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221)화 (221/227)

221화 북진기 (21)

“전황은?”

“공세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역시 야생 좀비가 변수입니다.”

부하의 보고에 황근철은 인상을 살짝 구겼다.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된 지도 이제 이틀째이건만, 벌써 공세 종말점에 가까워졌다는 소식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다행이다. 공세 종말점에 가까워졌다는 것은 전선이 고착 상태에 빠졌다는 것. 교착 상태를 무너뜨릴 수 있을 만한 강수를 둔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양 세력의 전선이 고착화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제3세력의 난입, 그러니까 ‘변수’가 등장하는 건 어딜 어떻게 봐도 악영향밖에 없다.

“야생 좀비의 어그로를 분산하기 위해 별동대를 먼저 내보냈고, 혹시 모를 전선 난입을 방지하기 위해 저지선을 미리 형성해 두지 않았던가?”

당연하지만 황근철은 변수가 생길 것에 대비하여 미리 이런저런 수를 써 두었다.

전선에서 적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은 1군에게, 사이드에서 좀비들의 난입을 막는 것은 2군에게 맡기긴 했지만.

“우리의 예상보다 야생 좀비들의 어그로가 충분히 분산되지 않았고, 사이드 저지선 또한 좀비들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각성자가 좀비에게 살해당할 경우 각성자의 경험치를 흡수한 좀비는 순식간에 변이를 거쳐 강력한 변종이 된다는 점이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놈의 변수, 변수! 예상을 하면 기가 막히게 빗나가고, 대비를 하면 어처구니없이 뚫리고, 지금 전선에 나온 건 각성자들이 아니라 코찔찔이 애새끼들이냐?!”

“…….”

“병력이 부족하면 지원을 해. 보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고,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를 하라고! 내가 꽉 막힌 사장이라 검토와 결재를 안 한다면 또 모를까, 각자 위치에 걸맞은 혜택과 권한을 줬는데 왜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도 손을 안 쓰고 있었느냔 말이야!”

황근철이 좌중을 둘러보며 할 말 있냐는 식으로 압박하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말씀 중에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전황이 이렇게 답답하게 흘러가고 있는 이유는 우리 대한제국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두 조직의 ‘폐쇄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폐쇄성?”

“예, 우리 대한제국파는 기본적으로 조직원들마다 영업 마인드가 탑재되어 있어서 타 조직과도 두루두루 잘 어울리고 그만큼 일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반면, 헬조선과 새천년평화교는 근본적으로 자기 조직만 중요시하는 폐쇄적인 집단 아닙니까. 그래서인지 연합의 형태를 갖추고 함께 움직인다고 한들, 매사에 그리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가령 저쪽에서 물자 보급 요청을 할 때면 정확히 어떤 사유로, 어떤 물자를 얼마나 원하는지 제대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냥 최대한 많이, 이것저것 전부 달라고 막무가내로 나오기 일쑤입니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는 건가?”

“예. 이번 전쟁에서 우리 대한제국파가 ‘물주’의 입장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 조직에서 나오는 물자가 무한히 샘솟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달라는 대로 다 줘 버리면 금세 동이 날 겁니다. 게다가 이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 세력의 참모진들이 모여서 작전을 입안하는 과정도 온갖 불평불만과 조직 간의 쓸데없는 이권 다툼 및 경쟁으로 일 처리가 매끄럽지 않습니다. 어렵사리 작전이 입안된다고 해도 실제로 현장에서 그대로 실행하는지도 불투명합니다.”

“그렇겠지, 우리 측 인원이 너무 적으니. 모든 전선에서 모든 일 처리 과정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자 부하들이 하나둘씩 자신들의 고충을 늘어놓았다.

연합군인데 도저히 연합군 같지 않다느니, 작전 불이행 및 명령 불복종은 일상다반사에 적전 도주도 심심찮게 포착된다느니, 거짓 보고와 과한 보급 요청, 심지어 연합군끼리 음해하기까지.

이쯤 되면 당나라 군대도 혀를 쯧쯧 찰 만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용케 전선이 밀리지 않는 것은 그들 하나하나가 매우 강력한 각성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좀비를 죽여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모두 손에 피를 묻힌 경험이 있으며, 그러한 행위에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낄 만큼 물렁한 놈들도 없었다.

