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당신이 낯선 어린아이의 몸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여기서 당신이 해야 할 말은 무엇일까?
정답은 바로.
“누구세요? 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기억상실증’을 주장하는 거다.
현재 처한 상황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를 주장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 이 없다.
기억을 잃어버렸어요. 이렇게 말하면 주변에서 내가 누군지, 또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친절하게 하나하나 알려줄 테니.
괜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작가들이 욕을 먹어가면서도, 툭하면 기억상실을 써먹는 게 아니다.
“의사 선생님. 우리 서준이가 이상해요. 서준아, 혹시 엄마를 못 알아보겠니?”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작은 머리를 부여잡고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당혹스럽 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서준아, 엄마야. 모르겠니? 선생님. 우리 애가 저를 못 알아봐 요. 어떡해요.”
나를 서준이라고 부르는 서준이 엄마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 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사고 이후 눈을 뜬 아들이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 는다고 하니.
“으음. 아무래도 강한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기억상실 상태 인 것 같습니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환자에게 지금과 같은 경우 가 종종 나타나곤 합니다.”
“기, 기억상실이요? 우리 서준이가요?”
“네. 자세한 건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사고 직후 찍은 사진들로는 신체에 큰 이상이 없었으니. 서준이 어머니께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곰곰이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김도경의 기억은 떠오를지언정, 이 서준이라는 아이의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의 도움 덕분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서준이가 과 거와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이해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첫 단추는 무사히 넘겼고.
혹시나 조금이라도 서준이라는 아이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까 생각에 잠긴 동안. 그런 내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서준이 엄 마가 의사 선생님에게 재차 묻는다.
“의사 선생님. 우리 서준이 정말 괜찮은 거죠?”
괜찮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걱정이 되는 거겠지.
당장 저 목소리만 봐도. 지금 선택한 ‘기억상실증’이 얼마나 현명한 방법인지를 알 수 있다.
한 순간에 달라진 아이가. 엄마의 기억과 다른 행동을 하더라 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얻었으니까.
이제부터 과거 서준이와 다른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기억상 실증’에 걸렸기에 모두 납득이 갈 터였다.
“아무래도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은 상태이다 보니. 단기적인 기억 상실이 나타날 순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며칠 내로 다시 원 래대로 돌아오곤 하니. 서준이 어머니께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 으셔도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준이 엄마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자. 의사 선생님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조용히 말을 잇는다.
“어머님께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시면. 일시적 기억 상실에 걸 린 서준이가 혼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에 서준이 엄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 인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방금 전과 같은 다급함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눈동자 속에 담긴 소용돌이치는 감정까지 숨기지는 못 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는 서서히 상황 파악했다.
눈을 뜬 뒤 보인 어린아이의 손.
나를 서준이라고 부르는 젊은 여자.
그리고 사고 직후 기억상실이라고 말하는 의사까지.
단편적인 정보를 취합해보면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환생(還生).
그 어떤 할리우드의 특수 분장으로도. 성인 남성을 어린아이 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테니까.
심지어 작은 손가락 너머로 생생한 촉감이 느껴진다. 마치 지 금 상황이 꿈이 아니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그런 촉감을 느끼면서. 나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복잡한 현 상 황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 정리를 좀 해보자.
어린아이인 이 몸의 이름은 ‘차서준’.
그리고 걱정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살피는 여자는 이 아이의 엄마일 테고.
신이 내 기도를 들어준 건가?
후회로 가득하던 김도경의 삶의 끝에 올린 간절한 기도.
그 기도를 듣고선 차서준이란 새로운 삶을 기회로 준 것일지 도 모른다. 이번 생에는 김도경 시절처럼 바보같이 살지 말라고 말이다.
내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귓가에 걱정이 한가득인 의사 선생님과 서준이 엄마의 대화가 들렸으니까.
“다시 한번 정확한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현재 서준이의 몸 상태가 빠르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요.”
“의사 선생님. 정말인가요?”
“예. 사고 당시에도 머리를 제외한 신체 부위는 큰 부상이 없 었기 때문에. 결과를 지켜보다가 퇴원 후 통원 치료를 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편이 아이의 기억을 빠르게 돌아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 는 의사 선생님의 뒷말이 이어진다.
“의사 선생님. 그러면 잠시 밖에서 몇 가지를 더 물어봐도 괜 찮을까요?”
아무래도 이 몸이 경험한 사고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려는 모양.
서준이 엄마와 의사 선생님, 그리고 간호사들까지 병실을 나 서고. 홀로 남은 나는 조용히 생각을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살던 나를 보며. 속이 터져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것이 분명했다.
오직 연기만이 인생의 전부였기에 몰랐다.
“멍청하긴 멍청했지.”
가족이기에 믿고 모두 맡겼고. 혈육이기에 계약서 글자 하나 읽지 않고 모두 사인했었다.
돈이 필요할 때면 누나가 준 카드로 해결했다. 자산관리 역시 모두 누나에게 일임했기에 정말로 몰랐다.
배우 김도경이 얼마나 병신 같은 삶을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더라면 은퇴하고 나서야 수중에 몇 푼 없 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지.
가족이 아니었다. 누나라는 탈을 쓴 탐욕에 미친 괴물일 뿐이 었다. 그 마지막이 광기에 물든 눈으로 내게 픽업트럭을 돌진하 던 모습이었고.
지독한 후회와 함께 눈을 감은 내게.
신이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것이 아닐까?
이번 생에는 후회 없이 살아보라고.
