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CBS [너에게 다시] 대본 리딩 현장.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주조연들이야 도착 전이지만. 대 중교통을 이용하는 비중 적은 단역들은 일찍 도착한 지 오래였 다.
그렇게 먼저 도착한 이들은 대기하는 동안 쑥덕쑥덕 방아를 찧기 바빴다. 수다를 제외하곤 아직 휑한 이곳을 채울 것이 없었 으니까.
어차피 대본을 깊게 볼 필요도 없었다. 오늘 그들이 내뱉을 대 사는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런 두 사람이 나눌 주제는 하나였다. 바로 그들이 참여한 드 라마 [너에게 다시]에 관한 것.
“우리 이거 괜찮아요?”
“왜? 무슨 일 있어?”
갑작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듣는 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비중 있는 배우들이야. 소속사를 통해 진행 상황을 들었겠지 만. 이 자리에 일찍 도착한 두 사람에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렇잖아요. 당장 경쟁작들이 너무 빵빵해서. 이거 압 사당하지만 않아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에이. 뭐야. 난 또 무슨 일이 터진 줄 알고 놀랐잖아.”
안도의 숨을 내쉰 뒤. 세팅을 위해 의자를 바삐 나르는 스태프 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저기 스태프들 표정도 어둡잖아.”
두 단역은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눈동자가 어느 한 곳에 뚝 멈춘다.
“어? 뭐야.”
“왜 또?”
또다시 호들갑을 떠는 그 모습에 한마디 하려던 이는. 같은 곳 에서 시선이 멈췄다.
“저기 감독님 바로 옆자리 아니에요? 근데 왜 김순철 선생님 이 아니라 차서준이라는 이름표가 있어요?”
“그러게. 저기는 무조건 김순철 선생님 자리 아닌가?”
“이거 조금 있다가 선생님 오시면 난리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 네요.”
“에이. 선생님이 그러실까. 촬영장에서야 호랑이로 유명하지 만 오늘은 그냥 리딩이니 괜찮지 않을까?”
두 사람도 부상으로 하차하게 된 최이안 대신 들어온 아역 배 우에 대한 기사는 봤었다.
“근데 쟤가 구름엑터스 소속이라면서요? 아역으로는 구름엑 터스와 계약한 최초라던데.”
“나도 듣고 놀랐잖아.”
“왜요?”
“거기 대표가 아역은 절대 안 받는다는 소문이 있어. 심지어 그 최이안조차 문을 두들겼다가 까였다는 소문까지 있었거든.”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슬슬 시간이 되면서 하 나둘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반가워요. 이번에 또 같이하게 되었네.”
인사하는 오뚝이마냥 둘은 오뚝오뚝 연신 고개를 숙이기 바빴 다.
오늘 김도욱 연출이 한두 줄 대사 있는 단역들까지 부르지 않 았더라면. 오늘 이 자리에 있을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열심히 얼굴도장을 찍어둬야지.
그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 주제였던 소문의 아역 배우가 등장한 것은.
“안녕하세요. 이번에 김우주 역을 맡게 된 차서준이라고 합니 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아역들 중에서도 제법. 아니, 대놓고 잘생 겼다는 생각이 드는 차서준이 인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정작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차서준과 함께 등장 한 남자 때문이었다.
“어? 저 사람 구름엑터스 서도현 대표 아니에요?”
“맞네. 와, 서도현 대표가 직접 대본 리딩 현장까지 따라온다 니. 혹시 우리 작품 대박 나는 거···.”
“에이. 그런 말하면 부정 타요.”
“흠흠. 근데 최근에 저렇게 서도현 대표가 리딩 현장까지 따라 다닌 배우가 있었나?”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서도현의 등장은 이 자리에 있던 모 든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차서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누가 듣는다면 인사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모 두 한 사람이 한 인사였다.
차서준은 먼저 자리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던 단역 한 명 한 명 까지 찾아다니며 모두 인사를 했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뒤에도. 누군가가 도착하면 쪼르르 달려 나가 인사를 한다.
