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시크릿 라이프] 지방 로케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싸늘했다.
날이 추운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 감독 과 작가 때문이었다.
“최 작가. 저쪽에서 비겁하게 일주일이나 먼저 시작해서 그런 거라니까. 사람들 반응은 좋았잖아. 원안대로 갑시다 우리. 중반 부터 터트리려면 초반에 빌드업을 잘해야 된다니까.”
“감독님. 저 처음이에요. 시청률 두 자리 수도 못 넘어본 게. 거 기에 격차가 더 벌어졌어요. 이게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첫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스타 군단이 뭉 친 촬영장에는 훈풍이 넘쳤다.
만족스러운 오케이 컷 외침. 평소라면 미간을 찌푸렸을 애드 리브도 스무스하게 넘어갔다. 무조건 대박이 날 거라는 기대감 이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시크릿 라이프]의 1, 2화 시청률이 공개된 순간. 상황이 급변했다.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요. 감독님 나 못 믿어요?”
“믿지! 근데 수정본보다 기존이 더 좋다니까. 최 작가도 연출 인 내 감을 못 믿어서 그래?”
NBC에서 대작 드라마에 아무 연출이나 넣었을 리가 없다. 지 금까지 무려 4작품이나 성공시킨 베테랑 박철우 PD가 연출을 잡 았다.
그게 문제가 되었다. 시청률에 자존심이 상한 작가가 은연중 에 연출 문제가 아니냐는 뉘앙스를 풍겨버린 것.
작가가 강한 어조를 내뱉느라 의도치 않더라도 감독을 먼저 때렸으니. 분위기가 살벌해지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감독님 믿어요. 그런데 2화 시청률이 10.2프로에요. 이대로 가다간 CBS와 격차가 점점 벌어질지도 모른다고요.”
“그래서 지금 세팅 준비가 다 끝났는데. 방금 가져온 수정 대 본으로 가자고?”
“네. 저 최은정이에요, 감독님. 지금까지 제 선택이 틀린 적이 없었어요. 시청자들 다시 데려오려면 이거 전개 더 당겨야 돼요.”
최은정 작가의 말에 박철우 PD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경질 적인 욕설을 삼켰다.
스타 작가.
24.8%, 34.2% 29.7%.
작가 최은정이 기록한 3연타석 성적이었다.
회당 몇 천만 원의 원고료를 받은 스타 작가 최은정의 장점은.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즉각적인 대본 수정도 능숙하다는 점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나둘 스텝이 꼬이면서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 다.
“이거 너무 급발진이라니까. 이런 쪽대본으로 진행하면 배우 들도 감정 못 잡는다고.”
“지금 빠르게 뒷부분들도 다 수정하고 있어요. 오늘만이에요 감독님.”
아무리 스타 작가라 한들. 현장에서 감독을 이겨먹을 순 없었 다. 한 층 누그러진 목소리를 한 최은정이 박철우 PD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냥 조금만 더 스피디한 전개로 수정한 것뿐이에요. 박윤후 씨 있잖아요. 우리 시청률 30프로 한 번 찍어봐야죠.”
“하아. 그래요. 갑시다 가.”
결국 백기를 든 쪽은 박철우 PD였다. 갑작스러운 쪽대본을 들 고 왔다지만. 어쨌거나 최은정 PD는 글빨이 살아있는 대본 작가 였으니까.
그렇게 극적 합의가 이루어져 촬영이 시작되었지만. 그 모습 을 본 누군가에 의해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
“커엇!”
김도욱 PD가 오케이를 외침과 동시에.
“와. 서준아. 너는 무슨 똑딱이 스위치라도 달렸니?”
인설아가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게 묻는다.
방금 전까지 붉어진 눈가로 눈물을 글썽거리던 김우주가. 어 느새 차서준이 되어 생글생글하고 있었으니.
그런 시선을 보내는 건 인설아 뿐만이 아니었다. 카메라 감독 을 비롯한 스태프들까지 나를 보며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아니요! 누나랑 저랑 엄청 잘 맞나 봐요.”
“정말?”
내 대답에 예상치 못했다는 듯. 인설아가 함박웃음을 터트렸 다.
“나도 우리 서준이랑 너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통했 네?”
[너에게 다시]의 촬영 현장에는 이렇듯 훈풍이 가득했다. 일명 되는 드라마의 촬영장 분위기였다.
