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퇴원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사고 당시에도 머리를 제외한 몸 에는 큰 부상이 없던 터라. 익숙한 환경 속에서 기억이 빠르게 돌 아올 수 있도록 통원 치료가 결정된 것이다.
“서준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여기가?
잠시 말을 잃었다.
제법 세월이 느껴지는 빌라 외관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끼긴 했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은 그런 내 예상보다 조금 더 좋지 않았다.
모두 합쳐 15평이 조금 넘어 보이는 집으로 들어가면서 엄마 에게 물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그래. 들어갈까? 혹시 기억나는 거 있니?”
“아니요.”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엄마에게 말해야 해. 알 았지?”
끄덕. 엄마(아직 어색하지만, 이 몸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 엄 마라고 부르기로 했다.)를 따라 들어가니 힘듦이 느껴지는 풍경 이 눈에 들어온다.
연식이 되어 보이는 가전제품들. 2인용 식탁이 놓인 주방과 작 은 바닥 소파가 있는 거실. 안방, 그리고 내 방으로 보이는 작은 애들 방이 전부였다.
내가 이리저리 바라보자, 엄마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고서 묻는다.
“서준아. 뭐 기억나는 건 없어?”
“···네. 저기가 제 방이에요?”
확실히 방은 작았다. 6살 아이가 좋아할 로봇 장난감들과, 왜 좋아하는지 모를 곤충 장난감들이 몇 개 없음에도 방이 꽉 찼다.
“엄마는 오랜만에 집에 와서 집 정리를 좀 해야 하니. 우리 서 준이는 방에서 잠시 쉬고 있을래?”
“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내 말이 그렇게 충격이었는지. 한시도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사레가 들려 재채기만 하더라도, 화들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엄마였다.
김도경의 악마 같던 가족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며칠 밤을 더 잤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몸이라.”
만약 내 가족이란 인간들이 차서준의 가족들과 같았으면 어땠 을까. 하는 아쉬움에 꾸고 있는 꿈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내 그 생각은 지워졌다.
벌써 차서준 어린이의 몸으로 깨어난 지, 며칠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김도경이 아닌, 차서준이 되었다는 걸 받아들 여야 한다는 뜻인데.
나는 작은 방 어린이 책상에 있는 공책 중 하나를 꺼냈다. 그러 고는 연필을 들어 제법 깔끔한 글씨체로 무언가를 적었다.
새벽 병실에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잠든 얼굴들을 마주한 순간 결심한 것.
“행복한 가족.”
신이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그렇다면 차서준 어린이로 눈을 뜬 내가 이번 생에 이루고 싶 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김도경 시절 가지지 못했던 ‘행복한 가족’을 만드는 것이 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은 형편이 나아질 필요가 있겠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려움이 절로 느껴지는 환경부터 조금 바 꿀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 하더라도. 가난이 지속되면 행복이 도망간다고 하지 않던가.
부자나 재벌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다.
‘돈’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던 나였으니까.
그저 조금 더 행복한 가정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금전적인 쪼 들림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전에 프로젝트를 시작해야겠어.”
금전적인 부분이야 차차 시간을 두고 진행해야 하는 일이지만. 당장 6살 어린이의 몸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행복한 가족 만들기’ 프로젝트.
그 첫걸음을 시작하기 위해 나는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옮기 며 거실과 부엌이 하나인 곳으로 나갔다.
도도도.
엄마가 도마를 두들기는 소리가 나를 반긴다.
“서준아. 왜 나왔어?”
“이제 곧 아빠가 올 시간이잖아요.”
갑작스럽게 방에서 나온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아빠가 올 시 간이 되어 나왔다는 내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던가.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짧은 내 다리가 현관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문이 열리고 피곤 에 찌든 가장의 얼굴이 나타난다.
가장의 무게를 느끼고 왔을 아빠를 향해 내가 방긋 웃음을 지 었다.
“서, 서준아?”
문 앞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지. 깜 짝 놀란 표정을 짓는 아빠를 향해 내가 두 팔을 번쩍 벌렸다.
“아빠!”
“우리 서준이! 아빠 기다렸어요?”
“네!”
