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차우진은 멍하니 아들만 바라보았다. 그건 옆에 앉아있던 아 내 미경 역시 마찬가지.
방금 전까지 눈물을 쏙 빼놓던 TV 속 아이와. 옆에 앉아서 치 킨 날개를 뜯고 있는 아들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 기지가 않았다.
“그, 그러니까. 서준아?”
오죽 당황했으면 말까지 더듬었을 정도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순식간에 1시간짜리 드라마가 끝나고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 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아들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계속했었 다. 심지어 드라마가 시작하기 직전인 방금 전에도.
“아빠! 나 감독님이 잘한다고 칭찬 엄청 많이 들었어요.”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면. 아들이 방긋방 긋 웃으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떠들곤 했었다.
저 말 역시 그저 어린 서준이가 촬영에 힘낼 수 있도록 감독이 한 칭찬인 줄 알았는데.
그 말이 진짜였다니.
방금 직접 봤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서준이가 정말 잘하네?”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자신과 달리. 어느새 정신을 차린 아내 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한다.
엄마의 손길을 받은 아들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TV에 서 사람을 홀리게 만들었던 그 미소와 같은.
“네! 감독님이 제가 보물이래요. 작가 누나도 제가 너무 잘해 서 분량 늘려준다고도 했어요.”
솔직히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아들도 연기를 좋아하 고, 상황이 절벽 끝인지라 동아줄을 잡긴 했는데. 어찌하여 구름 엑터스의 서도현 대표가 과한 호의를 베풀었는지 알 수가 없었 으니까.
그런데.
방금 '너에게 다시‘ 1화를 보고 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차우진 자신이 연예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우리 아들 같은 재능을 본다면 소속사 대표로서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 거 란 것쯤은 알았다.
“아빠! 잔이 비었어요!”
아들이 채워주는 맥주를 받으며. 차우진은 터져 나오는 웃음 을 참지 못했다.
세상 어느 부모가 기쁘지 않을까. 자기 자식이 정말 뛰어난 재 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있다. 자 고 일어났더니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차 대리. 어제 드라마 진짜 재밌게 봤어.”
“대리님! 저도 어제 봤어요. 보다가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이야. 조만간 차 대리도 TV에 나오는 거 아닌지 몰라. 그 있잖 아, 스타 가족이라 해가지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오고 그러던 데?”
회사에서도 당연히 난리가 났다.
안 그래도 돌잔치 때 봤던 아기가 드라마에 나온다는 소식에 회사 사람들 모두가 TV 앞에 앉았던 참이었다.
그 결과 모두가 드라마 속 김우주에 혼이 쏙 나가버린 것이다.
“그때 돌잔치에서 본 꼬맹이가 TV에 나와 깜짝 놀랐잖아요.”
“그러게. 우리 집사람도 드라마를 보면서 쟤가 그 서준이가 맞 냐고 몇 번이나 묻더라니까.”
“저는 친구한테 자랑도 했어요. 김우주가 돌잔치 할 때 사진도 같이 찍었다고요.”
호들갑은 직원들뿐만이 아니었다.
“차 대리! 차 대리 자리에 있나?”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사장이 차우진을 보기 위해 찾 아왔다. 어제 드라마를 정말 재밌게 봤다는 말과 함께.
“김 부장. 앞으로 수, 목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차 대리 일찍 보내. 아들이 나오는데 당연히 집에서 같이 봐야지.”
사장의 체면이 있다면서 선물도 같이 들고 왔다. 앞으로 드라 마가 방영되는 수, 목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찍 퇴근시키라는 선물을 말이다.
사장이 축하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나고. 업무를 시작하기 위 해 자리에 앉자, 옆자리 직원이 재빨리 몸을 기울인다.
“차 대리님. 이제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어제 1화 끝나 고 사람들 반응을 보니까. 서준이가 앞으로 CF도 엄청 찍겠던데 요?”
“그거랑 내가 돈 걱정을 안 하는 게 무슨 상관이야.”
“아역 배우는 보통 부모가 돈 관리하잖아요. 저번에 보니까 어 떤 집 아들이 아역 배우를 한 덕분에 아파트 샀다는 기사도 나왔 던데.”
그랬다.
보통 대부분의 아역 배우들의 금전 문제는 부모들이 담당했다. 특히나 아직 6살에 불과한 서준이는 더욱더 수입 관리를 부모가 해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니. 서준이가 번 돈은 모두 서준이가 관리하기로 했어.”
“서준이는 이제 겨우 6살인데요?”
“그래서 회사에서 자산관리사에게 운용을 맡기기로 했어. 구 름엑터스의 대표가 더 신경 쓰기로 했고. 나와 집사람은 확인만 할 거야.”
차우진과 김미경은 서준이가 번 돈에 일체 손을 대지 않기로 이미 결심을 내렸다.
