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
LA 베벌리 힐즈 외곽에 위치한 저택.
고요하던 저택에 귀를 따갑게 만드는 고성이 울려 퍼졌다.
“김도경!”
이 정도면 참으로 지극정성이다. 이 먼 미국까지 찾아와서 저 난리를 피우는 걸 보면.
아니지. 평생 노예처럼 여기던 돈줄이 탈출을 했으니, 잡기 위 해 이 먼 미국까지 찾아올 수밖에 없었겠지.
본인의 말을 무시함에 화가 났음일까. 고성의 옥타브가 한 층 더 올라간다.
“김도경. 너 정말 이럴 거야!”
“나 귀 안 먹었어. 그리고 이런 용건이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 네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나와 엄마의 헌신적 인 노력이 있었다는 걸 잊었어? 어떻게 엄마랑 나한테 그런 짓 을···.”
“헌신? 하하! 그 반대가 아니고? 나 이제 더 이상 노예 취급이 나 당하던 동생이 아니야. 지금까지 내게 하던 짓들을 보면 우리 가 가족이 맞긴 한가?”
“지금 너 주변 사람들의 속삭임에 지금 속고 있는 거야. 다른 사람의 거짓말보다는 가족인 엄마와 특히 누나인 나를 믿어야지. 안 그래?”
마치 정말로 나를 위해서 그랬던 거라는 누나의 태도에 헛웃 음만 찬다.
아역배우로 어린 나이부터 연예계에 뛰어든 나였기에 아무것 도 몰랐었다.
아니. 연기 외에는 시선을 보낼 수 없도록 철저히 내 눈과 귀를 가린 누나와 엄마였다.
그렇기에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받던 대우가 노예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나도 늦은 뒤였다. 이제라도 바로잡기 위해 나서자, 가족이라는 탈을 쓴 악마들이 날뛰고 있 었다.
저 모습이 악마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 악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번에 그런 기부 결정을 가족들과 상의도 없이 하면 안 돼. 차라리 이번에 내가 시작하려는 사업에 투자를···.”
윽박지르는 것이 만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한결 누그 러진 목소리로 달래보려고 시도한다. 정확하게는 기부할 돈을 자신에게 투자하라는 게지.
정말 수도 없이 당했던 수법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림도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더 이상 할 생각 따윈 없다.
“마침 잘 왔어.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은 재산을 모두 기부할까 도 생각 중이야. 누나 말처럼 할리우드에 자리 잡을 거잖아, 일 년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어마어마할 테니 금방 다시 모으지 않 겠어?”
“김도경!”
뾰족한 목소리가 귀를 두들긴다. 과거 나를 대할 땐 온화한 미 소가 가득하던 입가였는데. 가면을 벗은 얼굴엔 덕지덕지 욕심 만이 그득하다.
더 이상 탐욕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는 모습을 보니. 저 면상에 토악질을 할 것만 같다.
문득 과거 따스하게 자신을 부르던 입가와 오버랩되는 그 역 겨운 기억에. 피식 하고선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걸 본 탓일까.
서서히 눈매가 일그러지며 또다시 고성을 지르기 위해 숨을 들이킨다.
“거기까지야. 아무리 누나라고 하더라도 그 이상 선을 넘지는 마. 신고하기 전에 나가줬음 좋겠어. 미국에서까지 접근금지를 당하면 망신이잖아.”
“후우. 엄마도 널 보기 위해서 한국에서 힘들게 오셨어. 내일 은 엄마와 같이 올 테니까. 우리가 몇 달 머물 방을 준비해둬. 정 지시킨 카드들도 풀어주고.”
마치 맡겨놓은 물건이라도 찾아가는 양, 당당하게 요구 조건 을 내뱉는다.
내가 물끄러미 말없이 바라보자. 기세에 눌린 누나가 후다닥 시야에서 사라진다. 마치 두고 보자! 이렇게 외치는 악당처럼 말 이다.
아마 내일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오려는 거겠지.
둘이서 또다시 나를 압박할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뭐, 나는 어디서 주워온 자식이라도 되는 건지. ‘도경아. 네가 오해하는 거야. 누나가 널 위해서 나쁜 일을 했겠니?’하는 소리 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차라리 나를 이용해 먹으려 접근하려던 나쁜 놈들도. 거지같 은 가족들의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러설 정도였으니 까.
다시 평화를 되찾은 저택의 작은 분수가 고요한 물소리를 되 찾는다.
엉망이 된 머릿속과 달리 저택 내 화려한 조명들을 보면서. 잔 을 들어 한 모금을 넘겼다.
“엉망이군.”
인생이란 영화가 있다면. 그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했었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된 아역배우의 생활.
국내를 넘어, 할리우드라는 세계로 진출할 수 있게 만든 연기 력이라는 압도적인 재능.
오직 인생 모든 것이 연기 하나만 바라보았던 삶.
12살부터 시작된 배우 인생에 있어. 오직 성공만이 나를 기다 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국이 배출한 역대 최고의 톱스타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던 내게.
