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어른들의 세계에선 바쁘게 드라마 제작 준비가 진행되고 있 었지만. 반대로 내 유치원 생활은 평소와 똑같이 평화로웠다.
아,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바로 구름엑터스 대표 서도현의 조카이자, 샛별반 사총사의 일원인 김도윤이 그 주인공이었다.
“야, 차서준.”
“왜?”
이미 [너에게 다시]에 최이안 대신 내가 들어간다고 기사까 지 나간 참이다.
서도현의 외조카인 김도윤이 그 소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나 배우가 장래 꿈인 김도윤이니 더욱더.
기사가 나간 이후. 나를 바라보는 김도윤의 시선이 변했다. 어떤 시선이냐면···. 마치 뭔가를 꾹꾹 참고 있는 듯한 눈빛이랄 까.
“너 오늘도 삼촌네 회사에 가?”
“어. 조금 있다가 갈 거야.”
“어제도 갔었지? 방송국에도 갔었고?”
걱정이 되긴 했다. 이제는 샛별반에서 사총사라고 불릴 만큼 가깝게 붙어 다니는 친구 가운데. 자신의 꿈에 먼저 성큼 다가 간 내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발표회 연극을 준비하면서 꿈이 배우라고 당당히 선 언했는데. 사총사 중 한 명인 내가 먼저 아역 배우가 되어버리 고 말았다.
“우씨.”
김도윤의 뾰로통한 시선이 내 얼굴을 훑는다. 그 시선을 느 끼며 나는 말없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름 6살 어린이 생활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 에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린이들의 생각은 여 전히 알기 쉽지 않았다.
“너어!”
혹여나 떼를 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말 부러워.”
괜한 우려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김도윤이란 아이는 훨씬 미래가 기대 되는 친구였다.
시기, 질투가 아닌 승부욕을 불태운다.
“나도 언젠가 너처럼 꼭 배우가 되고 말 거야. TV에 나올 거 라고.”
“음. 아직 안 나왔는데.”
“어쨌든! 인터넷에 검색하면 벌써 얼굴도 나오잖아.”
좋다. 김도윤의 태도를 본 내 소감이었다.
김도윤이 나를 바라보는 경쟁심리에는 ‘언젠가 짓밟고 말겠 어.’가 아닌. ‘언젠간 꼭 반드시 나란히 설 거야.’라는 향상심이 느껴졌으니까.
“삼촌이 그랬어. 나보다 뛰어난 상대가 있다면. 질투하지 말 고 죽을 듯이 노력해서 언젠가 뛰어넘으라고.”
서도현의 조기교육이 빛을 발했다. 6살임에도 불구하고, 자 신보다 훨씬 앞서나가는 친구를 질투하기보단. 언젠가 뛰어넘 고 말겠다며 의지를 활활 불태운다.
그러면 저 불길에 기름통도 좀 뿌려줘야지. 기름 말고 기름 통.
“도윤이 넌 내가 봤을 때 연기에 재능이 있던데? 나보다 잘 할지도 몰라.”
“뭐?”
내 말에 기쁜 표정이 된 김도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오늘도 유치원 끝나고 레슨 가지 않아?”
“···오늘은 안 돼. 할아버지네 가야 해서.”
“그러면 내가 대신 도와줄게. 저번 시간에 배운 것들을 말이 야.”
“정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도윤의 얼굴이 다시 한번 기쁨으로 물든다.
“나중에 촬영장 갈 때. 삼촌한테 잘 말해서 나도 데려가 줘. 삼촌은 자주 안 데려가준다고”
“알았어. 도현 삼촌에게 말해서 같이 가자.”
“좋아!”
그래도 다행이다. 김도윤 덕분에 서도현을 알게 되었고. 그 덕에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런 도움을 준 김도윤에게 내가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 있 다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나를 바라보던 김도윤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차 싶은 표정 으로 황급히 말을 꺼냈다.
“맞다. 엄마가 다음 주에 한번 사총사 친구들 데리고 오래.”
“나도? 진짜?”
“···우와.”
근처에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최지 환이 재빨리 달려왔고.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하지우의 표정 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응. 지환이랑 지우 모두 다 같이. 다음 주 화요일에 유치원 끝나고 어때?”
