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북진기 (24)
사실 나는 꼬라박는다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북한군과 드잡이질을 하던 시절, 땅굴 하나 토벌하겠다고 문자 그대로 우리 같은 보병들만 시원하게 꼬라박은 적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기 때문이다.
그런 지독한 경험을 한 나지만, 그럼에도 꼬라박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난 꼬라박는 것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니까.
“거점 전쟁? 이게 대체 뭡니까?”
“시야에 이상한 메시지창이 나타납니다. 이게 각성자들이 본다는 그 상태창 시스템입니까?”
“사, 상태창!”
“등신아, 우린 각성 못 해서 외쳐 봐야 소용없어.”
“Shit!”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의 급작스러운 변화, 뒤이어 강릉항 한복판에 꼬라박는 것도 모자라 거점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알림 메시지까지 나타나자 함교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상태창을 외치는 양키들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나올 뻔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본래 거점 전쟁이 일어나는 조건은 다른 인간 혹은 적성체가 점거하고 있는 중립 지역을 내가 강제로 탈환하려는 시도를 할 때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다른 각성자가 나처럼 스킬로 점거한 지역에 나 같은 부류가 발을 들였기 때문에 발동한 이벤트라고 봐야겠지.’
한 나라에 두 명의 왕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거점을 확보할 수 있는 스킬을 보유한 각성자가 서로 적대 중일 때 다른 각성자가 해당 거점에 침투하면 자동적으로 거점 전쟁 이벤트가 벌어지는 것이다.
만약 내가 대한제국파의 수장, 그러니까 지금 내 상대인 ‘암상인’ 한대상과 우호 관계였다면 아마 시스템이 먼저 문제가 발생하는 걸 막아 줬을 터.
결국 우리는 서로를 적대하는 이상 같은 시스템 아래에서 절대 양립할 수 없으니, 이 거점 전쟁을 통해 반드시 상대를 끝장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소란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가 이내 함장과 부장, 그리고 몇몇 함 내 실세 간부들만 따로 함장실로 불러 모았다.
“상황이 워낙 급변해서 당황스러운 건 알겠습니다만, 이왕 적을 끝장내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네. 그저 우리 같은 일반인들 입장에서 터무니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다들 당황했을 뿐이지.”
“좋습니다. 우선 본 함의 구조가 어째서 갑자기 바뀌었는지, 거점 전쟁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 각성자들이 이 혼란스러운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에 접하게 된 ‘시스템’이란 RPG 게임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하다.
애초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게임이란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어렵지 않게 내 설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저 육지를 돌아다니는 괴물들은 일종의 몬스터이고, 각성자들은 그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으로 경험치와 아이템을 획득하는 플레이어란 말인가?”
“비슷합니다. 완전히 게임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죠.”
실제로는 사망하면 리스폰도 못 할뿐더러 자신의 HP를 정확한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게이지 바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각성자들은 이 시스템에 적응했다.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은 진즉에 다 죽었다는 우울한 진실도 있지만 그건 일단 제쳐 두고, 요는 시스템 덕분에 각성자들이 초자연적 힘으로 현실을 왜곡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각성자인 일반인들은 이 점을 유의하기만 하면 각성자들을 상대로 마냥 위축될 필요가 없다. 어쨌든 각성자들도 특별한 조치 없이 납탄 한 발에 비명횡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각성자에 대한 것은 대충 알겠습니다. 레벨 업을 하고, 스킬을 강화하고,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으로 일반인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위해 더 위험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표본 그 자체군요.”
에빈 부함장의 지적은 정확했다.
문자 그대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수많은 각성자들은 더 강해지기 위해, 더 안락하고 편한 삶을 살기 위해 위험천만한 전장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특히 전투계 각성자는 투쟁을 멈추고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더 이상 강해질 수도 없고, 생산성과 비전도 찾을 수 없는 잉여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세상이 과거보다 한층 더 잔혹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한 미군들은 저마다 각성자에 대해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린 눈치였다.
“그럼 각성자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하고, 다음은 거점 전쟁입니다. 사실 이게 지금 우리의 목숨이 걸린 가장 중요한 문제거든요.”