“자! 다음 씬에서는 눈물 흘리는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야 하니 까 반사판 신경 씁시다!”
조명 감독이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반사판 위치를 세 밀하게 조절하여 배우의 표정이 최대한 살아날 수 있도록 하려 는 것이다.
“우승 오빠는 어디 갔어?”
“대기실에서 연습하고 있어요. 자기 차례가 되면 오겠다고 했 어요.”
“그래? 최근 사람들 칭찬이 자자한데도. 그 오빠는 연습을 멈 추질 않네? 대단해.”
그럴 리가. 내가 잡아 굴린 결과였다. 김우승도 나름 아이돌 출 신인지라 연습에 이골이 났다 했지만. 딱 3일 만에 내 하드 트레 이닝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 덕분일까. 회차가 거듭될수록 발전하는 연기력을 선보이는 김우승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김우승 본인도 이제 완벽하게 극복된 트라우마에 더욱더 나를 따르기 시작했고.
그런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는 수진 누나의 시선은 더욱더 기 괴해졌다.
“서준이는 오늘 먼저 간다고 했지?”
“네. 대표님이 광고 관련해서 의논해야 할 게 있다고 해서요.”
“이야. 우리 서준이 완전히 스타가 되었네?”
“누나도 광고 많이 들어왔잖아요.”
내 말에 허가 찔렸다는 듯 인설아가 시선을 피한다.
이쪽은 장난감, 젤리 영양제 같은 것들이 들어오고 있는데. 김 우승과 인설아 쪽은 제법 괜찮은 것들이 컨텍되고 있다고 했다.
“이게 다 우리 서준이 덕분이지. 누나랑 모레 밥 먹기로 한 거 잊으면 안 돼? 알았지?”
“네!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그래. 누나가 서준이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맛있는 거 사 줄게.”
역시 인설아는 연차가 제법 쌓인 현역 아이돌답게 팬서비스가 확실했다.
*
4화가 끝났을 무렵.
지상파 3사의 맞대결 결과가 나왔다.
이전까지가 3사 수, 목 드라마 암흑기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였으니. 저조한 시작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1위. 너에게 다시. 13.6%
2위. 시크릿 라이프. 10.2%
3위. 법대로 살자. 4.7%
여전히 1위의 자리는 ‘너에게 다시’가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재밌는 점은 YBS의 [법대로 살자]의 시청률이 하락했다는 것 이었다.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좋지 못했고.
└ 이나경 작가 기대했는데. 그냥 자가 복제 느낌 나더라. 매번 정의의 사도인 변호사, 악인 상류층 검사. 주인공이 우연한 계기 로 증거를 잡아 재판에 역전. 너무 뻔함.
└ 거기에 이이란도 ‘법정구속’의 박주윤 그대로임. 마치 각자 가장 잘 되었던 걸 그대로 카피카피한 느낌임. ㅋㅋㅋㅋ
└ 솔직히 볼 거 없는 상황이면 검증된 맛이라 볼 만 했는데. 문 제는 동시간대에 NBC랑 CBS에서 미쳐 날뛰는 중. 특히 ‘너다’ 대사들이 너무 찰져. ㅋㅋㅋ
└ NBC도 최은정, 박철우, 박윤후의 조합으로 CBS에 밀리고 있는 판에. YBS는 시간이 지날수록 암담할 듯. 내 친구도 담주부 터 ‘너다’ 본다던데.
그다음은 스타 군단이 뭉친 [시크릿 라이프]와 [너에게 다시] 의 시청률 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0.3%
이 작은 숫자가 불러일으킨 나비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정확히 며칠 뒤. 재밌는 소문 하나가 방송가에 떠돌기 시작했 으니까.
“서준아.”
“네?”
“요즘 촬영장 분위기는 어때?”
갑작스럽게 서도현이 내게 촬영장 분위기가 어떤지를 묻는다.
이유야 뻔했다.
최근 [시크릿 라이프]의 촬영 현장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었으니.
6살 꼬맹이인 내 귀에까지 그 쑥덕거림에 들려왔을 정도면. 저 쪽 감독과 작가가 꽤나 크게 한바탕을 한 모양이다.
“엄청 좋아요. 오늘도 설아 누나랑 환상의 호흡을 하고 왔어 요.”
“그래?”