“집에 말해볼게! 엄청 기대된다!”
“···난 좋아.”
순식간에 뜻이 맞은 (구)삼총사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혹여 나 내 입에서 ‘그날은 안 돼.’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가득한 표 정으로.
저런 얼굴을 보고 어떻게 안 된다고 하겠냐고.
“알겠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뛸 듯이 기뻐하는 삼총사였다.
그나저나.
이제 정말 본격적인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너에게 다시]의 박우영 작가도 만나고 왔다.
조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데. 지금은 괜찮아졌는지 걱정 이 된다.
별일 없겠지?
*
박우영은 스타 작가인 김현경의 사단에 있었던 보조 작가였 었다.
모두 과거형인 이유는. 현재 박우영은 김현경의 아래에서 독 립하여 입봉작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최근 [너에게 다시]가 편성이 확정된 이후. 그녀에겐 한 가지 나쁜 버릇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바로 손톱 물어뜯기.
그런 박우영의 행동에 정신 사나웠는지. 멘탈 케어를 위해 찾아온 친구가 타박했다.
“그만 물어. 그러다가 손가락까지 없어지겠다.”
친구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박우영은 손가락을 놓질 못했다.
“사람들 반응은 어때?”
“읽어줘?”
“아니. 안 봐도 알 거 같아.”
박우영의 입봉작 [너에게 다시]는 보조 작가로 생활하면서 정말 오랫동안 공을 들인 작품이었다.
김도욱 PD가 캐스팅 디렉터와 발로 열심히 뛰어다닌 덕분에 조연 라인업은 제법 괜찮았다. 연기파로 인정받는 배우들이 이 름을 올렸다.
다만, 사람들이 불만을 가진 건 그런 명품 조연들이 아니었 다. 드라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연. 남주, 여주에 관한 것들이 었지.
└ 무슨 일임? 원래 편성 예정된 건 다른 거 아니었음? 연출 이랑 작가가 다 다른데? 처음 보는 이름들인데.
└ 원래 다른 거였는데. 내부 사정으로 엎어져서 긴급 대타 로 들어간 듯.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님. 다른 곳에서 폭 탄 터졌음.
└ 김우승이랑 인설아가 내가 아는 그 두 사람 맞아? ㅋㅋㅋ ㅋㅋㅋㅋㅋ
└ 맞아요. 안 그래도 저것 때문에 공개될 때부터 사람들 반 응이 어처구니없다는 헛웃음만 나오고 있었어요. 심지어 김우 승 팬들도 어리둥절한 상황이에요.
└ 김우승 저번에 카메오로 나와서 까매요 보여준 거 아님? ㅋㅋㅋ 무슨 발연기를 보여주더니 갑작스럽게 주연으로 발탁 되네? 얼굴만 믿고 가는 건가?
가장 중요하다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약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당장 경쟁사가 작정을 하고 대작 을 준비하는데. 시청률이 폭망할지도 모르는 작품에 뛰어들 주 연급 배우는 드물었으니까.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이돌 출신과 현역 아이돌을 주연으로 채택하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긴 했 다.
긍정적인 반응이 아닌 부정적인 쪽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잠깐 커뮤니티 반응을 보다 다시 불안감에 휩싸인 박우영을 보면서. 친구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너 김우승 좋아하지 않았어?”
“좋아했었지. 유니온의 리더 김우승은 정말 지옥 같은 새끼 작가 시절의 유일한 휴식처였었으니까.”
“다 과거형이네. 근데 내가 너랑 예전에 유니온 밀착 예능을 봤었을 땐. 김우승이 아이돌 출신답지 않게 연기 잘하던데.”
아이돌 그룹 ‘유니온’의 리더였던 김우승과, 마찬가지로 아이 돌 그룹으로 활동 중인 연기돌 인설아가 각각 남주와 여주로 낙첨되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뒤.
예상보다 더 반응은 좋지 못했다. 가뜩이나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아이돌 출신들인데. 김우승은 저번 카메오로 첫 연 기 도전을 했다가 대차게 말아먹은 전적까지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감독님이랑 직접 김우승의 연기 력을 확인까지 해서 오케이를 했었는데.”
“했었는데?”
“저번 카메오로 나왔던 걸 확인해보니까 말이 안 나오더라.”