나는 테이블 위에 작전 지도를 펼쳐 마커로 강릉 일대를 감싸는 거대한 원을 그렸다.
“저와 상대처럼 스킬로 특정 지역이나 설비를 확보할 수 있는 각성자들끼리 서로 적대하게 될 경우, 어느 한쪽이 먼저 점거한 땅에 상대가 발을 들이미는 것은 그 자체로 침략 행위라고 볼 수 있겠죠. 협력(우호) 내지 중립적 관계가 아닌 이상 이 거점 확보 계열 스킬은 모든 외부 적성체의 침입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거든요.”
“즉 본 함이 이승권 각성자 대표님의 거점이 되었다면, 현 상황은 서로 주인이 다른 거점과 거점이 충돌한 상황이라고 봐야겠군요?”
“정확합니다. 그래서 양측의 거점 영역(국경선)이 겹치면서 퇴역병인 제 거점 권한과 상대의 거점 권한이 충돌을 일으켰으니, 시스템은 제가 상대의 거점을 강제 탈취할 의사가 있든 없든 이걸 침략 행위라고 규정한 겁니다.”
대놓고 남의 땅에 침략하는 행위는 나 전쟁한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것과 같다. 시스템이 어째서 갑자기 거점 전쟁을 성립시켰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다만 이번 거점 전쟁은 조금 특이한 면이 있네요. 제가 알기로 일반적인 거점 전쟁의 승리 조건은 보통 상대를 전멸시키거나, 아니면 거점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거점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점령을 조건으로 내세웠네요.”
“그…… 이승권 각성자 대표님의 말마따나 시스템이라는 것이 ‘밸런스’를 중시한다면 강릉이라는 도시와 일개 군함 한 척과는 체급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 입장에선 군함을 파괴하기 쉽지만 우리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도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건 힘들 테니 말입니다.”
“일리 있네요.”
에빈 부함장의 말대로 이 거점 전쟁의 승리 조건은 꽤 세심하게 밸런스를 조정한 감이 있다.
강릉의 병력이 대부분 전선으로 빠진 지금, 상대 측은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극도로 적은 대신 강릉 전체가 홈그라운드이며, 반대로 우리는 넉넉한 병력이 있지만 지켜야 할 대상이 군함 한 척뿐이라 무지성 돌격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시스템은 양측의 전력을 분석해 거점 파괴 조건을 점령으로 변경하고, 전장의 변수로 작용할 좀비 웨이브 요소를 추가한 것이다.
만약 나와 상대가 각자의 거점에서 존버를 하며 밍기적대기만 하면 어느샌가 강릉 전체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좀비들에게 집어삼켜질 것이고, 거점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도망칠 수도,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우리는 사이좋게 공멸할 것이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면 거점 전쟁이 꽤 재밌게 흘러갈 것이다.
매 30분마다 꾸준히 좀비 웨이브가 발생한다면 좀비를 사냥하는 것으로 성장 및 자체 보급이 가능해진다. 뿐만 아니라 상대가 여전히 밍기적댄다면 혼자 성장을 독식하면서 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도 있다.
상대의 성장을 억제하면서 피해를 누적시키거나, 아니면 성장이고 자시고 다 필요 없고 속전속결로 밀어 버리거나.
어느 쪽이든 상대와 싸워야 끝나는 건 확실하다.
“가만, 이거…… AOS 게임 방식 아닙니까?”
내 설명을 듣고 있던 한 젊은 장교가 뜬금없이 그런 얘기를 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당황한 그는 ‘다들 AOS 몰라요? 롤 챔스 안 봅니까?’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AOS 장르라면…… 그 포탑이랑 넥서스 파괴하면 이기는 게임 말하는 겁니까?”
“예. AOS 장르의 대표 격인 롤이나 도타는 주기적으로 자동 생성되는 미니언을 때려잡고 성장하면서 상대의 주요 거점을 파괴하는 것으로 최종 승리하는 단순한 방식의 게임입니다. 그게 지금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서…….”
“확실히 비슷하긴 하네요.”