“이야. 인성은 합격인데요?”
“그러게. 보통 자기 자리에 앉아서 대본에 얼굴을 파묻는 경우 가 대부분인데.”
정작 두 사람이 놀란 건. 우려했었던 김순철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어지간한 경력 배우들조차 말을 걸기 힘들다는 그 김순철 선 생님이었는데.
“완전 옆집 할아버지처럼 대하네요.”
“그러게. 귀여워서 그런가? 나 선생님이랑 짧지만 몇 번 촬영 을 같이 했었는데. 저런 모습은 처음 본다.”
대본을 들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웃 음꽃까지 활짝 피었다.
그 모습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던 이들조차 깜짝 놀 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몰랐다.
정작 놀람을 넘어서 경악을 느끼게 될 일이 남아있다는 것을.
시간은 지나 주연들이 도착하고. 김도욱 연출과 박우영 작가 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본격적인 대본 리딩의 시작이었다.
*
“서준아.”
“네?”
사실 오늘 대본 리딩에는 매니저인 김수진이 따라갈 줄 알았 다. 지금 운전대를 잡고 주차하고 있는 서도현 말고.
“오늘 처음으로 촬영을 같이할 배우들을 만나는 자리니까. 인 사를 잘해야 돼.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거든.”
“네. 한 분 한 분, 모두 다 인사할게요.”
“그래. 내리자.”
서도현을 따라 대본 리딩이 진행될 장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안에 있는 모두 배우 및 스태프들에게 한 명 한 명 인사를 한 뒤. 이어 들어오는 사람들 역시 인사를 잊지 않았다.
마지막 주연들이 들어오기 전. 배우들에게 선생님이라 불리는 김순철이 도착했다.
김순철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수많은 배우들이 앞다투어 인 사를 한다.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서 대표도 오랜만이야. 옆에 그 아이가 소문의 친구인가?”
“예. 이번에 저희 회사 신인 배우 차서준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차서준입니다.”
내가 꾸벅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순철의 얼굴에는 표 정 변화가 없다. 그 얼굴이 제법 냉랭했다.
항상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김순철 때문에. 많은 배 우들이 다가가기 어려워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김도경 시절에도 저런 선생님 한 분 계셨다. 마치 도플갱어라 도 되는 것 마냥 이번 세상에도 저런 분이 계시다니.
일단 시선부터 가져와야지.
은근슬쩍 메고 온 가방을 열어 꼬깃꼬깃해진 대본을 꺼냈다.
“호오.”
그와 동시에 대본 상태를 확인한 김순철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지금이다.
“선생님.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가는데. 한 번 가르쳐주실 수 있어요?”
해맑은 표정. 배우들조차 자신을 어려워했는데. 전혀 개의치 않은 당찬 말 걸기까지.
무엇보다 다른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닌. 오직 연기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이 플러스 점수가 된 모양.
“보자. 이거 대본 상태를 보니 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로구나?”
“네! 다 외웠어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순철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6 살 아역 배우가 벌써 자신의 대사를 다 외웠다는 사실에 놀란 것 이다.
벌써부터 놀라기엔 아직 이른데.
“상대방 대사도?”
“네! 그리고 주고받을 대사를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것도 전부 외웠어요.”
“호오. 그러면 정말인지 아닌지 확인해볼까?”
“좋아요!”
됐다.
한평생을 연기만을 위해 살아온 이들에게는 다른 주제 따윈 필요 없었다.
지금처럼 오직 연기에 관한 대화 주제를 꺼냈을 때에 가장 기 뻐하는 법.
김순철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날 보며 놀란 시선들 이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나와 대사 몇 마디를 주고받던 김순철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이다.
김순철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도현을 불렀다.
“서 대표. 이 아이 이번 작품이 처음이라 하지 않았나?”
“예. 이번이 서준이의 첫 작품입니다.”
“허허. 따로 오랫동안 연기를 배웠거나 그런 적도 없고?”
