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김시율은 맥주 하나를 들고 거실 소파로 향했다. 원래 이 시간 이면 항상 드라마를 기다리던 그녀였으나. 최근에는 볼 게 없어 도 너무 없었다.
오죽하면 얼마나 못 만들었나 싶어, 오늘 첫 방송인 [너에게 다 시]를 보려고 마음까지 먹은 상황이었을까.
“CBS도 웃기네. 얼마나 자신이 없었으면 일주일이나 먼저 들 어가.”
지금이 일명 ‘빈집’이라 불리는 시기긴 했다. 지상파 3사의 드 라마가 모두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은 상황.
심지어 우연의 우연들이 겹쳐 3사의 스타트가 같아지게 되었 다.
그런 상황 속에서 CBS에서 일주일 조기 종영이라는 과감한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 매도 먼저 맞으려고 한다며 비웃고 있었다.
현재 ‘너에게 다시’. 줄여서 ‘너다’가 까이는 건 일종의 밈이 된 지 오래였다.
“까더라도 보고 까야지.”
이미 각종 커뮤니티에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많았다.
└ 오늘 첫방인 ‘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네요?
└ 이 사람들의 대부분이 얼마나 웃길지 보려는 사람들일걸요? 저도 김우승의 발연기가 얼마나 웃길지 대기하는 중임. 스트레 스 풀어야지. ㅋㅋㅋ
└ 너무 뻔한 전개가 될 것 같던데. 무슨 오해로 헤어졌던 연인 이 몇 년이 흘러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라. 그냥 흔한 로코 아니에 요?
└ 우리 이안이 있었으면 달랐을지도 몰라요. 대충 줄거리를 보니까 김우주가 엄청 중요한 거 같던데. 아쉽네요.
└ 어? 시작하네요. 다들 보면서 좀 시원하게 웃자구요. ㅋㅋㅋ ㅋㅋ
광고가 끝나고.
[너에게 다시]의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어? 생각보다 김우승 연기 괜찮네?”
아무래도 박윤후의 팬들은 김우승과 박윤후의 연기력을 비교 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다음 주에 시작하는 [시크릿 라이프]의 주연이 박윤후였으니까.
이번 주에는 재미 삼아 안주거리로 ‘너다’를 보고. 다음 주부 터 첫방인 시크릿 라이프를 본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김시율이 보기엔 지금 [너에게 다시]에서 보여주는 김우승의 연기가 꽤나 괜찮았다.
김우승의 연기에 그렇게 느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방 금 전까지 대차게 까던 이들의 반응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 김우승 잘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 ㄴㄴ 저번 발연기의 충격이 너무나도 커서 그렇지. 그냥 무 난한 주연급 연기를 보여주는 듯요.
└ 무난한 주연급이면. 그게 잘하는 거 아님? 시작 전에 여기서 다들 로봇 연기다, 발연기다 김우승 엄청 깠잖아.
└ 복도에서 최우성, 김우주 처음 만난 장면 좋았던 거 같은데. ‘너다’ 연출이랑 스토리가 생각보다 좋은데요?
└ 그러게요. 발연기에 막장 스토리일 줄 알았는데. 연기들도 탄탄하고 재밌네요.
괜찮네.
이런 의외란 반응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그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공중전화 부스 앞에 섰다. 작은 손안에는 심부름으로 엄마에게 받은 용돈 100원짜리 동전 3개. 그리고 병원에서 만났 던 아빠가 적어준 번호가 적힌 종이가 쥐여 있다.
아이는 한동안 우두커니 부스 안의 전화기만 바라보았다. 그 뒤를 수많은 행인들이 스쳐지나간다.
꾸욱. 결심이 섰는지 아이의 손이 종이를 꽈악 잡았다. 그러고 는 부스 안에 들어가 작은 손을 뻗어 누르는 번호.
뚜르르.
-예. 최우성입니다.
-···.
듣고 싶었던 목소리임에도. 막상 듣고 나니 목이 메어 말이 쉬 이 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용건 없으면 끊습니다.
분명 복도에서 마주했던 따스했던 온기는 온데간데없다. 당장 이라도 가슴을 쿡쿡 찌를 만큼 냉랭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 려올 뿐.
