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북진기 (23)
세상은 원래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하다.
그렇게 탄생한 불공평과 불평등은 힘세고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을 더욱 높은 자리에 올리고, 그 반대에 위치한 자들은 더욱 낮은 자리에 처박는 일종의 ‘시스템’으로 작용한다.
그런 B급 삼류 영화 같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 아니. 최소한 살아남기라도 하려면 필요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노력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
경험과 노하우만으로는 쉬이 따라잡을 수 없는 천부적인 재능.
거기에 한술 더 떠, 수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 안달이 난 희대의 행운까지!
이 세상은 강할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구조였기에, 수많은 조건들을 충족하는 인간이야말로 성공하고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
세간에서는 그것을 ‘선택받았다’고 말하며, 대한제국파의 수장이자 머지않아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로 거듭나게 될 한대상은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아, 하늘은 어찌하여 약해 빠지고 가진 것도 없는 놈들을 한대상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게 했단 말인가?
‘바로 내가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입이 아프도록 거듭 말해도 전혀 질리지 않는 이 절대적인 법칙 때문에 한대상은 자신의 우월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감탄하기에 이른다.
마치 자기애에 미친 나르시스트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홍조를 띄우듯, 한대상은 자기 자신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유능함과 월등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보스, 간밤에 강릉 북부와 남부에서 적들의 침입이 확인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걱정할 것 없다. 이미 내 능력으로 대처했으니까.”
대한제국파의 대외적인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는 한대상의 오른팔 황근철.
그와 대조되는 대한제국파 내부의 업무를 비밀스럽게 처리하는 한대상의 왼팔이자 ‘실질적인’ 2인자인 박용진.
그는 쉘터 내부에서 그 어떤 외부의 조력 없이 강릉 전역을 제집 안방처럼 훤히 들여다보는 한대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묵의 미덕을 지켰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대상이 직접 ‘괜찮다’고 말했다면 괜찮은 것이다.
그를 호위할 겸 수발을 들기 위해 강릉에 남은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모든 조직원을 외부로 돌린 이유는, 설령 그들이 없더라도 한대상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좀비 사태 초기, 한대상이 자신의 조직원들을 이끌고 강릉에 자리 잡으면서 공공연하게 밝힌 그의 능력은 무한한 자신감의 원천이 되어 줄 만큼 매우 강력했다.
실제로 한대상을 대표하는 ‘불법 점거’와 ‘암거래’ 스킬이 사실상 대한제국파의 근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으니까.
스킬의 등급까지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스킬의 효과만큼은 모두가 알 수 있을 만큼 매우 직관적이고 명확했다.
불법 점거는 한대상이 지정한 땅을 문자 그대로 불법 점거하여, 그 땅의 모든 권한이 그에게 귀속된다.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은 한대상이 불법 점거한 땅에 침입할 경우 자동적으로 위치와 규모가 까발려지고, 한대상의 아군(조직원) 모두에게 ‘표적’이 되어 철저하게 사냥당한다.
처음 자신들을 피해 이곳저곳에 숨어 지내던 민간인들을 한대상이 기가 막히게 찾아내어 좀비 사료로 던져 준 것도 그 스킬의 효과 덕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암거래.
이건 세상이 망한 뒤에도 한대상을 죽음의 상인으로 있게 만드는 알파이자 오메가.
한대상은 일반적인 각성자들처럼 상점창을 이용하지 못하는 대신 별도의 암시장을 통해 온갖 불법 무기를 ‘특수한 재화’로 대량 구매할 수 있다.
박용진을 비롯해 한대상 휘하의 고위 간부들이 시국에 맞지 않게 특수한 장비로 마음껏 무장할 수 있는 것도, 이 도시를 지키는 병력이 없어도 밤잠을 설치지 않고 잘 수 있는 것도, 심지어 전선으로 내보낸 머저리들을 무장시킬 수 있는 것도 모두 그의 암거래 스킬 덕분이다.
