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225)화 (225/227)

225화 북진기 (25)

강릉은 바다까지 이어지는 강줄기가 도시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대한민국에선 의외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구조의 지방 도시다.

서울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한강 주변에 집중적으로 형성된 주거 단지와 상권처럼, 강릉의 번화가 역시 강줄기를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대한제국파의 수장이었다면 강릉 전역을 편하게 관리할 수 있으면서 불편함 없는 생활을 위해 중심부 어딘가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내 군함의 위치는 훤히 드러나 버렸지만, 상대의 쉘터 위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부터 시가전을 치르면서 정보를 취합해 나가야 한다.

그래도 마냥 주먹구구식으로 찾아 나설 수는 없으니, 나는 대략적인 추측으로 유력한 후보지를 몇 개 추려냈다.

대한제국파의 수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본인의 권위를 결코 낮추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역 관리에 대한 효율을 알뜰살뜰하게 챙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

‘후보는 크게 다섯. 병원, 마트, 대학교, 강릉시의회 건물, 마지막으로 관광호텔.’

모두 강릉의 중심부인 번화가에 자리 잡은 요충지들이며, 하나같이 강릉의 지배자가 자리 잡기에 적절한 위치다.

나라면 즉각적으로 물자 수급 및 케어가 가능한 병원과 마트를 본거지로 선택할 것이다. 거점 수비에 집중한다면 부지가 넓고 외부와 내부 경계가 확실한 대학교를 추가 후보에 넣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대상은 나처럼 독단적으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의 주위에는 동료가 아니라 부하들뿐이니까.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이성적인 관점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는 선택이지만, 역사적으로 수많은 지도자(수장)들이 때때로 비효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이유는 항상 아랫것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권위를 내세우고, 아랫것들의 충성심을 주기적으로 자극하고,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지 않으면 범죄 조직이라는 거대한 애물단지를 관리하는 것은 몹시 힘들다.

‘그렇다면 한대상이 숨어 있을 쉘터는 강릉시 의회 아니면 호텔에 있겠군.’

나는 평생 혼자 살아도 상관없고, 실제로 혼자 여생을 풍족하게 보낼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다.

늙어 죽을 때까지 감상할 수 있는 넷플러스만 있다면 세상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만큼 ‘미련’이 없다.

하지만 이 도시의 풍경을 보면 나와 달리 한대상에게서는 안쓰러울 만큼의 삶에 대한 미련과 거대한 야망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실제로 그를 본 적도 없지만, 그는 자신이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족이 되어 줄 부하들이 없다면 절대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인물임을 감히 확신했다.

‘조직 이름에 제국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을 만큼 오만하고, 강릉을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 대구를 노리는 야욕을 가진 인물이다. 자신을 받쳐 주고 동시에 빛나게 해 줄 들러리(부하)가 없다면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 타입이겠지.’

나는 강릉에 진입한 순간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 도시는 한대상이 처음으로 세운 ‘실험적인’ 제국이라는 것을.

시가지의 풍경은 좀비 사태를 피해 몰려든, 혹은 인간 사냥꾼들에게 잡혀 온 수백만 민간인들이 좀비 사육의 희생양이 되기 전까지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짐작하게 해 주는 흔적들로 차고 넘친다.

내가 포항에서 본 것은 약과라고 느낄 만큼,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서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끔찍한 흔적들이었다.

다년간의 훈련과 실전으로 정신 무장을 한 미군도 역겨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내 옆에 바짝 붙어 사주 경계를 하고 있던 해병대원 한 명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중남미의 카르텔 같은 범죄 조직이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를 맞이하자마자 이 도시를 점거했습니다. 성악설에 대한 신뢰도를 미친 듯이 끌어올리는 재주가 있는 그 쓰레기들이 자신보다 나약한 데다 도망칠 능력도 없는 민간인들을 어떻게 취급했겠습니까? 가장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저열한 욕망을 해소하기에는 제격이었겠죠. 어린아이가 해맑게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 것처럼 놈들은 이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축제’를 벌였을 겁니다.”