아이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저씨?
혹여나 모른다고 하면 어쩌지?
아이의 눈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붉어진다.
그냥 걸지 말 걸 그랬다. 그저 TV에 나오는 아빠를 보며 상상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었는데.
아이가 후회 가득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우주구나. 안 그래도 아저씨가 우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 딘지 말하면 아저씨가 당장 달려갈게.
방금 전까지 차갑던 목소리에 어느새 온기가 가득하다. 그 온 기에 끊으려던 전화기를 재빨리 다시 들었다.
아이는 재빨리 눈가를 훔쳤다. 스윽 닦인 얼굴에는 어느새 방 긋 웃음꽃이 폈다.
-아저씨! 여기가···.
자신이 있는 곳을 말한 아이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기다린 다.
그 작은 얼굴에는 수많은 고민이 스쳐지나간다. 놀이터에 놀 러 간다고 했는데 엄마에겐 뭐라고 하지? 아빠를 만나면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쪼그려 앉은 아이의 작은 몸이···. 흔들리는 아이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뭐, 뭐야?’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형적인 로코 전개에 헛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던 김시율은. 어느새 자신이 멍하니 화면만 바라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언제였더라. TV 속 드라마를 보다가 이렇게 눈시울이 붉어졌 던 적이.
그녀가 좋아하는 한류스타 박윤후의 연기를 보면서 감탄한 적 은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화면에 감정을 몰입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 뭐죠? 솔직히 아까까지는 솔직히 뻔한 내용이었는데. 방금 장면 하나로 몰입감이 장난 아니네요. 진짜 숨도 못 쉬고 봤어요.
└ 저도 그냥 멍하니 봤어요. 아빠를 만난 우주가 아저씨! 하고 방긋 웃는 걸 보고서야 정신 차렸어요. ㄷㄷ
└ 오랜만이네요. 진짜 드라마 보다가 울컥하게 되는 건. 어떻 게 대사 하나 없이 표정과 몸짓만으로 저런 표현을 하는 걸까요.
└ ㅠㅠ 우성이는 왜 우주를 알아보지 못하니. 이름부터가 우 성, 우주인데. 자기도 모르는 끌림을 느끼면서. 나중에 우주가 자 기 아들인 걸 뒤늦게 알면 우성이도 펑펑 울듯요. ㅠㅠ
└ 미쳤다. 우리 이안이 때문에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 는데. 그냥 방금 우주 보면서 그냥 감탄만 했네요.
김시율 혼자만 그리 느낀 게 아니었나 보다. 이미 시청하고 있 던 이들의 반응이 뜨겁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분명 드라마 시작 전에. 그리고 또 시작한 이후에도 신랄한 비 난을 펼치던 이들조차 입을 다문 것이다.
얼마나 드라마에 몰입을 해버렸는지. 빠르게 올라오던 사람들 의 반응들도 그 순간만큼은 끊겨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는 서서히 1화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우주를 집에다 데려다주기 위해 차 뒷문을 열어주려다, 무언 가를 보고 덜컥 굳어버리는 최우성.
흔들리는 그 시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걸어오는 여자를 향한 다.
-미, 미란아.
-···우성 오빠?
최우성의 부름에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툭 떨어뜨리고 마는 김미란.
그 안에서 김우주가 좋아하는 김밥 햄이 굴러 나온다.
서로가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입을 떼려는 순간.
1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OST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뭔데?! 이렇게 만나면서 끝낸다고?
└ 내일 바로 아빠가 최우성인 거 알려주면 안 되나? 부자간의 이야기 보여 달라고!!!! 우성, 우주 부자 케미 미쳤다고!!!
└ 작가야! 이 작가 전작은 어떻게 했었나요? 막 내용을 빙빙 돌리거나 그러진 않죠?
└ 이게 첫작이라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아까는 비웃음과 욕설 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새 다들 ‘너다’에 빠져버렸네요.
└ 저는 벌써 내일만 기다리고 있어요. 마지막에 차 안에서 우 주가 엄마, 아빠를 바라보는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네요.