역시 예리하다. 김순철은 한눈에 내 연기를 알아보았다. 레슨 을 통해 만들어진 연기가 아닌. 순수 재능을 통해 선보인 연기라 는 것을.
“네. 배운 적 없어요.”
“솔직히 김 감독이 한 번만 도와 달라고 애타게 부탁해서 수락 한 건데. 이거 재밌는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르겠구만.”
역시 짬밥은 무시할 수 없다.
김순철은 대본을 받음과 동시에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너에게 다시]가 사람들에게 반전을 주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김우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김우주 역에 내가 등장했으니. 두 거대 경쟁작들 사이에 서 반전을 일으킬 수 있는 카드가 될 거란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잠시 후.
주연인 김우승과 인설아가 도착하며 배우들 모두가 착석하고. 뒤이어 연출을 맡은 김도욱 PD와 박우영 작가가 모습을 드러냈 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허허. 내 김 감독이 왜 그렇게 애타게 부탁하나 했더니. 이런 깜짝 선물을 준비해서 그랬구만.”
“벌써 보셨구나. 어떠셨어요?”
“이번 촬영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김순철과 의미심장한 대화를 주고받은 김도욱 PD는.
“우리 배우님. 컨디션은 좀 어때요? 아무래도 첫 대본 리딩일 텐데. 하다가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요. 알았 지?”
나를 향해 마치 샛별반 선생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에 질세라 박우영 작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서준아. 누나는 안 보고 싶었어?”
“작가님보다 다음화 대본이 더 보고 싶었어요. 너무 재밌어서 요.”
“뭐? 정말?”
내 말에 방긋 웃는 박우영 작가였다.
두 사람은 배우들과 한 차례 인사를 나눈 뒤에서야 자리에 앉 았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너에게 다시]의 본격적인 대본 리딩이.
김도욱 PD와 박우영 작가의 ‘너에게 다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진행되었다.
카메라가 대본을 보며 대사를 치는 배우들을 잡는다. 과거 남 주와 여주의 만남과 이별 씬부터 시작했기에 아직 내 대사는 없 었다.
다만.
“어떻게 네가 그럴 수가 있어!”
“오, 오빠는 날 못 믿는 거야?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있어. 하지 만 오빠만은 내 편이 되어준다며.”
김우승과 인설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재밌다.
인설아야 저번 작품에서 자신의 연기력을 증명했기에 다들 별 다른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허나 김우승은 달랐다.
컨디션 난조로 넘기긴 했지만. 저번 카메오로 출연했을 때 좋 지 못한 연기력을 선보였던 전적이 있었다.
‘뭐야. 김우승 괜찮은데?’
‘그러게. 얼굴만 보고 캐스팅된 줄 알았는데. 저 정도면 무난하 게 하는데?’
리딩 분량이 거의 없는 단역들이 김우승에 대해 귓속말을 주 고받는 모습이 보인다.
다만 저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게···. 그게 나를 속인 거라고.”
바로 대본을 보면서 대사를 내뱉는 김우승의 이마에 서서히 땀이 맺히고 있다는 것.
온도 조절을 했기에 저렇게 땀을 흘릴 이유가 없다. 그 말은 아 직까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뜻.
그리고 저 폭탄은 본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야 터질 거라는 점 이다.
재밌네.
그런 김우승을 살펴보는 사이.
어느새 내 순서가 다가왔다.
보여줘야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그리고 이 장면을 보게 될 사람들에게.
“엄마는 모른다. 내가 하늘에 있다는 아빠를 TV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또 밤마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운다는 것도 안다 는 것을.”
김우주의 첫 등장 독백을 보여준 순간.
‘와. 미쳤네. 저게 6살의 표현력이라고?’
‘감독과 작가가 등장하자마자 아낀 이유가 있었네.’
‘방금 대본에 시선도 안 주고 대사 친 거 맞지?’
느껴진다.
놀람을 넘어서 경악에 빠진 사람들의 반응이.
그런 사람들의 반응 속에는 옆자리에 앉은 김순철 선생님 역 시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 제대로 한 번 보여주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