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톱스타 배우 김도경. 소속사 대표인 누나를 상대로 고소장을 접수해.]
12살.
아역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나이였다.
비범한 연기 재능에 충무로가 시선을 보냈고. 곧바로 엄마는 나를 케어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아역배우 전문 소속사와 계약 을 한,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역배우의 모습이었으니까.
문제는 몇 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아역배우에서 어엿한 성인 연기자가 된 내가 1인 소속사를 차렸을 때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아역이라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탈피하고. 흥행 보 증수표 배우라는 꼬리표가 달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소속사 대표는 내 누나. 나이 차가 제법 되던 누나가 1인 기획 사를 차리고 전적으로 배우 생활을 케어하기 시작한 것이다.
“멍청했지.”
그렇게 최고의 톱스타 배우라는 평가를 받던 나는. 이내 얼마 나 멍청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 시작은 핑크빛 기류가 돌던 일반인 여성을 누나에게 소개 했을 때였다.
“겨, 결혼? 도경아. 배우라는 게 이미지가 정말 중요해. 너도 알지? 그런데 지금 김도경이라는 배우에게 있어 연애설은 정말 치명타로 다가올 수 있어.”
개소리였다.
이미 김도경이라는 배우는 그깟 연애설 따위로 흔들릴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의혹이란 실금은.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란 균열 을 만들고 말았다.
- 김도경 가족사 기사 뜬 거 봄? 무슨 가족들이 김도경을 완전 염전 노예처럼 이용해 먹었던데?
- ㅋㅋㅋ 누나가 재산 다 빼돌려서. 김도경 수중에는 몇억 없다 더라. 작년 광고 계약 수입만 몇십억이라고 들었는데.
- ㅉㅉ. 김도경네 엄마 아파트 사람이 어제 난리도 아니었다고 하던데? 김도경이 술 먹고 와서 고성 지르고 집안 다 때려 부셨 다고 함.
- 나라도 그랬을 거 같은데. 12살부터 성공 가도를 달렸는데. 3 7살에 통장을 까보니 몇억밖에 없으면···. ㄷㄷ
- 심지어 누나가 사업병 걸려서 몇백억 다 날려먹었다고 함. ㅋ ㅋㅋㅋ 사기까지 당해서 빚도 있다던데? 뭘 어떻게 해야 그 많은 돈을 날릴 수가 있지?
톱스타(TOP STAR).
빛나는 수많은 스타들 중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소수의 이들에 게만 부여되던 칭호.
가정사가 알려지면서 톱스타 배우 김도경이 하루아침에 이미 지가 박살나버렸다.
“무얼 위해서 여기까지 달려왔지?”
남보다 못한 가족을 고소하고.
나는 김익준과 함께 미국에 진출했다.
정확히는 한국에서의 도피였다.
다행히 내 연기 재능은 한국을 넘어 할리우드에서도 통하기에 충분했다.
이 저택도 그저 새로운 영화 촬영을 위해 제공된 임시 거처일 뿐이다.
12살부터 25년 넘게 이어진 탑급 연예인 생활의 결과라고 하 기엔. 너무나도 비참한 결과였다.
아니. 가족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겼던 내 잘못이겠지.
“죽도록 달려온 결과가 이거라니.”
아직까지 나를 노예처럼 생각하고 있는 남보다 못한 누나와 엄마.
그 소스를 가지고 가십성 기사들로 물어뜯는 기자들.
탑배우에서 연기밖에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린 내 이미지까지.
모든 것이 최악이다.
내 1인 소속사 대표가 된 김익준이 머뭇머뭇 고개를 들이민다.
“도 배우, 갑자기 이 시간에는 왜 불렀어?”
“왔어? 잠깐 거기 앉아 봐.”
내 말에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는 남자.
배우 김도경의 마지막 매니저로 인연이 닿아 이제는 소속사 대표가 된 남자, 김익준 대표였다.
뷔 베르뎅 감독의 ‘서바이브(survive)’의 크랭크인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으로 넘어온 참이었다.
저택의 방들 중 하나를 사용하고 있었던 만큼. 여기서 무슨 일 이 벌어졌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저런 표정으로 나타난 거 겠지.
김익준은 불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자마자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린다.
“또 왜? 누나가 여기까지 와서 난리 쳐서 그래? 도경아. 방금 상황은 내가 나서기가 그래서 못했지. 이 문제는 내가 최대한 잘 처리할 테니 네 생각대로···.”
함께한 세월을 허투루 보내진 않았는지. 김익준이 내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젓는다.
“나 은퇴할까?”
“그래! 이참에 미국에서도 가족들이고 뭐고 다 고소하고 은 퇴··· 뭐?!”
내 입에서 고소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지. 열을 내던 김익준 의 눈동자가 3배는 커지며 나를 향한다.
저거. 뒤통수를 톡 치면 눈이 빠지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런 쓰잘 데 없는 생각을 하며 손에 든 잔을 들어 홀짝 한 모 금 넘겼다.