“……같은 나라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동정심도 없었단 말입니까? 역겨운 새끼들.”

“정부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사회가 무너졌을 때 득세하는 건 결국 힘 있는 자들 아닙니까. 법과 질서로 최소한의 통제받고 있던 짐승들의 목줄이 끊어졌으니 더 이상 눈에 뵈는 게 없었겠죠. 사상이나 성향을 따지기 이전에, 그냥 놈들은 그러고 싶으니까 그렇게 한 겁니다. 어떤 의미에선 욕망에 가장 충실했다고 할 수 있죠.”

인간은 배가 고프면 먹는다. 물론 배가 고프다고 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 먹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나쁜 짓이니까. 그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문명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심리적 제동 장치(이성)도 존재하지 않는, 이미 DNA 단위부터 글러 먹은 진성 범죄자 집단이다.

우스갯소리로 죽음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밑바닥의 정점이다.

해병대원은 건물 외벽과 앙상한 가로수에 장식품처럼 전시된, 이미 백골 상태에 가까운 시신들로부터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좀비와 각성자는 사망하면 시체가 소멸한다. 즉 저렇게 유해가 남는 것은 일반인뿐이다.

“전방 12시 방향 좀비 무리 발견.”

“발포 허가합니다.”

미군들이 먼저 소음의 진원지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좀비들을 발견하고 교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각성자가 아닐 뿐이지 평균적인 전투력과 현장 대응 능력은 상당했다. 쉽게 말하면 좀비 정도는 무기와 탄약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씹어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타카카카카!

시가지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총성과 폭음, 소음의 진원지가 너무 많아서 갈피를 못 잡고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좀비들, 그런 놈들을 양쪽에서 착실하게 사냥하고 있는 한대상과 나.

“좀비 무리의 증원을 확인했습니다!”

“뒤에서 옵니다!”

“강습병이 전위를 맡습니다. 특히 좀비를 상대로는 작은 실수만으로도 감염에 의한 전선 붕괴가 일어날 수 있으니 가능하면 앞서 나가지 마세요.”

내가 신호를 주자 대열의 사이드에서 미군을 보조하던 강습병들이 철컹철컹 움직이며 앞으로 나섰다.

처음 군함을 손에 넣었을 때만 해도 경비 로봇과 강습병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했었는데, 그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SF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족 보행 군용 모델 안드로이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투박한 외형이지만 신속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자랑하며, 군인처럼 대구경 소총을 들고서 정확한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이상적인 안드로이드.

무엇보다 내가 직접 간단한 명령을 내리는 식으로 운용할 수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아군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AI가 탑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와 갈라진 B 부대에는 장갑차 5대와 70기에 달하는 강습병을 떼어 주었다. 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B 부대가 혹시 모를 적 각성자에게 대응하려면 그만큼 강력한 화력이 필요할 테니까.

이렇게 범용성이 뛰어난 강습병이지만,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확보한 영역 외부에서 활동할 경우 최대 12시간이라는 활동 시간 제약을 받게 된다.

일단 12시간 꽉 채워서 사용하고 나면 24시간 동안 영역 내부에서 충전(쿨타임)해야 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에는 거점 방위용으로도 사용할 수 없는 고철 덩어리로 전락한다.

하기야 좀비에게 감염될 걱정도 없고, 박살 나도 수리킷으로 즉시 고칠 수 있는 전투 로봇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게 미친 거지.

“아아아아아아!”

“키익! 크으으으……!”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이쪽의 소음이 도심의 좀비들에게 전달된 건지 놈들의 머릿수가 계속 불어났다.

급기야 강습병들이 쏟아붓는 대구경 탄환의 포화를 물량으로 밀어붙이며 조금씩 접근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집요함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강습병과 장갑차도 없이 알보병만 끌고 시가지에 진입했다면 진즉에 나 빼고 전멸했을 것이다.

“강습병이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다! 장갑차도 화력 투사해!”

본래 장갑차는 한대상의 주요 거점에 배치되어 있을 각종 군사 장비들을 파괴하는 용도로 화력을 아껴 두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퉁퉁퉁퉁!