각성자는 상점창에서 제대로 된 총기 하나만 구입하려고 해도 최소 수천 DNA 샘플이 필요한데, 한대상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산더미 같은 무기와 탄약을 쉽게 확보했으니, 이런 시국에 그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간밤에 침입자가 있었다고 한들 문제는 없다.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미 한대상의 능력에 의해 분쇄된 이후일 테니까.
그의 권력은 모두 철저하게 사실과 능력에 기반하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박용진이 그에게 보내는 신뢰 또한 높은 산봉우리와 같았다.
침입자는 강릉 땅을 밟는 순간 이미 표적이 될 테고, 제아무리 강력한 각성자들이 철저하게 판을 짜서 덤벼 온들 그가 구축한 ‘킬존’을 돌파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보스, 외부로 돌린 조직원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아무래도 전쟁으로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근철이가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헬조선과 새천년평화교의 빈집을 털어 손해를 메꾸면 그만이니까.”
“예, 말씀하신 부분은 우리 조직원을 전선에 적게 투입하는 대신 남는 인원을 춘천과 속초 인근으로 보내면서 어느 정도 대비해 두었습니다. 다만 그쪽에서 눈치챈다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겁니다.”
“미개한 놈들, 정신나간 놈들을 내가 만들어 갈 새로운 시대, 새로운 국가에 남겨 둘 필요는 없지. 놈들을 처리하는 기일은 전쟁의 결과를 보고 결정하겠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한대상은 자신의 ‘조직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법 점거한 땅과 그 위에 자리 잡은 자신의 조직을 하나부터 열까지 관리할 수 있는 이 능력의 효율성은 이미 간밤에 입증된 바 있다.
‘전차 한 대와 자동 포탑 두 대가 파괴되었지만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고 침입 세력을 격퇴했다. 역시 내가 직접 원격으로 조작하는 것보다 시스템이 자율적으로 적을 요격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더 효율이 좋겠군.’
불법 점거한 땅 곳곳에 배치해 둔 각종 군사 장비들은 필요하다면 한대상이 직접 원격 제어할 수도 있다.
단지 그는 무기를 사고파는 죽음의 상인이었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군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차를 직접 제어한 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자동 포탑이야 불법 점거한 땅에 배치된 요격 시스템의 일종이라 자가 수리가 된다지만, 군사 기지의 한 격납고에 보관해 두었던 전차는 그가 직접 암시장에서 구입한 것이었으니 아무래도 조금 아까웠다.
‘하지만 방위 시스템의 실전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제어하는 것보다 시스템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더 효율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상대라면 무적이나 다름없다는 사실도 확인했지’
여기까지만 보면 기습을 당한 입장임에도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을 터.
오히려 상대가 각성자가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시체를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국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는 점이 더 강한 흥미를 유발했다.
각성자를 사살하면 DNA 샘플과 경험치, 아이템을 모두 가져올 수 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좀비처럼 시체가 소멸하기 때문에 뒤처리를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조직원들이 각성자니까 당연히 자신들을 노리는 것도 또 다른 각성자 세력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각성조차 못 한 일반인들이, 그것도 타국 군대가 자신을 노릴 줄이야.
‘남부 지방의 생존자 집단과 한때 이북 땅에서 활동하던 미군이 손을 잡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이북 땅에 있던 그들이 좀비 사태를 눈치채자마자 바닷길로 도망쳐 내려와 남부 지방에 자리 잡았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각성 시기를 놓쳤을 가능성이 높다.’
각성 시기를 놓친 것도 모자라 한국 땅에 기반이라곤 없는 미군이 택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고 자신들보다 강해진 각성자들에게 굽신거리며 그들 밑으로 들어갔거나, 아니면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다는 독립적인 지위로 협상해서 적당한 협력 관계를 맺었을 수도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한대상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는 것.
오직 그 사실 하나만이 쉘터의 최심부에서 강릉 전역을 손바닥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한대상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일국의 대통령도 자신을 잡기 위해 세금을 펑펑 쓰면서 군과 경찰을 동원했지만 끝내 실패했거늘, 시대에 뒤처진 버러지들이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노렸다는 사실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래, 기회가 되면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군함을 불법 점거 스킬로 빼앗으면 되겠군.’
