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김시율은 심각한 고민을 앞에 두고 있었다. 어떤 치킨을 먹을 지 고르는 순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거지?”
김시율의 손에 들린 리모컨이 정신없이 NBC와 CBS를 오락가 락하고 있었다.
한쪽은 이미 제작 단계서부터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박 윤후 주연의 [시크릿 라이프].
다른 하나는 1, 2화만에 엄청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차서준 의 [너에게 다시].
“으. 모르겠다.”
결국 선택장애가 오고만 김시율은 인터넷에 접속하고 말았다.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 다들 뭘 보실지 결정하셨나요? 한참 전부터 시크릿 라이프 만 기대했는지라 보려고 했는데. 자꾸만 우리 우주가 제 발목을 잡네요. ㅠㅠ
└ 님도요? 사실 저는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엄마가 무조건 우 주 봐야 된대요.
└ 재밌는 사실 하나 말씀드릴까요? 지금 사람들이 고민하는 게 박윤후 VS 김우주 인데. 정작 김우주는 ‘너다’의 주연이 아님. ㅋㅋㅋㅋㅋㅋㅋ 주인공들의 아들이라고. ㅋㅋㅋㅋ
└ 그만큼 우리 서준이의 연기가 미쳤다는 뜻임. 솔직히 ‘너다’ 가 12부작으로 편성되어 전개도 시원시원하고 재밌음.
└ 그래도 일단 저는 ‘시크릿 라이프’를 볼래요. 솔직히 박윤후 가 영화판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드라마 찍은 거잖아요. 스크린 에서만 보던 그 포스가 너무나도 기대돼요.
확실히 분위기가 반반 갈리고 있었다. 물론 [법대로 살자]를 보려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시크릿 라이프] VS [법대로 살자]가 열렸어야 할 무대 위에. 어느새 [너에게 다시]가 치고 올라와 3자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 일단 박윤후를 보다가 결정해야지.”
결국 김시율은 시작도 전부터 대작이라 불리던 ‘시크릿 라이 프’를 선택하였다.
광고가 끝나고.
드디어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역시 박윤후네.”
핸드폰 위 손가락이 바삐 움직이며. 시작과 동시에 TV 속에서 열연을 펼치는 박윤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복귀한 드라마에서 명배우 포스를 보여주고 있는 박 윤후를 보고 있음에도. 김시율의 머릿속에서는 최우성과 김우주 의 케미가 떠나질 않았다.
“아. 안 되겠다.”
결국 ‘시크릿 라이프’는 다시 보기로 재방을 선택한 김시율을 서둘러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이는 저번 주에 1, 2화를 시청했던 많은 이들에게 벌어지고 있 는 현상이기도 했다.
채널을 바꾼 김시율은 [너에게 다시] 3화를 시청하기 시작했 다.
-부회장님.
-왜?
-오늘 오후 스케줄을 또 취소하셨던데요. 제가 모르는 부회장 님 일정이 있었습니까?”
“오, 비서가 부회장의 수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네. 매일 우주 만나랴, 전 연인이던 미란이 만나랴. 바쁘긴 했지.”
처음 등장할 때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냉혈한 기업가에, 1분도 책상을 떠나지 않는 워커홀릭이라고 했지만.
김시율이 본 최우성은 시간만 나면 김우주와 김미란을 각자 따로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개인적인 볼 일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저녁에는 돌아올 테니 기다리지 말고 퇴근하고.
-네. 알겠습니다.
최우성이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지만. 김시율의 눈엔 온통 김미란과 김우주 생각뿐인 최우성의 표정이 보였다.
-오늘 저녁에 기성 그룹 한나라 양과 신사업 관련 식사 자리가 잡혀있습니다. 이건 꼭 참석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으니 나가보도록.
단호한 그 한마디에 결국 부회장실을 나서는 박 비서.
-이상하네. 방금 보고받는 도중에도 수시로 핸드폰을 바라본 다라. 만나는 여성분이라도 생기셨나?
잠자는 시간 외에는 일에만 몰두할 정도로 워커홀릭인 부회장 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박 비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화면이 전환되고.
“나, 나온다! 우리 우주!”
드디어 등장했다. 김시율이 박윤후의 ‘시크릿 라이프’도 포기 하고 ‘너에게 다시’를 선택하게 만든 우주가.