그 미소에 아빠 역시 먹구름을 걷어내며 나를 안는다. 짧은 팔 을 뻗어 아빠의 목을 안았다.
이미 병실에서 깨어났을 때. 소식을 들은 아빠가 한걸음에 달 려왔던 터라 어색하지는 않다.
다만, 어린아이로서 해맑고 순수한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는 일이 아직까지 쉽지 않을 뿐.
아마 전생의 탑급 배우였던 이 김도경이 아니었더라면. 쭈뼛 쭈뼛 다가가, 오셨어요? 하는 애늙은이 같은 소리나 내뱉었겠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넘기며 턱수염으로 까끌까끌한 아빠의 얼굴에 볼을 비볐다.
작전명 ‘행복한 가족 만들기’의 첫걸음.
‘돈’이라는 무서운 놈이 주변을 괴물로 만들기 전에. 그런 물 욕에 휘둘리지 않도록 지금부터 단단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어떻게?
지금처럼 퇴근 후 가족이 반기는 행복, 출근 때 다녀오세요! 하 며 배꼽 인사로 배웅하는 기쁨. 이런 사소하고도 힘이 나는 것들 로 말이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 도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아빠의 얼굴에. 어느새 웃음꽃이 활짝 폈다.
“서준이 아빠, 왔어요? 찌개가 거의 다 되었으니까 씻고 와요.”
“그럴까. 금방 씻고 나올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장실로 사라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 면서.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일일 아빠 미션을 클리어했으니. 엄마 미션에 도전해야지.
“숟가락이랑 젓가락은 내가 놓을래요.”
“어머. 우리 서준이가 할 수 있어?”
“네! 엄마 도울 거예요.”
당연히 수저를 내가 직접 꺼낼 수 있을 리는 없다. 이 짧은 팔 과 다리로는 수저통이 있는 곳까지 닿지 않았다.
어떻게든 꺼내 보려 손을 뻗어보는 내가 귀여웠는지. 엄마가 웃음을 터트리며 수저 3개씩을 꺼내 내 손에 쥐여 준다. 하나는 어린이용 수저 세트였다.
“자. 여기 엄마가 꺼내 줄 테니까. 우리 서준이가 식탁 위에 올 려줄래요?”
끄덕. 수저를 받은 내가 부지런히 의자 위에 올라가, 2인용 식 탁 위에 수저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 모습을 보는 엄마의 입가에 다시 웃음꽃이 핀다.
기억을 잃은 어린 아들 때문에 걱정이 많았을 텐데. 이렇게 씩 씩한 모습을 보여주면 절로 힘이 나는 법이다.
“세상에. 오늘은 고기 파티네?”
“어때요? 당신도 좋아하고. 서준이도 좋아하는 고기들로 저녁 을 준비했어요.”
젓가락을 든 아빠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큼지막한 고기를 들어 내 밥 위에 올려주는 일이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엄마는 아빠 밥 위에 고기를. 나도 짧은 팔 을 낑낑거리며 뻗어 엄마에게 고기를 주었다.
“어머. 서준이가 엄마에게 고기를 준 거야?”
“네! 이렇게 하면 엄마, 아빠도 다 같이 먹잖아요!”
내 당찬 대답에 웃음꽃이 터진다.
저녁 식사는 오순도순했다.
이런 평범하고도 따스한 식사가 얼마 만이더라.
어린아이를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은 채. 활짝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
문제는.
저녁 식사가 끝나고 과일을 먹으면서 작은 TV를 보는 도중에 터졌다.
[오늘 대성 자동차에서 새롭게 바뀐 신차를 발표했습니다. 이 는 지난···.]
어?
TV를 보던 내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저게 무슨 소리야?
국내 자동차 회사 이름이 왜 대성이야, 현성은 어디 가고.
그런 내 당황과 별개로. 아빠는 심각한 얼굴로 심각하지 않은 내용을 말했다.
“차가 새로 나오면서 또 가격이 올랐네. 이러다가는 우리 목표 로 했던 차를 사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겠는데?”
“천천히 모아 봐요. 우리 서준이가 씩씩해서 버스도 잘 타던걸 요.”
김도경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오순도순 대화가 들린다.