이는 서준이가 처음 구름엑터스와 계약을 맺을 때부터 결정된 사항이었다. 서도현 대표가 자신과 미경을 설득하기 위해 불렀 을 때부터 논의된 이야기.
“돈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잖아.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랑 나 는 그냥 서준이 뒤에서 서포트만 해주려고.”
“와. 역시 차 대리님. 존경스럽습니다!”
옆자리 직원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차우진은. 이내 업무 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고 하여 변할 생각은 없었다.
*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촬영장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다.
될까?
이거 정말 먹힐까?
예상보단 잘하긴 하는데. 그래도 힘들지 않겠어?
이런 긴가민가한 감정들이 스태프들에게서. 또 배우들에게서 느껴졌을 뿐.
그런데.
첫 방송이 나가고. 2화까지 방영된 지금 촬영장의 분위기는 아 예 딴판이 되었다.
- ‘너에게 다시’ 김우주에게 자꾸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는 최우성. 2화 시청률 8.4프로 돌파.
- 모두가 기대하지 않았던 ‘너에게 다시’의 반전 흥행. 긴장하 는 ‘시크릿 라이프’, ‘법대로 살자’.
- 2화만에 시청률이 껑충!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너에게 다시’ 의 성공 비결은?
- 1화 시청률 3.6%, 2화 시청률 8.4%. 본격적인 경쟁작들과의 시청률 전쟁이 시작되는 ‘너에게 다시’의 3화 시청률은?
└ 대박이네. ㅋㅋㅋ CBS에서 버린 편성이 아니냐는 말을 듣던 ‘너다’가 최강 다크호스가 되어버렸네?
└ 지금 박윤후 팬들 장난 아님. 어떻게든 깎아 내릴라고 난장 피우고 있는데. ‘너다’ 팬들에게 죄다 진압당하는 중. ㅋㅋㅋㅋ ㅋㅋㅋ
└ 솔직히 ‘시크릿 라이프’랑 ‘법대로 살자’가 시작된다 하더라 도. 나는 계속해서 ‘너다’의 우리 우주 볼 듯.
└ 너도? 우리집도 동생이 시크릿 라이프 봐야 된다고 난리 치 는데. 엄마 선에서 정리되어 방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 조기 종영하고 일주일 빨리 시작한 CBS의 선택이 신의 한 수가 되었네요. ㄷㄷ 제 주변에서도 3화가 방영될 수요일만 기다 리고 있어요.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고. 또 안쓰러운 시선만 받았던 [너에게 다시]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선 시청률 다크호스로 부상한 것이 다.
변한 것은 시청자들의 반응만이 아니었다.
2화까지 방영된 지금. 첫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 촬영장에 은은 하게 맴돌던 염려, 걱정, 우려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장 눈앞의 촬영 현장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자! 조명 위치 조금만 조정하고. 마이크도 소리가 먹히니까 더 내립시다. 준비되면 다시 한번만 더 가봅시다!”
분명 평소라면 오케이를 외쳤어도 이상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러나 김도욱 PD의 입에서는 다시! 라는 외침이 끝없이 이어지 고 있었다.
평소라면 감독의 끊임없는 요구에 배우의 얼굴에 짜증이 서려 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가보자는 김도욱 PD의 외침에 누구 하나 인상 찡그 리는 배우가 없었다. 오히려 빨리 촬영에 들어가자는 열기만 가 득할 뿐.
흔히 말하는 대박 나고 있는 드라마의 촬영장 분위기였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인 뒤. 김우승과 인설아의 촬영이 이 어졌다.
“커엇!”
김도욱 PD의 만족스러운 외침이 울려 퍼지고 나서야 촬영이 끝났다.
“우리 차 배우. 왜 집에 안 가고 있었어?”
원하는 영상을 뽑고 나서야 일어나던 김도욱 PD가 뒤에서 있 던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김도욱 PD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어느새 ‘서준아’에서 ‘우리 차 배우’까지 격상된 상태였다.
“우승이 형이랑 같이 가기로 해서요. 내일 촬영 장면 연습하기 로 했어요.”
“역시! 우리 차 배우가 아주 프로 정신이 투철하다니까.”
내 말에 칭찬을 아끼지 않던 김도욱 PD가 흠칫 놀란다.
“아니. 우리 서준이 귀가 저렇게 빨개질 때까지 다들 뭐한 거 야! 이동용 난로 일로 가지고 와!”
“괜찮아요. 이제 갈 거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 나. 배우는 몸이 생명이야 생명. 특히 지금 같은 추위에선 난로 앞을 떠나지 말아야 돼요.”
잠시 빨개진 내 귀를 본 김도욱 PD가 재빨리 주머니에서 핫팩 을 꺼내 감싼다. 역시 감독답게 핫팩을 하나가 아닌 두 개나 가지 고 있었다.