김우주는 최근 잠에 들기 전 마음속으로 반성문을 썼다.
-거짓말을 해서 죄송해요 엄마.
아빠를 만난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비밀로 하는 김우주. 1화의 끝에 만나게 된 최우성과 김미란에 들킬 뻔했지만.
“차 안에서 끝까지 숨어 있어서. 세 사람의 만남이 불발되었지. 그때 우주 표정 연기가 진짜 미쳤었는데.”
2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스쳐지나가는 미란을 바라보는 우주 의 눈빛 연기에. 시청자들이 눈물바다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엄마에게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오겠다고 한 뒤. 김우 주는 공중전화로 달려가 최우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주야!
-아저씨!
문제는.
두 부자가 헤어지기 전 집 근처 놀이터에서 터졌다.
-우주야! 우주야!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오겠다던 아들이 사라진 걸 안 미 란이 우주를 찾기 시작한 것.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우주를 찾기 위해 사방을 헤매 는 미란.
“어? 설마? 진짜 여기서 만나나?”
김시율이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울면서 아들을 찾는 미란.
아빠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주.
잠시 후 펼쳐질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다면. 드라마 시청자로 서 자격이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아들인 우주의 이름을 외치고 다니던 미란의 눈에. 그네를 타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잡힌다.
-우주 너···.
화가 나 소리치려던 미란.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 사람의 얼굴 을 본 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저씨! 너무 재밌어···. 어, 엄마?!
그건 우주 역시 마찬가지.
방금 전까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이 의 얼굴이. 엄마를 발견한 순간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한다.
-어. 엄마···.
-너! 당장 이리 와.
미란이 한걸음에 그네로 다가가 아들을 뒤로 숨겼다. 마치 이 것만은 안 된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듯.
그 등 뒤로 끌려가는 우주의 얼굴이 슬픔에 잠긴다. 허나 어른 들은 자신들만의 사정에 빠져 아이의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우리 애한테 다시는 접근하지 마세요.
-···뭐?
-우주는 내 아들이라고! 그러니까 당신은 두 번 다시 우리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멍하니 미란과 우주를 번갈아 바라만 보는 최우성.
유일하게 곁에 남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소리치는 김미란.
그리고 꿈에 그리던 놀이터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있게 되었 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슬픈 얼굴이 된 김우주.
그 침묵의 끝에. 최우성의 떨리는 손가락이, 떨리는 목소리가 김우주를 가리켰다.
-서, 설마 저 아이가···.
[너에게 다시]의 3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마치 너 이래도 내일 4화 시작부터 안 볼 거야? 라고 묻기라도 하듯.
“미쳤어! 미쳤어!”
김시율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얼른 예고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 다. [시크릿 라이프]를 거르고 ‘너다’를 선택한 자신을 칭찬하면 서.
그러면서도 다른 한 손은 재빨리 사람들의 반응을 검색하고 있었다.
난리가 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뜨거운 떡밥 투척으 로 인하여 커뮤니티는 ‘너에게 다시’에 관한 글들로 불타오르는 상태였다.
└ 우리 우주 미쳤네!!! 마지막에 엄마에게 아빠랑 있는 거 걸 렸을 때. 우주의 표정 변화 본 사람. 와··· 저게 어떻게 연기냐고!!!
└ 저 우주 연기하는 아역의 실제 경험이 아닐까? 그거 말고는 저런 감정 표현이 말이 안 되는데. 우리 엄마 옆에서 결국 손수건 들고 말았음. ㅠㅠ
└ 아님. 주말에 식당 갔다가 차서준 만났는데. 엄마, 아빠 손잡 고 짜장면 먹으러 왔더라. 사인도 해줌. 애가 부모 사랑 받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저거 다 연기임. ㄷㄷ
└ 나 시크릿 라이프 보다가. 여기 실시간 시청자 반응 보고 ‘너 다’로 넘어왔는데. 올해 최고로 잘한 결정이었다. 빨리 내일 왔으 면.
└ 지금 실시간 검색어 1위도 ‘너다’임. 2, 3위도 전부 다. 4위에 ‘시크릿 라이프’ 하나 있긴 한데. 이거 완전 ‘너다’의 압승인 거 같은데?