즉 이 연합군은 내부 결속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지, 어지간한 외적들은 그냥 씹어 먹을 만큼 엄청난 포텐셜을 가지고 있다는 뜻.

대한제국파의 수장인 한대상이 굳이 오른팔인 황근철을 파견한 이유도 그런 문제를 예상한 까닭일 터.

밑바닥에서부터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황근철이라면 위아래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고충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중재할 능력이 있다.

“그런 문제가 있었다면 좀 더 빨리 말했어야지. 하여간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는……”

일단 급한 불부터 끄는 것이 우선이다.

황근철은 곧바로 헬조선과 새천년평화교 간부들과의 미팅을 잡는 한편, 부하들이 여러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새로운 매뉴얼을 짜기 시작했다. 그도 짬밥을 뒷구멍으로 먹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불법 무기와 마약을 판매하고, 사채를 굴리면서 손에 피 묻히고 살아가는 놈들은 옛날부터 무식하다는 고정 관념이 자리 잡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본격적으로 기업형 범죄 조직들이 득세한 이후부터, 돈이 되는 범죄도 어느 정도 머리가 굴러가는 놈이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꼬리가 밟혀 쇠고랑을 차기 마련이다.

대한제국파가 어떻게 전쟁통에 급격하게 세를 불릴 수 있었는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를 비웃을 수 있었는지, 그것은 한대상을 비롯한 대한제국파의 머리와 몸통이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으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제국’이라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단어를 조직명으로 당당하게 사용할 만큼 한대상은 능력 있는 남자였고, 실제로 그는 세상이 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각성 시스템의 원리를 알아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반인들을 좀비 사료로 활용하여 각성자 대규모 육성 사업을 성공시킨 것만 봐도 뻔하지 않나. 지금 자신들이 강자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한대상의 덕이다.

‘그러니 형님이 나를 믿어 주시는 만큼 나도 그 이상으로 보답해 드려야지.’

총성과 포성, 비명이 끊이지 않는 전장에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아가 승리를 거머쥐고 2인자의 지위를 다시 한번 공고히 하기 위해 황근철은 분골쇄신의 각오를 다졌다.

적들이 무자비한 포격을 퍼붓는 전선으로부터 제법 거리가 되는 후방 거점이 좀비들에게 뚫렸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받기 전까지는, 그래도 꽤 진심이었다.

* * *

“우왁! 씨발!”

함 내 격납고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장갑 구급차의 문이 갑자기 열리고 외부인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어느 누구라도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손전등을 들고 격납고 내부를 순찰하다가 나와 딱 마주친 미군이 깜짝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기, 긴빠이 마스터! 드디어 우리 군함마저 긴빠이하려고 몰래 숨어든……!”

“이런, 들켰네.”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미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준 뒤, 곧바로 격납고를 빠져나와 위로 향했다.

중간중간 나와 마주친 함 내 인원은 유령이라도 본 양 안색이 시퍼래지며 이따금 계집애 같은 비명을 지르곤 했다. 이딴 게 세계 최강 군대……?

“미스터 리, 이쪽입니다.”

다행히 함 내에 ‘긴빠이 유령이 나타났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에빈 부함장과 만날 수 있었다.

막상 나와 연락했던 그도 정말로 바다 한복판에 떠 있는 배 안에서 내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지금도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무어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다만 이번에는 사안이 사안인 만큼 그는 병사들처럼 호들갑을 떠는 대신 묵묵히 나를 함교로 안내해 주었다. 덕분에 무턱대고 나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천생 땅개라 그런지 물개들의 홈그라운드(군함)는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군함 특유의 좁은 내부 구조와 사방이 꽉 막힌 폐쇄성, 그리고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기계들의 구동음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래서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 거다.

“그쪽이 이승권 각성자 대표로군. 반갑네. 내가 이 함의 함장인 잭 커닝햄일세.”

내가 함교에 도착한 순간 수많은 이들이 나를 보고 당황했지만, 자신을 함장이라고 소개한 인물은 대수롭지 않게 먼저 악수를 청해 왔다.