감독이 현장에서 배우 하나를 챙겨주다 못해 편애하는 상황. 하지만 여길 바라보는 배우들 중 그 누구도 불만을 보이지 않았 다.
아, 있기는 했다. 오늘 1회성 출연을 하게 된 보조 출연자들 중 에서 웅성거림이 있긴 했었다. 금방 다른 이들에 의해 진압되었 지만.
“아니. 무슨 감독부터 스태프들까지 아역 배우 하나 가지고 다 들 너무 쩔쩔매는 거 아니야?”
“쉿. 입 조심해. 너 앞으로 여기 알바하기 싫어?”
보조출연자들 중 하나가 나에 대한 불만을 꺼내자. 옆에 있던 친구로 보이는 이가 화들짝 놀라며 쉿 하라고 입을 막는다.
“왜? 솔직히 엑스트라 알바 뛰면서. 저 정도로 아역 챙기는 현 장은 여기가 처음인 거 같긴 한데.”
“너 이거 2화 시청률이 얼마나 나왔는지 아까 못 들었어?”
“들었지. 2화 시청률이 8.4프로가 나왔다면서?”
“말 그대로 기적이 터진 거라니까. 1화 시청률이 3.6프로였는 데. 그중 절반이 안티였었거든. 근데 단 2화만에 그 안티들을 팬 으로 만들고 시청률까지 확 끌어올렸다니까.”
“그게 다 저 꼬맹이 덕분이다?”
“그래 인마. 오죽하면 감독님이 현장에서 업고 다니려는 거 주 변에서 말리기까지 했단다. 거기다가 애가 엄청 착해요. 우리 같 은 보조출연자들한테까지 다 인사한다니까.”
그제야 납득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 김우승의 촬영 분량이 모두 끝났기에. 나는 김우승과 함 께 이동하며 내일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준아. 오늘 형이랑 저녁 먹을까? 형이 서준이가 좋아할 만 한 맛있는 집을 찾아놨는데.”
김도욱 PD가 나를 업고 다니려고 한다면. 실제로 나를 업고 다 니는 사람이 바로 눈앞의 김우승이었다.
과거 촬영장에서 생긴 일로 인한 카메라 트라우마를 극복한 김우승은. 어느새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 었다.
물론 김우승 본인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나라고 한들 극복시킬 순 없었을 터였다.
허나, 김우승은 오롯이 모든 것이 내 덕분이라며. 마치 은인이 라도 대하듯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뇨. 형, 지금 우리가 맛집을 찾아다닐 때가 아니에요.”
“응?”
어림도 없다.
내가 보기엔 회차가 진행될수록 김우승이 더 좋은 연기력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아직 부족해요. 형은 더 노오력을 해야 돼요.”
“노, 노오력?”
끄덕.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우승은 트라우마를 극복한 자신의 연기력에 만족한 듯싶지 만. 내가 보기엔 아직 김우승이 보여줄 수 있는 고점은 더 위에 있었다.
그렇다면 굴려야지.
“오늘 촬영이 감정 씬이 많아서 힘든 건 알아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내일을 위해 노오력을 해야 해요. 저랑 같이.”
“그, 그래. 서준이 너도 노력하려는데 내가 너무 어린 생각을 했다.”
운전대를 잡은 수진 누나의 황당한 표정이 백미러 너머로 보 였지만 무시했다.
한창 잘나가는 드라마의 주연이 6살 꼬맹이에게 훈육을 듣고 있는 상황이라니.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코웃음이나 들을 내용이 긴 했으니까.
“안 그래도 지금 박윤후 쪽에서 난리도 아니라더라.”
“정말요?”
“당연하지. 폭삭 망해버릴 줄 알았던 우리 드라마가 시청률 8 프로가 돌파했고. 또 다음 주에는 무조건 10프로가 넘어가지 않 겠냐는 상황인데. 발등에 불 떨어졌지.”
안 그래도 서도현에게 듣긴 했다. 돈을 쏟아붓다 못해 들이부 은 NBC와 YBS도 비상이 걸렸다고.
“응? 이게 뭐야?”
핸드폰을 보던 김우승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말이 튀어나 왔다.
“뭔데요?”
“NBC에서 급하긴 급했나 본데? 여기 서준이 너랑 저쪽 아역 배우를 비교하는 기사가 떴네. 박윤후네 소속사 아역이던데.”
오랜만이었다.
나를 대상으로 한 자극성 비교 기사는.
김도경 당시 아역 시절. 한창 나랑 연기력으로 줄 세워 재미를 보려던 소속사들이 있긴 했었다.
어떻게 했냐고?
연기력으로 눌러주었지. 다시는 그렇게 찍소리도 못하게.
오랜만에 다시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형. 일로 와요. 당장 지금부터 연습 시작해요 우리.”
“응?”
덕분에 김우승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대본을 내려놓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