미군의 군함은 매우 특출난 성능을 자랑하니까 일단 손에 넣기만 하면 무조건 이득이다. 뭣하면 불법 점거한 군사 기지 몇 개쯤 내주더라도 오히려 남는 장사일 만큼.
그가 흥미롭게 다음 전개를 기대하며 조직창을 조작하고 있던 그때, 한대상의 시야 한편에 자리 잡은 미니 맵에서 붉은 등이 점멸했다.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이 침입했을 때 나타나는 경고 알람이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찾아갈 필요는 없겠군.”
화면을 전환하자 고성능 CCTV처럼 선명한 강릉의 풍경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운다.
예상대로 강릉 앞바다에는 군함 한 척이…….
“이게 군함이라고?”
그도 일단은 ‘상인’이니까 작게는 밀무역에 쓰이는 고기잡이배부터, 크게는 바지선이나 화물선 같은 선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군함도 자주 봤기 때문에 일반인은 잘 모르는 함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세상이 망하지만 않았다면 러시아나 중국의 퇴역 군함, 혹은 잠수함을 도입해서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한대상이 보기에도 화면 속, 강릉 앞바다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기괴한 군함은 처음 보는 함종이었다.
구축함이나 순양함보다는 확실히 크고, 단순한 대형 수송함인가 싶다가도 외부에 보이는 무장이 살벌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비슷해 보이는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강습 상륙함 정도가 나오겠지만, 강습 상륙함은 엄밀히 말하자면 경항모와 다를 바 없기에 저런 괴상한 형태를 가질 수 없다.
‘대형 수송함 정도의 체급에 비정상적인 무장 상태, 그리고 갑판은 상당히 넓고 높지만 비행 갑판은 아니고, 내부 격납고가 상당히 거대할 것으로 추정되는 선체가 특징적인 군함이라…… 누가 보면 전함을 수송함으로 어중간하게 개조한 줄 알겠군.’
저 괴상망측하기 짝이 없는 군함을 다루는 것은 아마도 어젯밤 사살했던 미 해군일 터. 그들이 비각성자로 판명된 이상 겁낼 이유는 없었다.
‘다소 위협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어차피 비각성자들만 잔뜩 태우고 있겠지. 여차하면 내가 불법 점거 스킬로 빼앗으면 그만이다.’
물론 그 전에 주제도 모르고 계속 덤벼드는 놈들을 적절하게 손봐 줄 필요가 있다.
“지대함 미사일이나 포탄을 좀 퍼부어서 혼을 쏙 빼놓으면…… 음?”
군함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왜 멈추지 않지? 왜 계속 다가오는 거지?
바다 위에 떠 있어야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군함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하더니, 이윽고 강릉 해변에 시원하게 꼬라박았다.
그 충돌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모래와 파도가 철썩이고 부서진 콘크리트가 사방팔방으로 비산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시스템 메시지가 한대상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퇴역병’이 ‘암상인’의 영역에 침입하였습니다.
-특정 영역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과 불법 점거할 수 있는 권한이 충돌하였습니다.
-퇴역병의 ‘영역 지정’과 암상인의 ‘불법 점거’ 스킬이 일시적으로 사용 불가능 상태가 됩니다.(기존의 효과는 유지)
-거점 전쟁이 시작됩니다.
-승리 조건 : 퇴역병 사살 혹은 상대 측 임시 거점인 ‘이승권호’ 점령.
-패배 조건 : 암상인 사망 혹은 임시 거점인 대한제국파 1호 쉘터 점령.
-승리 : 랜덤한 스킬 1개 강탈, 경험치 획득량과 무관한 레벨 20 증가.
-패배 : 랜덤한 스킬 1개 박탈, 사망.
-추가 조건 : 거점 전쟁이 종료되기 전까지 매 30분마다 강릉 내부에서 좀비 웨이브가 발생합니다.
-특수 조건 : 전장 이탈 불가, 외부 개입 불가, 항복 불가
“이승권……!”
놈이 이곳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