“네! 모레 저녁에는 단둘이 데이트도 하기로 했어요.”
“뭐? 그러다 스캔들···. 아니지. 내가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건 지. 매니저랑 잘 다녀오렴.”
“네!”
같은 드라마를 촬영 중인 여배우와 단둘이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에. 황급히 말을 꺼내던 서도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도 어린이답지 않게 행동하다 보니. 내가 6살 꼬맹이인 걸 종종 잊는 듯했다.
그와 별개로 저쪽 이야기는 꽤나 빠르게 퍼졌다.
드라마를 하다 보면 흔히 발생하는 일이었다. 우리처럼 훈풍 을 탄 상황이라면 다들 하하호호겠지만.
반대로 삐끗하게 된 ‘시크릿 라이프’ 같은 경우. 촬영장 분위 기가 점점 살벌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시청률 격차가 조금 이지만 더 벌어졌으니.
“우리 서준이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아픈 데는 하나도 없어요.”
“조금이라도 아픈 게 느껴지면 삼촌한테 말해야 돼요. 가뜩이 나 겨울이라 감기를 조심해야 돼.”
서도현에 건넨 코코아를 홀짝이며. 나는 어떤 광고를 선택해 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아빠!”
“우리 서준이! 오늘도 촬영 잘했어?”
“네! 감독님이 오늘도 잘한다고 칭찬 엄청 했어요.”
행복 가득한 우리집에선 꽤나 재밌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퇴근한 아빠를 내가 안아주면. 아빠도 촬영하느라 고생했다며 나를 안아주기 시작한 것.
부자의 그런 서로 토닥임을 본 엄마가 미소를 짓는다.
아빠에게 다가간 엄마도. 내가 했던 것처럼 오늘도 수고했다 며 아빠를 안아준다.
“왔어요? 얼른 씻으세요. 서준이가 아빠랑 저녁 먹어야 된다 면서 기다렸어요.”
“그래? 얼른 씻고 나와야겠네.”
응?
뭔가 미묘한 무언가를 발견한 내 고개가 살짝 삐뚜름해졌다.
뭔가 느낌이 달랐는데.
그런 생각은 엄마가 준비한 저녁 밥상을 보면서 한층 더 깊어 질 수밖에 없었다.
“우와. 이거 장어 아니야?”
“마침 마트에서 세일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서준이랑 당 신 주려고 사 왔어요.”
“장어다 장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민물 장어가 놓인 접시에는. 예쁘게 잘 린 아스파라거스가 데코를 이루고 있었다.
그걸 본 아빠의 젓가락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장어를 외치 고 있는 날 보더니 헛기침과 함께 상황을 넘겼다.
“오늘 특별 세일을 한다고 해서 3키로나 사 왔어요. 양은 많으 니까 서준이랑 많이 먹어요.”
“엄마도 드세요!”
“고마워 서준아. 잠깐만 기다릴래?”
엄마가 준비한 게 거기서 끝이 아닌 모양이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엄마가 가져온 것은 술이었다. 그것도 복분자주.
“보, 복분자?”
“마침 이것도 세일하지 뭐예요. 오랜만에 마시고 싶어서 샀어 요.”
평소에는 아빠만 주곤 했는데. 오늘따라 엄마가 식탁에 가지 고 돌아온 잔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요. 한잔해요.”
“그, 그럴까?”
“제가 따라드릴래요!”
“그래. 서준이가 아빠랑 엄마에게 따라줄래?”
내가 엄마에게 병을 받아. 아빠에게 한 잔, 엄마에게 한 잔씩 따라주었다.
짠.
잔을 부딪친 뒤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는 엄마, 아빠를 번 갈아 바라보았다.
수상하다 수상해.
그러고 보니 최근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긴 했었다.
“서준아.”
“네?”
“혹시 밤에 엄마, 아빠가 대화 나누는 것 때문에 시끄럽고 그 렇지 않니?”
“전혀요! 밤에 문 닫고 자면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그랬다.
전에 살던 낡은 빌라는 워낙 좁기도 했고. 또 방음이란 게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은 안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내 작은방에도 생생히 전 달되었단 말이다.
그런데 새롭게 이사한 이 집은 아니었다. 34평의 넓은 집 구조 는 안방과 내 방은 각각 끝에 위치해 거리가 제법 되었다.
한 마디로.
방음이 보장된다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속으로 경악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동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