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다음 날.
평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늦은 시간 아빠가 퇴근했음 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우리 세 식구가 모 인 곳은 구름엑터스의 대표실이었다.
“아빠!”
집이 아니라고 해서 퇴근 후 ‘안아주기’를 빼먹을 순 없지.
아빠가 잠시 나를 안아준 뒤. 서도현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앉 았다. 직원이 뒤따라와 마실 것을 나누어준다.
“안녕하십니까, 서준이 아버님. 저는 구름엑터스 대표 서도현 입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서준이 아빠 차우진입니다.”
어젯밤 서도현과 아빠의 통화 이후 급하게 마련된 자리였다.
아빠 역시 서도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유치원 발표회 이 후 김도윤의 가족과 저녁을 먹은 일을 엄마에게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다음에도 서도현이 엄마에게 연락 후 나를 데려갈 때마다 아빠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엄마, 아빠의 철칙이 었다. 그렇기에 하루하루 있었던 일들로 대화의 꽃을 피우다가 서도현에 대해 들은 것이다.
“서준이 어머님, 아버님. 오늘 늦은 시간임에도 이곳까지 와주 셔서 감사합니다.”
서도현은 엄마, 아빠를 이곳까지 부르게 된 본론부터 꺼냈다.
“어제 전화로 간단하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구름엑터스에 서는 서준이를 배우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배우요? 우리 서준이를 말입니까?”
서도현의 말에 아빠가 경계심을 담은 눈빛을 보였다. 당장 전 세 사기로 길거리에 나앉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상태였다.
세상에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접근하는 놈들은 모두 사기꾼으 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아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않았다. 이곳 구름 엑터스의 대표실까지 오면서 봤기 때문이다.
구름엑터스에 소속된 배우들이 누가 있는지에 대해서. 하나 같이 TV를 틀거나, 영화관을 가면 볼 수 있는 유명 배우들이었다.
그렇기에 아빠는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6살 어 린이에게 왜 이런 회사가 계약을 하자 제안을 하는지 말이다.
대체 우리 아들에게 무엇을 보고서?
“구름엑터스에서는. 정확히 서도현 대표님께서는 저희 서준 이에게 무엇을 보고 그런 제안을 하신 겁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허나 이미 예상하고 있던 범위 안이었는지. 경계심을 담은 질 문임에도 대답하는 서도현의 답변에는 막힘이 없었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서준이가 보여준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말입니다.”
“···가능성이요?”
“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본 서준이의 재능은 그 간 봐왔던 수많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이었습니다.”
서도현의 말에 아빠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엄마 역시 놀란 표 정을 짓는다.
엄마는 이미 유치원 발표회 연극에서 홀로 반짝반짝 빛나는 아들을 본 적이 있었다. 서도현의 말처럼 주변 부모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반응도 보았고.
하지만 엄마는 또래보다 좀 더 잘한다고 생각만 했었지. 배우 매니지먼트를 운영하는 대표의 입에서 저 정도까지의 극찬이 나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저희 서준이에게 그 정도의 연기 재능이 있다는 말씀이신가 요?”
엄마의 그 물음에.
“네. 확실하다고 장담드릴 수 있습니다.”
서도현이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안 에 담긴 확신을 들을 수 있게.
“일단 이것부터 보시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합니 다.”
굳이 방향이 정해졌는데 굽이굽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서도 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약서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저희 구름엑터스에서 준비한 계약 조건들입니다.”
서도현이 건넨 계약서를 엄마, 아빠가 각자 받아서 읽기 시작 했다.
일반인들은 계약서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서도현은 내 요청에 따라 구름엑터스가 어떤 지원을 할지에 대해 따로 요 약을 해두었다. 계약서 맨 뒤편에.
“최대한 서준이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회사에서는 최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입니다.”
서도현의 그 말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갑이니, 을이니 하는 단어들의 나열은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 기 쉽지 않다.
다만, 맨 뒤편에 서도현이 따로 정리를 해둔 것들을 본 엄마, 아빠의 얼굴에 놀라움을 넘어선 표정이 떠올랐을 뿐.
“저, 정말 이렇게나 지원해주신단 말씀이신가요?”
“네. 지금이 아닌 미래를 보고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대, 대체 왜?”
아빠의 눈이 한 곳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바로 숙소를 제공한 다는 부분에서.
현재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급박한 것이 저 집이었 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곧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얼굴로 계약서에 적힌 글자들을 바라볼 뿐.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아빠는 나를 바라보았다. 서도현이 아닌 나를 말이다.
“서준아. 서준이는 연기하는 게 재밌어?”
좋다. 이런 엄마, 아빠이니 내가 ‘행복한 가족 만들기’를 하려 고 하는 것이고.
파격적인 지원 중 집이 어떤 것이냐고 서도현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닌. 자신의 아들이 정말로 연기에 흥미가 있는지부터 확 인한다.
당장 수습하지 못한다면 거리에 내앉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 서도. 아빠는 내 의사가 최우선임을 보여준 것이다.
서도현 역시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눈빛을 빛냈다.
“네! 정말 재밌어요. 그래서 도현 삼촌이 배우를 해볼래? 하고 말했을 때 정말 기뻤어요.”
“그래? 아빠는 우리 서준이가 연기를 좋아하는지 몰랐네.”
잠시 내 머리를 쓰다듬은 아빠가 서도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 다.
“음. 서준이를 잠시 내보내고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눌 수 있겠 습니까?”
“그러시죠. 서준아. 잠시 밖에 나가서 있을래?”
“네. 밖에서 누나들이랑 있을게요.”
여기서 말한 누나들이란 구름엑터스 직원들이었다. 차서준의 외모가 빛을 발했는지 직원들이 아주 나를 귀여워했다.