*
꿈을 꾸었다.
꿈이라 확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엄마! 쟤 또 기침해!’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은 잊고 살았던 김도경의 어린 시 절 기억과 일치했으니까.
이때가 언제였더라···.
생각났다.
아역 배우 시절 작품 활동이 끝나고 정말 크게 아팠던 적이 있 었다. 아마 14살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몸이 의도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저 어릴 적 김도경이 고 통에 꿈틀거리는 몸이 느껴질 뿐.
몸에 대한 통제권은 없으나. 현재 얼마나 아픈지, 또 얼마나 서 글픈지에 대한 감정들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으으.”
아직 어린 학생인 내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39도에 달한 고열은 아직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이었으니까.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 귓가에. 익숙한, 아니. 잊을 수 없는 목 소리들이 들려온다.
“엄마. 쟤 또 열나.”
“으이구. 그러니 항상 몸 관리하라고 그토록 당부를 했는데.”
“아씨. 나 감기 옮으면 안 되는데. 내일모레 이번 학기 기말고 사란 말이야.”
깜빡깜빡이는 정신 사이로 짜증에 찬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집안을 먹여 살리고 있는 아역 배우로 활동하는 아들. 또 자신의 용돈, 등록금의 출처가 되는 동생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목소리엔 걱정 따윈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다.
“얘. 너는 그래도 동생이 아프다는데. 누나가 되어서 그게 뭐 니.”
“내가 틀린 말 했어? 어차피 쟤 지금 촬영도 끝났잖아. 나는 당 장 중요한 시험이 코앞이란 말이야.”
“애 듣겠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냉동실에 넣어둔 수건이 나 챙겨줘.”
알았어! 하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그 목소리가 옆으로 다가왔다.
“야야. 이거 수건 냉장고에 넣어놨던 거니까. 얼른 몸이나 닦 아. 왜 아프고 지랄이야 지랄은.”
툭. 얼굴 옆에 찬 냉기에 꾸깃꾸깃 구겨진 수건 하나가 떨어진 다.
생각났다.
김도경이 막연한 트라우마로 잊고 싶어 했던. 과거 가족이라 불리던 이들이 자신에게 어떤 대우를 했었는지.
어린 마음에 아닐 거야 부정하고, 또 잊은 채 묻어두었던 기억 들. 갑자기 그 기억들 중 하나가 꿈에 나타난 모양이다.
왜지?
“엄마···. 누나···.”
어린 시절의 김도경은 고열의 고통 속에 희미해져 가는 정신 으로 애타게 엄마와 누나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차디찬 수건이 이불을 축축하게 적심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 도 아파하는 김도경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트라우마가 있기에 더욱더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 했 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왜 이런 꿈을?
그때였다.
내 입에서 갑작스럽게 기침이 터진 것은.
“콜록!”
이번에는 꿈속 14살의 김도경이 내는 기침 소리가 아니었다. 6 살의 차서준 어린이로 눈을 뜬 내가 잠결에 한 기침이었다.
어찌나 큰 악몽이었는지. 등뿐만이 아니라 이마까지 식은땀으 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마치 어린 김도경의 눈앞에 툭 던져진 차디찬 수건이 그랬듯 이.
혹여나 서준이 엄마, 아빠가 걱정할까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서준아!”
“우리 아들. 괜찮아? 아빠랑 엄마 여기 있어.”
그것도 둘이나.
구겨진 차디찬 수건 하나가 툭 던져지는 것이 아닌. 걱정이 가 득한 손길이 다급하게 이마를 쓰다듬는다.
“오빠. 서준이 이마에 식은땀 좀 봐. 저쪽에 수건 있으니까 가 져다줘.”
“어어. 잠깐만 기다려 봐.”
서준이 엄마의 그 말에. 서준이 아빠가 허둥지둥 수건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려간다.
황급한 마음에 얼마나 서둘렀는지 슬리퍼 한 짝도 제대로 못 신고 맨발로 갔다.
아들의 기침 소리에 갑작스럽게 잠에서 깼음에도 불구하고. 피곤이 가득한 두 사람의 얼굴에는 짜증 하나 서려 있지 않았다.
오직 아들이 어디 아픈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가득한 눈빛만 보낼 뿐.
그 모습이 낯설다.
방금 전까지 꾸던 악몽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엄마?”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돌아오지 않던 김도경과 다르게. 어색 하게 엄마를 부르자 따스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응, 서준아. 엄마 여기 있어요. 우리 서준이가 악몽을 꾼 모양 인데.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도리도리.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아 그저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 을 대신했다.
서둘러 수건을 가져온 서준이 아빠가 꼼꼼히 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준다.
“이제 괜찮아요. 얼른 주무세요.”
“그래. 엄마랑 아빠는 서준이가 코오 잠들고 나면 잘게요.”
괜찮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괜찮은지 확인한 다. 내가 깊게 잠든 척을 하고 나서야 다시 잠을 청하는 두 사람 이었다.
몇 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두 사람이 잠에 들었는지 색색거리 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살짝 고개를 들어 저 두 사람이 잠을 청하고 있는 잠자리를 바 라보았다.
낮은 간병인 보조 침대에 몸을 구긴 서준이 엄마. 그리고 둥근 원형 이동식 의자에 앉아 벽에 몸을 구긴 채 기댄 서준이 아빠.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의 가족들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악몽 속 김도경 때와는 다른.
조금은 따뜻한 가족.
그런 생각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