곧이어 장갑차의 40mm 기관포가 유탄을 뱉어 내자 떼지어 몰려오고 있던 좀비들이 산산조각 나며 육편을 흩뿌렸다.

고폭 소이탄, 대인 산탄을 적절하게 섞어 사용한 덕분에 고깃덩어리를 찢어발기는 성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물론 장비 파괴용인 복합 기능탄 재고까지 사용해 버리면 곤란하니 결국 보병인 우리가 좀 더 고생해야겠지만.

“시장 근처에 요새화된 대형 마트를 발견했습니다. 건물 옥상에 방공포와 레이더가 보입니다.”

“마트 내부에 무턱대고 장갑차를 밀어넣을 수 없으니 진입각이 나오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해병들은 저를 따라오시고, 수병들은 강습병 20기와 함께 장갑차를 호위해 주십시오.”

나와 소수의 해병들은 강습병 10기와 함께 강릉 수산 시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홈마트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저 건물에 어떤 방위 무기가 배치되어 있을지, 또 어떤 각성자가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조금 위험하더라도 직접 몸으로 때워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큰 대로를 가로질러 단숨에 건물 외벽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진행이 편하겠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만큼 상대의 스킬로 요새화된 대형 마트는 침입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마트 외부 주차장에서 지면이 갈라지더니 대뜸 자동 포탑이 불쑥 튀어나와 이쪽에 총구를 겨눈 것이다.

다가가가가각!

미니건처럼 시원스럽게 아스팔트 도로와 콘크리트 외벽을 긁고 지나가는 총탄 세례는 엄폐했음에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방탄 기능이 있는 강습병을 앞세우더라도 자동 포탑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건 잠깐일 터. 그마저도 집중포화를 받으면 고철 덩어리가 되는 건 금방일 것이다.

‘굳이 우직하게 화력 대 화력으로 정면 싸움을 해 줄 필요는 없지.’

나는 강습병 1기를 미끼 삼아 측면으로 달리게 했다.

목표를 포착한 자동 포탑이 즉시 총구를 돌리고, 버려진 차량과 건물 사이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강습병의 꽁무니를 쫓아 총탄을 퍼부었다.

내 거점에서 사용하는 자동 포탑과는 외형이 좀 다르지만, 그래도 자동 포탑의 작동 원리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자동 포탑은 일단 적 하나를 포착하면 그 적이 제거되거나, 인식 범위를 벗어나거나, 아니면 거점의 주인이 원격 제어로 표적을 강제 변경하기 전까지는 계속 지정된 표적만을 쫓지.’

강습병이 엄폐물 사이를 가로지르며 자동 포탑의 시선을 분산하는 사이, 나는 인벤토리에서 SMAW를 꺼내 열 압력탄을 쏴 날렸다.

애먼 곳을 향해 총탄을 퍼붓고 있던 자동 포탑은 열 압력 탄두가 바로 지척까지 날아올 때까지 반응하지 못하고 결국 화려하게 폭발해 버렸다.

당연히 요새화된 거점 외부를 지키는 거점 방위 무기가 저것뿐일 리는 없기에, 나는 강습병 몇 기를 추가로 사이드로 돌려서 일부러 어그로를 유도했다.

한대상이 쉘터에 처박혀서 각 거점의 방위 무기들을 원격 제어하고 있다면 지금쯤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강릉 전역에서 매 30분마다 등장하는 대량의 좀비들, 부대를 반으로 찢어서 강릉 중심부의 위쪽과 아래쪽을 동시에 공략하고 있는 우리 때문에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할 테니까.

바로 그 점이 이 단순한 공략을 가능케 해 준다.

강습병의 전력 질주에 어그로가 끌려 추가로 모습을 드러낸 자동 포탑을 또 하나 격파하고, 우리는 단숨에 대로를 가로질러 마트로 접근했다.

내부에 진입하기 전, 안쪽으로 연막탄을 까 넣었다.

“제가 리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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