아마 일반인으로만 구성된 미군 내에서도 각성자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각성자를 이해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 이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승권입니다. 사안이 급하다길래 바로 찾아왔습니다. 제가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이쪽에서 연락을 취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육지에 있던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있지 않나. 늦고 빠르고를 떠나서 자네가 진짜 사람이긴 한 건지 궁금할 지경이야.”

“하하, 제 능력 중 하나를 사용했을 뿐입니다. 김해 앞바다에서 추가 물자와 함께 실어 가라고 했던 장갑 구급차 기억하시죠?”

“자네 쪽 사람들이 직접 배에 실었던 그 특이한 장갑 구급차라면 기억하고 있지.”

“그 장갑 구급차는 제 소유의 특수 이동 차량인데, 제 능력을 이용하면 일종의 텔레포트(순간 이동)가 가능합니다.”

“SF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워프 게이트 같은 느낌인가?”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번거롭게 게이트를 준비할 필요도 없고,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정확히는 RPG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마을과 마을 사이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정말 놀랍군. 우린 분명 같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데, 각성자만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느낌이야.”

그의 말마따나 게임 같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 실제로 상태창과 시스템의 보조(통제)를 받는다는 점에서 각성자는 현실의 인간보다 게임 속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더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싶다.

무언가를 죽여서 레벨 업을 하고, 스킬을 강화하고, 상점창에서 아이템을 구입하고, 더 강해지기 다시 무언가를 죽이고.

확실히 일반적인 삶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애초에 미군과 우리의 차이점은 크지 않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

지금 이들은 일반인이면서 과감하게 각성자들 간의 전쟁에 참전해, 격동의 시대에 적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만약 이들도 타이밍만 잘 맞았다면 좀비를 사냥하고 강력한 각성자 집단으로 탈바꿈했을 것이다.

“그래서 절 콕 집어 호출하셨다는 건 그만큼 사안이 중하다는 건데,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이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내야 하는지라.”

“물론이지. 이건 작전에 투입된 현장 인원들의 헤드 캠 영상을 추출한 것인데, 자네가 직접 보고 판단하게.”

함장에게 군용 랩탑을 넘겨받은 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던 군인들의 헤드캠 영상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미리 저쪽에서 중요한 부분만 추출해서 편집한 영상들이었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확인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명백하게 수상쩍은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각성자인 내 관점에선 곧바로 핵심이 발견되었다.

“작전에 투입된 인원들이 공통적으로 마주한 것은 텅 빈 군사 기지와 몇몇 주요 거점, 그리고 운용 인원 및 경비가 일절 존재하지 않는데 자율적으로 가동 중인 각종 군사 장비들이군요.”

사람이 직접 운용하지 않아도 알아서 24시간 가동하는 군사 장비, 굉장히 낯이 익다.

‘내 거점 방위 무기와 상당히 흡사하다.’

일단 내 영역 내에 배치하기만 하면 알아서 적을 포착하고 요격하는 거점 방위 무기.

영상 속에 등장하는 동구권 구식 장비들도 거점 방위 무기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침입자를 포착해서 요격하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한 해병대원의 헤드 캠 속에서 등장한 소련제 전차였다.

그는 아군이 전차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C4 몇 개를 덕 테이프로 감아서 전차의 후방으로 접근한 뒤, 전차의 가장 취약한 위치에 C4 덩어리를 부착해서 화끈하게 터뜨렸다.

문제는 그렇게 무력화시킨 전차의 내부를 확인했음에도 전차병이 없었다는 것. 이 부분은 내가 원격으로 제어해서 무인으로 움직일 수 있는 UCAV나 ATX와 비슷했다.

나와 완전히 같은 스킬은 아니겠지만, 스킬의 원리 자체는 나와 같다고 해도 무방했다.

‘세상이 망했는지 대체 그 많은 불법 무기와 탄약을 비롯한 온갖 물자가 어디서 펑펑 쏟아져 나오는가 했더니만.’

머릿속에서 끝내 완성되지 않은 채 휑하던 거대한 퍼즐이 마침내 완전히 짜 맞춰진 느낌이다.

‘대한제국파의 수장은 아마도 나와 비슷한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운용 인원 없이 거점 방위 무기와 비슷한 불법 군사 장비를 강릉 곳곳에 배치한 것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를 보급하는 것도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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