그 뒤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른다. 굳게 닫힌 문은 안 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가렸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엄마, 아빠가 서도현의 오랜 설득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
이제 더 이상 엄마, 아빠가 당장 나앉을 걱정에 눈물을 뽑지 않 아도 된다는 것.
이거면 충분했다.
*
김도욱 PD는 머리를 쥐어 잡고 있었다.
“인마. 너 그러다가 머리 다 빠진다. 있을 때 소중한 걸 알아야 되는 거야.”
정말이었다.
손을 내려 펼쳐보니 그 안에는 수십 가닥의 시체들이 가지런 히 놓여있었다.
“어우. 약 줄까?”
“됐어요. 이게 약으로 해결되겠어요? 그보다 위에서는 뭐래 요?”
“뭐라긴. 아직까지는 별말 없지.”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내부적으로 [너에게 다시]가 삐끗 거린다는 소문이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내는 사람이 없다 는 건.
그 안도의 한숨을 본 선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 트렸다.
“그리고 누가 그 자리를 탐내겠냐. 거의 명예로운 죽음이 확정 인데. 솔직히 도욱이 네가 그렇게 불타오르지만 않았어도 내가 도시락 싸 들고 따라다니면서 말렸다. 으휴.”
속이 터진다는 듯 선배가 가슴을 쳤지만. 김도욱 PD는 신경 쓰 지 않았다.
중요한 건 누구도 편성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확실히 윗선에선 드라마의 핵심 역할인 ‘김우주’ 역의 아역배우 가 다친 건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당장 CBS 드라마국에서 난리가 난 건. 경쟁사에서 준비하고 있는 대작들이었다.
촬영도 전부터 대작이란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간단했다. 중 간에 내던지지 않는 이상 성공이 보장된 작품들이니까.
그 경쟁작들을 떠올리다 머리로 향하던 손을 바라본 김도욱 P D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놈들 다 미친 거 아니야? 무슨 한류스타에, 스타작가에 아 주 작정을 하고 이를 갈고 있어. 이번만 드라마 찍고 방송 접는 데?”
특히 NBC에선 회당 몇억의 몸값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다는 소 문까지 떠돌고 있었다. 소문이 아니라 도장 찍기 직전의 사실이 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바람 위, 아니. 태풍 속 촛불 같은 CBS 편성 자리에 욕심을 내는 연출이 있을 리가 없었다. 커리어를 내던질 생각이 아니라면.
“도욱아. 근데 진짜 가능하겠냐? 저긴 한류스타인데 여기는· ··.”
삐걱거리고 있는 내부 사정과 달리. [너에게 다시]는 시작도 전에 광고가 제법 붙은 상태였다.
문제는.
그 광고가 붙기 위한 전제조건이 너무 하이리스크였다. 심지 어 하이리턴이 보이지 않는.
“김우승이라니. 맙소사. 화제야 제법 되겠지만, 저번 카메오로 나온 상태를 봤을 때에는 맙소사 그 자체던데.”
“시작하기도 전에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는 거예요?”
“그건 아니고.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 하게 하냐.”
“지금 하는 말들이 더 섭섭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첫 연출을 맡을 수 있게 김도욱 PD를 전적으 로 지원해준 사람이었다. 그의 지원사격이 없었더라면 시작도 전에 침몰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도움을 주었기에 저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막말을 내 뱉는 거긴 하지만.
“그래! 어차피 하나 말아먹는다고 사표 던질 것도 아니고. 좋 은 경험 쌓는다고 생각하고 힘내라.”
“그냥 가요. 나 이러다 형 한 대 때릴지도 모르니까.”
인내심 끝에 주먹을 들자 선배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다.
홀로 남은 김도욱 PD는 다시 머리를 부여잡고 장렬한 시체들 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어쩌지.”
이대로라면 시청률 두 자리 수는커녕, 1에 가까운 처참한 숫자 를 볼지도 몰랐다.
“미치겠네. 방법이 안 보이는데.”
선배 앞에선 강한 척은 했지만. 지금 누구보다 속이 타들어가 는 사람이 바로 김도욱 PD 본인이었다.
그때였다.
김도욱 PD의 핸드폰이 거칠게 진동한 것은.
[구름엑터스 서도현 대표]
액정 위에 뜬 이름을 본 김도욱 PD가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 무언가를 들은 김도욱 PD의 얼굴에 먹구름이 걷 혔다.
*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전에 내가 서도현에게 요청 한대로 회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변호사를 선임해주는 일이었 다.
“고맙습니다 삼촌. 이제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돼요?”
내 말에 서도현이 무슨 소리냐는 듯 펄쩍 뛴다.
“대표님은 무슨. 계속해서 삼촌이라고 불러. 그보다 서준이는 하고 싶은 배역이 있니?”
서도현은 연기 레슨을 하자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이미 김도 윤을 따라갔을 때 증명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오직 연기력 하나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나를 가르 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을 리가 없다. 있다면 사기꾼이고.
“삼촌은 회사와 계약할 때 말했다시피. 서준이가 하고 싶은 연 기를 시켜주고 싶은데.”
서도현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고 싶은 배역이라.
사실 성인이 된 이후에야 연기를 시작할 생각이기에 딱히 생 각해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아역 배우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이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음. 저번에 삼촌이 보여준 그거요. 그거 정말 재밌게 봤어요.”
“정말?”
정말로.
[너에게 다시]였었나.
대체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작품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주연보다 ‘김우주’ 역에 작품의 흥행여부가 달렸다.
어지간한 아역 배우를 썼다간 곧바로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놉시스가 서도현의 손 에 들어갔고. 또 그를 통해 내가 보게 되었으니까.
“그러면 김우주를 한번 해볼래?”
“네. 좋아요.”
차서준으로 눈을 뜬 뒤.
내 첫 드라마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