어느새 다음 화를 내놓으라는 아우성들이다.
김시율도 그곳에 빨리 2화를 내놓으라는 말을 적은 뒤. 재빨리 검색창에 차서준이라는 이름을 입력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눈물샘을 자극하던 아역 배우의 사진이 나온다.
하지만.
정작 김시율의 시선이 멈춘 곳은 사진이 아니었다.
“···6살이라고? 진짜?”
고작 6살이란다. 방금 자신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 들었던 연기를 선보인 배우의 나이가.
“말도 안 돼.”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 김시율뿐만이 아니었다.
*
엄마, 아빠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너에게 다시] 첫 방송을 보 기 위해 오순도순 앉은 것이다.
“서준아. 사과 깎아줄까?”
“괜찮아요. 우리 치킨 언제 와요?”
“이제 올 시간이 됐는데.”
내심 말을 안 했지만. 촬영 기간 내내 엄마, 아빠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엄마 없이도 잘 다니는 걸 확인한 엄마가 서도현에게 내 케어 를 일임했다. 전문가에게 케어를 맡긴 것이다.
엄마바라기인 내가 엄마 때문에 촬영장에서 몰입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 한 선택이었다. 내가 서도현에게 부탁을 하기도 했 고.
김우승을 트라우마에서 극복시키는 것이 최우선인지라 엄마 와 함께 다닐 수가 없었다. 엄마 앞에서 김우승을 가르치는 모습 을 보여줄 순 없었으니까.
“서준아. 나쁜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신경 쓰면 안 돼요. 알았지?”
“네. 하나도 신경 안 써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날 보며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 했다.
당장 인터넷에 ‘너에게 다시’만 검색해 봐도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롱이 밈이 되어버린 반응들. 거기에 부상으로 하차한 최이 안 대신 들어온 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들도 보았을 터였다.
그러니 저렇게 걱정이 된 얼굴을 하고 계신 거겠지. 괜찮다. 어 차피 오늘 첫 방송을 보고 나면 저 걱정은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
“아빠.”
“응? 서준아. 무슨 할 말 있니?”
아빠도 오늘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내가 드라마에 출연했 다는 소식을 들은 회사에서 야근까지 모두 빼주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고.
“아빠. 다리 떨면 복이 나간대요.”
“으, 응?”
“당신이 다리를 떨면 어떡해요. 지금 서준이가 나오는 드라마 가 곧 시작하는데. 복이 나간다잖아요.”
“서준아. 아빠가 미안해. 우리 서준이가 TV에 나온다고 하니 아빠가 긴장이 되어서.”
“괜찮아요. 저 촬영장에서 엄청 잘해가지고 감독님도 엄청 많 이 칭찬했어요.”
정작 드라마에 출연한 나는 태연한데. 엄마, 아빠는 긴장한 기 색을 감추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연기를 하고 싶다고 선언한 아들이었다. 다음 날 구름엑터스과 계약을 하더니.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너에게 다시] 의 김우주 역을 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정신을 차려보니. 뚝딱뚝딱 순식간에 아역 배우가 되어 TV에 나오게 된 상황이었으니.
“이상하다. 50분까지 꼭 도착한다고 했는데.”
이대로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에 치킨이 도착하지 못하면 어쩌 나. 이런 걱정이나 하고 있었는데.
띵동.
다행히 제시간에 치킨이 도착했다.
벨소리가 울리고. 나는 재빨리 뛰어나가 치킨을 받았다.
“한 잔 받으세요.”
“그래. 우리 서준이도 촬영하느라 고생 많았어.”
아빠와 엄마의 잔에 시원한 맥주를 따라주었다. 내 잔에는 오 렌지 주스를 담았고.
짠. 세 잔이 부딪치고. 내 손에는 엄마가 호일로 감싸준 치킨 다리가 들렸다.
첫 닭다리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차서준으로 눈을 뜬 나의 첫 번째 드라마 [너에게 다시]가.
꽤나 재밌었다.
드라마도 물론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엄마, 아빠의 표정이.
잠시 후.
드라마가 끝나고 OST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얼음이 되어버린 엄마, 아빠는 멍하니 TV만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