“도, 도경아. 진정하고 내 말 좀 잘 들어봐. 우리한테 지금 걸려 있는 광고 계약이 몇 개인지는 알고 말하고 있는 거지? 너 이거 물어줄 돈도 없다.”
“알지. 위약금 다 물어주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토해내야 한다 는 것도. 내 수중에 그걸 토해낼 돈도 없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알지.”
“거기서 끝이 아니다. 너 뷔 베르뎅 감독님 작품 배역 따내기 위해서 했던 개고생들 생각 안 나? 이제 크랭크인만 남았는데 여 기서 돌연 은퇴 선언을 하겠다고?”
“어.”
단호한 내 대답에 김익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도경아. 너 지금 술 취해서 그래. 맞아, 취해서 감정적인 거라 고. 누나 때문이라면 오히려 악착같이 성공해서 배 아프게 만들 어야지. 네 가족 문제는 내가 최대한 빨리 처리할게. 그러니···.”
“익준이 형.”
오랜만에 부르는 형이라는 호칭에.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김익준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내뱉어진다.
아마 저 표정은 누나가 어머니까지 모시고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이후로 오랜만이 아닌가 싶은데.
“아니! 너···. 아니다. 너 지금 스트레스로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래.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형.”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지금 너 취해서 그래.”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듯이. 김익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한다.
그 뒷모습을 보며 말없이 잔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
미팅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
은퇴라는 단어를 내뱉기는 했지만. 김익준의 말처럼 쉬운 일 은 아니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계약들이 나를 옭아매고 있는 상황이 었으니까.
“도경아. 오늘 뷔 베르뎅 감독님 말씀 들었지? 이건 진짜 무조 건 오스카 노미네이트된다. 그러니 어제 일은 잊어버리고 다시 열심히 달려보자. 알았지?”
오늘따라 운전대까지 잡은 김익준이 애써 나를 달래본다.
“누나한테 또 전화 왔었지?”
“···어. 수십 통 찍어놨더라. 참 사람이 지치지도 않아.”
“미안하다. 소속사 대표가 된 내가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손을 써두었어야 했는데. 이제 경호원이 붙었으니까, 저번과 같 은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몸이 아픈 엄마를 모시고 힘 들게 왔는데 문전박대가 무슨 짓이냐고.
아주 전화기를 넘어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악다구니를 듣 다가 수신 거부까지 해버린 참이었다.
“이번에 누나가 네 이름을 팔아서 제법 투자금을 받았던 모양 이더라고. 저쪽에서야 되면 대박, 안 되면 널 걸고넘어질 수 있으 니 그런 모양인데. 그 부분도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우리 도 배우는 신경 쓰지 마.”
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익준이 주절주절 떠든다. 혹여 나 내 입에서 또다시 은퇴라는 단어가 나오지 못하도록.
그때였다.
창밖을 바라보던 내 두 눈에 거칠게 달려드는 픽업트럭 한 대 가 보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픽업트럭의 운전석에. 광기로 물든 누 군가의 눈동자가 마주한다.
“···정말 미쳤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콰앙!
거대한 충격과 함께. 몸이 더미처럼 거칠게 요동친다. 퍽! 하는 소리는 내 머리가 창문에 깨지는 소리였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사이로 후회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처음으로 신을 찾으며 덧없는 기도를 올려본다.
기적처럼 내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이번 생처럼 후회로 가득한 삶을 살지 않겠다고.
*
흐릿한 정신 사이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사고로 다친 나를 찾아올 사람 중, 저런 여자 목소리는 없을 텐데.
“···아. 정신 좀 ···봐.”
목소리에는 걱정이 흠뻑 젖어있다. 엄마나 누나가 잠시 떠올 랐지만 이내 지웠다.
김익준이 절대로 엄마나 누나를 곁에 두게 하지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다친 나를 찾아와 저렇게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변호사를 찾아가 내가 눈을 뜨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고 있을 사 람들이다.
꿈틀.
힘겨운 노력 끝에 손가락을 조금 움직일 수 있었다.
“선생님! 의사 선생님!”
이제는 조금 또렷해진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내 손가락이 꿈틀거림을 보고서 황급히 의료진을 찾는 듯하다.
궁금하다.
그렇게 힘겹게 눈을 떠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본 순간.
누구지?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처음 보는 젊은 여자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걱정과 사랑이 가득 담겨있 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런 내 머릿속 폭풍은 이어지는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더 크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서준아! 괜찮아? 엄마 알아보겠어?”
“···누구세요?”
서준이는 또 누구야.
대체 익준이 형은 어디 가고.
나를 애타게 부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자가. 한 눈에 보더라도 20대 후반이 갓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가 나를 서준아! 라고 부르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경기라도 일으키듯 놀라는 젊은 여자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손 을 뻗는 순간.
“어?”
내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왜 이래?
뻗은 손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작은 손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