└ 그러면 내일부터 우성-우주 부자 케미 터지는 거 볼 수 있음? 나 남주, 여주 케미보다 부자 케미가 미치는 드라마는 처음임. ㄷ ㄷ
사람들 반응 역시 난리가 났다. 분명 드라마 시작 전까지만 하 더라도 각자 3사 드라마의 승부 예측으로 시끌벅적했는데.
막상 드라마가 끝난 이후 승자는 ‘너에게 다시’였다.
*
3사 드라마의 첫 대결 결과가 나왔다.
- CBS '너에게 다시‘ 3화만에 시청률 12.3%를 기록하며 동시간 대 1위로 우뚝 서다!
- 스타작가, 한류스타가 뭉친 ‘시크릿 라이프’ 1화 시청률 9.2% 로 아쉬운 출발.
- ‘법대로 살자’ 동시간대 꼴찌로 시작. 시청률 6.2%로 부진한 출발을 선보여.
그 결과에 일제히 수많은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대표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그 기사들을 음미하 고 있었다.
“됐다.”
찰칵. 드라마 시작 전과 180도 달라진 사람들의 반응들을 스크 린샷 찍었다. 수요일 전만 하더라도 얼마나 난리들을 치던지.
특히나 같은 아이디 중에서 극적인 태도 변화를 보여준 사람 들도 있었다.
나중에 힘들 때 이 극과 극 반응들을 보면서 힐링해야지.
수요일의 결과는 단순히 시청률에서 1위를 했다는 데서 끝나 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량, 각종 커뮤니티에서 언급되는 정도까 지.
이 모든 것들을 따져보았을 때 ‘너다’의 압도적인 승리라는 결 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준이 벌써 왔네?”
“네. 수진 누나가 데려다줬어요. 삼촌.”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서도현이 나를 보더니 활짝 웃는 다.
처음 계약할 때 퍼주다시피 한 조건들로 인하여 내부적으로 말이 조금 나왔다고 했다.
아무것도 보여준 것 없는 내게 마치 탑급 스타와 계약할 때의 조건들을 제시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결과로 증명했다.
서도현의 눈이 틀리지 않았고. 그의 선택이 최고의 결과를 만 들어내고 있음을 말이다.
요즘 서도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고. 아까 홍보팀 누나에게 들었다.
“그리고 서준이에게 광고가 제법 들어왔는데. 삼촌은 촬영이 다 끝나고 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슬슬 때가 되긴 했다.
‘너에게 다시’가 막강한 경쟁작들을 이기는데 가장 큰 공을 세 운 배우가 누구던가.
바로 나였다.
그런 배우에게 CF가 쏟아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제 길을 나서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게 체감될 정도였으니. 그런 뜨거운 관심을 받는 배우에게 광고주들이 러 브콜을 보내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선택 안 해도 괜찮아. 삼촌 생각에는 앞으로 점점 시청률도 올라가고. 서준이에게 향하는 관심도 더 뜨거워질 것 같거든.”
시간이 지날수록 몸값이 올라간단 말이다.
서도현의 말도 맞았다.
6살의 어린 아역 배우. 배우로서 첫 작품인 ‘너에게 다시’의 촬 영 중인 상태. 마지막으로 쏟아지고 있는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 까지.
배우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광고 같은 건 뒤로 미루는 게 정답이었다. 만약 내가 일반적인 아역 배우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니요. 저 지금 하고 싶어요.”
“지금?”
나는 아니었다.
광고 몇 개를 찍는다고 하여 흔들릴 내가 아니다.
무엇보다.
주말에 엄마, 아빠와 버스를 타고 피자를 먹으러 가면서 느꼈 다.
이제 우리집에도 차가 필요하다고. 지금까지야 엄마, 아빠 손 을 잡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녀도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는 나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과장해서 몇 걸음 지나지 않아 한 사람씩 사인을 해줘야 할 정 도.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 분명 했다.
그러니 광고를 찍어서 엄마, 아빠에게 깜짝 선물로 차를 사줄 생각이었다.
“어떤 것들이 들어왔는지 보여주세요.”
서도현이 들어온 광고들이라 보여준 것들을 본 순간.
“이, 이게 뭐야?”
내 입에서 경악성이 터지고 말았다.
“쑥쑥키커 키즈젤리···, 제노사우르스 공룡 3단 합체 로봇···.”
유아복?
장난감?
키 쑥쑥 영양제?
아.
깜박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김도경이 아닌 6살 차서준 어린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