도 집에 있어요.”
- 그러면 10분만 있다가 모시고 내려올래?
“네!”
도착했다.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이.
이미 아침에는 어제 아빠가 산타 할아버지로 변신해 주고 간 컴퓨터를 조립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준비한 선물을 줄 차례다. 정확히는 우리 가 족을 위한 선물.
“엄마! 아빠!”
“응?”
“왜? 서준아 무슨 일 있어?”
내가 소리치면서 거실에 나가자. 엄마, 아빠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안아준다.
“우리 밖에 나가요!”
“지금?”
“네.”
“밖에 엄청 추운데. 이따가 저녁에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던데. 저녁에 나가면 어떠니?”
“지금 나가야 돼요!”
결국 내 떼쓰기에 패딩을 입고 나왔다. 그런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서준아. 갑자기 편의점은 왜 가자는 거니?”
“가야 할 일이 있어요! 빨리 오세요!”
차가 없는 우리집이다. 그래서 지하 주차장이 아닌 상가 주차 장 쪽에 선물로 준비한 차를 대기시켜 두었다.
양옆에서 내 손을 잡고 걷던 엄마, 아빠는. 상가 주차장에 서 있는 서도현을 발견하고선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어머님, 아버님. 서준이도 메리 크리 스마스.”
“삼촌도 메리 크리스마스!”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 손에 이끌려진 엄마, 아빠의 얼굴이.
“짜잔!”
임시 번호판의 새 차 트렁크가 열리며 풍선이 등장하자 놀람 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이건 서준이가 어머님, 아버님을 위해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 물입니다.”
서도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에 숨어있었던 딜러들이 나와 폭죽을 터트렸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아빠의 눈동자가 점점 커진다.
“이, 이게···.”
“여보. 서준이가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래요.”
역시나 엄마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안정을 되찾는다. 그 러더니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서준아. 엄마, 아빠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한 거니?”
“네! 어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줬듯이. 저도 엄마, 아빠에 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엄마가 손을 뻗어 나를 와락 안는다.
“고마워 우리 아들. 엄마, 아빠가 우리 서준이를 엄청 사랑하 는 거 알지?”
나를 안은 엄마의 목소리가 촉촉하다. 천천히 작은 손을 올려 그런 엄마를 안아주었다.
“···저도 사랑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가 더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이쪽으로 오시죠. 전체적인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빠는 딜러의 손에 이끌려 새 차에 대한 설명을 듣기 시작했 다.
“여기는 제가 차서준 배우님을 위해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 입니다.”
딜러가 옆에 주차된 차의 트렁크를 열자 그 안에는 이것저것 선물들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엄마, 아빠 눈을 사로잡은 건.
“카시트?”
“서준이가 쓰기엔 조금 작아 보이는데. 애기용인 거 같은데 요?”
유아용 카시트였다.
“제가 저걸로 부탁드렸어요!”
내 외침에 잠시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특히나 눈이 동 그래진 엄마, 아빠의 표정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딜러들과 서도현이 못 보는 사이에 아빠의 옆구리를 콕 찌르 는 엄마를 못 본 체하기도 했다.
“삼촌! 사진 찍어주세요!”
“그래.”
아빠가 차에 대한 설명을 대략적으로 다 들었을 무렵. 나는 서 도현을 불러 사진 하나를 부탁했다.
여기에 올 때처럼. 내 양손을 잡고 엄마, 아빠가 차 앞에 나란 히 섰다.
그때였다.
“어? 눈이 와요!”
“그러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하늘에서 송이송이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자! 찍습니다.”
“브이!”
찰칵.
우리 가족의 첫 크리스마스 사진이 저장되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차량과 관련된 처리는 월요일에 퇴근 시간에 직원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하하.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 배우님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 인데요.”
서도현과 딜러들이 떠나고.
“서준아. 고맙다. 아빠에게 이렇게 깜짝 선물을 준비하다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아빠가 나를 안아주었다.
“드라마 촬영 다 끝나면. 우리 주말에 가족여행 가요!”
내가 손을 번쩍 들고 외치자.
“그래! 우리 서준이 촬영이 다 끝나면. 주말에 엄마, 아빠랑 이 차로 여행 가자. 알았지?”
“좋아요!”
그렇게 우리집에 새로운 씽씽이가 생기게 되었다.
*
크리스마스가 아직 지나가기 전 늦은 밤.
-서준아!!!
흥분 가득한 김도윤의 전화가 왔다.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 었던 모양.
-내일 맞지? 진짜로 나 촬영하러 가는 거 맞지?
“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잖아.”
-너무 좋아! 고마워 서준아.
[너에게 다시] 촬영이 시작되기 전.
김도윤에게 나중에 촬영장에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 었다.
마침 가람 유치원의 겨울 방학이 찾아온 참이었다. 촬영장 분 위기도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상황이니 데려가기로 했다.
내일 촬영 분량에 우주 친구로 등장할 아역 한 명이 필요하기 도 해서. 그 자리에 감독님께 내가 김도윤을 추천해주었다. 서도 현도 적당히 설득했고.
“오늘 일찍 자고. 내일 삼촌이 데리러 간다니까 늦잠 자면 안 돼.”
-알았어! 지금 당장 잘게!
마치 최지환이라도 된 것처럼 방방 뛰는 김도윤을 진정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김도경 시절에는 왜 몰랐을까.
같은 꿈을 꾸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즐거울 수도 있 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