미니언(좀비), 포탑(주요 거점), 넥서스(쉘터와 이승권호).
거기에 우리라는 챔피언을 추가하면 딱 현실판 AOS 장르 게임 하나가 완성된다.
그나마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 팀이 개못한다고 해서 내가 미드 오픈하고 달리면 바로 게임이 터진다는 것 정도?
‘아니지. 애초에 우리 팀은 각성자가 나 혼자인데, 미드 오픈이 아니라 라인전에서 지기만 해도 게임이 터지는 거지.’
거점 전쟁은 종료되기 전까지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되기 때문에 나와 상대 모두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다. 즉 각성자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저쪽이 여전히 유리한 셈.
방금 시스템이 밸런스를 세심하게 조정한 것 같다고 칭찬까지 해 줬는데 이러면 완전 나가리다.
‘잠깐, 밸런스?’
시스템이 정말로 그렇게 허술할까?
시스템은 강제 탈취 성공률이 90%인 내 영역 지정(A-) 스킬과 상대의 불법 점거 스킬의 사용을 일시적으로 봉인했다.
하지만 다른 스킬까지 봉인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거점창.”
나는 거점창을 열어 다른 지역의 거점과 여전히 ‘연결’이 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거점 연결 스킬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따라서 거점 공유를 통해 외부에 있는 또 다른 거점으로부터 물자와 거점 방위 무기를 끌어 오는 것도 가능했다.
‘이겼다.’
각성자가 한 명뿐인 우리는 철저하게 본진 사수를 하든, 아예 집을 비워 두고 외야 플레이를 하든 각성자들로 구성된 상대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 악물고 거점을 지켜야 할 필요도, 소극적으로 적과 싸울 필요도 없어졌다.
이승권호에 수백여 대의 경비 로봇과 자동 포탑, 대좀비용, 대인용의 다양한 덫과 방어 설비들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배치되기 시작했다.
내 안의 광대가 벌써 웃음꽃을 활짝 피운 채 상대방을 농락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응, 점령 시도해 봐~ 무한으로 즐기는 거점 방위 무기 배치하면 그만이야~.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신 겁니까!
킹 승 권!
대 승 권!
빛 승 권!
아무래도 올해의 각성자 GOAT는 내 차지가 될 것 같다.
“적 각성자들의 빈집털이 대응책도 생겼으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쾅!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친 나는 적의 주요 거점, 그러니까 한대상의 불법 무기로 구성된 방위선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우선 상대의 손발을 모조리 잘라 냅시다. 그러면 좋든 싫든 상대는 머리를 지키기 위해 오체불만족인 몸으로 튀어나오겠죠. 설령 튀어나오지 않더라도 포위해서 쌈 싸 먹으면 됩니다.”
일본의 어느 뛰어난 이세계 출신 명장은 고작 3백의 병력으로 5천의 적을 포위 섬멸했다던데 우린 그보다 훨씬 사정이 낫다.
돌파용 장갑차, 넉넉한 무기와 보급 물자, 군함의 원거리 지원, 마지막으로 비각성자 미군의 부족한 전투력을 보완해 줄 강습병까지.
빠르게 포위 섬멸 작전 계획을 수립한 우리는 즉각 함 내에 남을 최소 인원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무장시키고 격납고로 집결했다.
외부로 통하는 전면 하부 갑판이 서서히 개방되면서 이윽고 강원도의 싸늘한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른 격납고 내부의 열기를 밀어냈다.
때마침 거점 전쟁이 시작된 지 30분이 경과해 첫 좀비 웨이브가 발생했는지, 벌써 강릉 내부에서 총성과 포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적절한 타이밍이다.
사기가 최고조에 달한 해병대와 해군은 갑판이 완전히 열린 순간, 전방을 향해 힘찬 함성을 5초간 내질렀다.
“““후아!”””
역시 본고장 해병과 물개들의 기세는 여간 기합이 아니었다.
나는 이들의 타오를 듯한 전우애를 온몸으로 느끼며 근력 증강제를 허벅지에 꽂았다.
찢고 죽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