박우영의 말에 친구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건 아무리 팬심으로 봐주려고 해도 못 봐줄 정도였 지.”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는지. 친구가 조급한 어조로 다른 배우에 대해 물었다.
“차서준은? 김우주가 가장 중요하잖아. 가뜩이나 이번에 최 이안이 다쳐서 차서준인가? 그 신인 아역이 대타로 왔잖아. 걔 는 좀 어때?”
어떠냐고?
잠시 차서준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린 박우영은. 그제야 입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놓아줄 수 있었다.
“나는 최이안만 생각하며 김우주를 썼거든? 다른 어린 배우 들은 절대로 소화 못 한다고 생각해서.”
“알지. 너 애초에 너에게 다시를 준비할 때부터 최이안만 떠 올리면서 썼잖아. 최이안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노래를 부르 더니.”
분명 그랬다. 아역 배우들 중에서 오직 연기력을 입증한 최 이안만이 김우주를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며칠 전 차서준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주야.”
“응?”
“나 영감 떠올랐어. 미안.”
“그래. 얼른 가서 써.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심신의 안정을 되찾은 박우영은 재빨리 작업실로 달려갔다.
*
잠시 서도현이 자리를 비운 대표실에서. 나는 홀로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주연을 맡게 된 김우승이 떠올랐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김우승이라.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김우승은 감독이나, 작가 픽이 아니었다. 가장 큰 투자를 결 정한 투자사에서 선택한 픽이지.
국내에서야 경쟁작들로 인하여 예상 시청률이 저조하다 하 더라도. 해외 판권을 통해 회수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지금은 해체했지만 유니온이 해외 팬들이 제법 많다고 했으 니.”
올해 초 해체한 유니온 리더 김우승의 첫 주연 드라마. 이건 해외 판권으로 제법 먹힐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김도욱 PD가 투자만 생각하고 김우승을 떠맡았을 리는 없다.
김우승은 배우로서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트라우마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을 뿐.
김도욱 PD와 작가가 직접 만나 체크했을 때만 하더라도 김 우승은 제법 흡족한 연기력을 선보였을 것이다.
“폭탄은 버튼을 눌러야 터지는 법이지.”
배우 김우승에게 촬영 현장 트라우마라는 폭탄 버튼은. 본격 적인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야 터질 것이 분명했다.
그 폭탄은 [너에게 다시]와 함께 장렬하게 터질 예정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합류하지 않았더라면 말이지.
“서준아. 왜 아직 안 갔어?”
“대본 보고 있었어요.”
외부 스케줄을 마친 서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나를 보더 니 놀란다. 지금쯤이면 집에 갔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마침 잘 되었다며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서준아. 이번에 우리와 함께 작품 들어가기로 한 아이돌 출 신 배우 김우승이라고 알지?”
“네. 우주 아빠잖아요.”
“그래. 아무래도 이번 작품에서 김우주의 아빠 역이기도 해 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하기 전에 서준이 네가 호흡을 맞춰 봤으면 좋겠는데. 서준이 생각은 어때?”
“전 좋아요.”
아무리 내가 미친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들. 아직 정식으로 촬영장 카메라 앞에 선 적이 없는 신인이었다.
그런 나를 배려해서 서도현이 미리 연락을 해둔 듯싶다.
안 그래도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하기 전에. 김우승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김우승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한 번 김우승을 직접 본 적 이 있었다. 지금 사람들이 난리가 나게 된 원인인 카메오로 출 연했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마침 김우승 측에서도 연락이 왔거든. 대본 리딩 이후 서준 이 너와 스케줄을 조정해서 같이 맞춰보고 싶다고.”
“좋아요!”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호흡을 맞춰 야 할 아역 배우에게 연락하는 건 간단했다.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서일 터였다. 저번에 촬영 현장에서 겪은 최악의 악몽은. 김우승에게 있어 최악의 트라우 마가 되었을 테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투자해 극복해보려는 자세는 합격 이었다. 배우 본인의 노력 없이는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없을 테니.
내 예상이 맞다면.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충분히 극복시킬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면 삼촌이 시간을 조율해서 알려줄게. 최대한 서준이 네가 움직이기 편한 시간으로 잡아서.”
“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너에게 다시] 대본 리딩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