돈 때문에 악다구니를 쓰는 대화가 아닌. 작은 목표를 향해 힘 을 내보자는 따뜻한 대화가.
하지만 나는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두 눈에 현성이 아 닌 대성이라는 글자만 보였으니까.
저게 대체 왜 현성이 아니고 대성이야.
“아빠. 현성 자동차도 있어요?”
나는 다급함을 숨긴 채, 아빠에게 정말 궁금하단 얼굴로 물었 다.
다행히 만병통치약인 ‘기억상실증’은 이런 상황에서도 도움 이 되었다.
기억을 잃었기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으니까.
“응? 우리 서준이도 차에 관심이 생겼어? 그런데 현성 자동차 는 아빠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걸?”
전생이 배우였다는 사실이 지금만큼 다행이란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당황스러움을 태연스러운 얼굴로 숨길 수 있었으니.
시작도 전에 어그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첫 단계부터 성공적으로 시작된 ‘행복한 가족 만들기’ 프로젝 트의 다음 순서가 말이다.
큰돈을 벌 수 있게 정보를 주어 부자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다. 그저 이 작은 빌라보다는 20평대의 아파트로 이사 갈 수 있을 정 도로만 도우려고 했다.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마냥 행복할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시작부터 문제가 생겨버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뉴스는 다음 주제로 넘어가 있었다. 바로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 일정에 관해서.
오들리 대통령?
저건 또 누구야.
회사 이름이야 다를 수 있다. 말도 안 되지만 내가 모르는 현성 의 과거 이름이 대성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미국 대통령의 이름과 얼굴을 본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차서준으로 눈을 뜬 이 세상은. 김도경이 살던 곳과 전혀 다른 곳이라는 걸.
지금 시기의 미국 대통령이 누군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으 니까.
저 자막에는 오들리가 아닌 다른 이름이 있어야만 했다. 심지 어 백인이 아닌 흑인이어야만 했고.
처음 들어보는 국내 대기업, 기억과 다른 미국 지도자 등등.
이 모든 정보들을 취합해보면 하나의 결과가 나왔다.
“세상에나. 다른 세상이라니.”
“응?”
“아니에요. 아빠! 제가 어깨 주물러 줄게요.”
작은 손으로 아빠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피로로 근육이 뭉친 것인지, 아니면 손에 힘이 부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아빠의 어깨 는 딱딱했다.
“어우. 시원하다. 우리 서준이가 아빠 어깨를 주물러 주니까 피로가 싹 사라지는데?”
“정말요?”
“당연하지. 우리 서준이 용돈을 줘야겠는걸?”
거짓말이다.
6살 아이의 손이 시원할 리가 없을 테니. 하지만 아빠의 얼굴 은 정말로 피로가 싹 가시는 표정이었다.
마치 호랑이 기운이 불쑥 솟아나는 그런 모습이랄까.
5분 만에 지친 나는 어깨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엄마. 나 들어가서 장난감 가지고 놀래요.”
“그럴래?”
“응.”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서둘러 작은 내 방으로 향했다. 집이 워낙 좁아서 몇 걸음 걷지도 않고 도착했다.
재빨리 미래 설계 공책을 꺼내 펼쳤다. 거기엔 미라클 제약, 골 든 인베스트 등등,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거지?”
하하. 허탈한 웃음이 작게 흘러나온다. 혹여나 짧은 거리 거실 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조금만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한 계획이 시작부터 삐걱 거린다.
아니지, 삐걱이 아니라 시작부터 무너져버린 거 같은데?
다른 세상이란다.
김도경이 알고 있던 회사들은 이곳에 없다. 또 미래에 벌어져 야 할 일들이 이곳에선 벌어지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정보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아주 방 울방울 톡톡 터져버렸다고.
“어쩔 수 없지.”
새로운 삶이라는 기적을 주었는데 이 이상 욕심을 부리면 과 욕이겠지.
“아니. 오히려 잘됐어.”
오로지 ‘연기’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나다.
이미 한 번 해본 캐릭터. 아니면 성공을 알고 있는 작품만 따라 연기한다는 건 배우로서 퍽 즐겁진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다른 세상이다?
벌써부터 기대된다.
새로운 세상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배역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