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219)화 (219/227)

219화 북진기 (19)

“이미 관련 정보를 모두 공유받았겠지만, 작전 투입 전에 추가 브리핑을 진행하겠다. 육지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Navy)가 해야 할 일은 지극히 단순하다. 적의 후방 본거지를 원점 타격 하는 것.”

“대충 순항 미사일 퍼붓고 함포 몇 발 쏘면 끝날 일 아닙니까? 그게 우리(미군)가 유일하게 잘하는 건데.”

딱딱한 인상의 해군 대위를 상대로 해병대 소속 병장이 킬킬 웃으며 말하자 주변의 군인들도 웃음을 참지 못해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대위는 이제 소속 부대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해병대원을 타박하기보다는, 조용히 웃음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제되었을 즈음, 그는 브리핑을 이어 나갔다.

“……실제로 본함의 기존 계획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표 지점인 강릉에 순항 미사일과 함포 사격을 퍼부은 다음 헬기로 소수 정예를 투입시킬 예정이었지. 하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자 파트너 관계인 이승권 각성자 대표가 약 24시간 전에 보내 준 강릉 정찰 정보에 따르면 원거리 타격은 소용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더군.”

“지금 한창 육지에서 싸우고 있을 사람이 어떻게 적들의 후방 정찰 정보를 보내 줬다는 겁니까?”

“글쎄, 본인 말로는 정찰 드론을 통해 확보한 정보였다고 하는데, 본함의 분석관들은 ‘정찰 위성’으로 확보한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 그는 군대를 먹이고, 입히고, 무장시킬 능력을 갖춘 인물이니 우리가 모르는 것이 훨씬 많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바로 이 강릉의 자체적인 지역 방위 능력이지.”

대위가 리모콘을 조작하자 함내 식당의 조명이 꺼지고 한쪽 벽면에 특정 지역을 촬영한 이미지들이 빛으로 투사되었다.

“보이나? 과거 우리 군이 알고 있던 강릉의 군사 기지와 시가지의 형태는 이렇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촬영한 강릉의 풍경은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 중요 거점으로 보이는 건물 옥상마다 러시아제, 혹은 중국제로 추정되는 동구권 대공 방어 체계가 착실하게 배치되어 있다. 다수의 군함에서 쏟아 내는 수백 발 이상의 순항 미사일이라면 저런 대공망도 손쉽게 분쇄할 수 있겠지만, 현재 본함이 투사할 수 있는 최대 함대지 능력으로는 유의미한 원점 타격이 불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놈들은 정규군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걸 구한 겁니까?”

“강릉에 자리 잡은 유명한 범죄 조직이 한반도 2차 남북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꾸준히 불법 무기를 밀수해 왔다고 하더군.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런 작은 나라의 범죄 조직이 들여올 수 있는 불법 무기는 기껏해야 보병 화기 선에서 그쳤겠지. 즉 저것은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던 시절에 들여온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후에 놈들이 확보한 자체적인 방어 수단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시국에 잠수정이나 바지선이라도 운영해서 무기 밀매를 했다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수단으로 확보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동맹을 맺은 이들처럼 ‘각성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능력이라든가.”

“Fuck…….”

대위의 입에서 각성자 얘기가 나오자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군인들이 서로 합의라도 한 것처럼 침묵했다.

세상에 갑자기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고, 사회가 순식간에 붕괴하면서 바다로 도망쳐 나온 자신들과는 조금도 인연이 없는 것.

그들이 단편적으로 접한 ‘각성’에 대한 정보는 대충 이러했다.

이 기이한 현상은 일반인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군인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해지게 해 준다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공상 과학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기적을 현실에서 가능케 한다고.

단 한 명의 각성자도 존재하지 않는 미군 입장에선 이 지독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남들보다 크게 뒤처진 느낌이었다. 

각성자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셈이니 기분이 착잡할 만도 했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고, 상식적이지 않은 모든 현상은 기본적으로 ‘각성자’와 관련된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말이 안 되는 현상을 목격했다면 그건 곧 각성자와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것은 제아무리 강하고 다재다능한 각성자라고 해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거다. 상처를 입으면 고통스러워하고,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죽는다. 지상을 점거한 그 괴물 새끼들처럼 꼭 머리만 노려야 할 만큼 번거롭지도 않다.”

“하지만 놈들이 우리 같은 일반인과의 대인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져가는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개중에는 무슨 마법사처럼 손에서 불꽃을 내뿜는 놈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손에서 내뿜는 불꽃이 총알보다 빠른가?”

“…….”

“쫄쫄이 티에 망토를 뒤집어쓰고 날아다니면서 눈으로 레이저 빔을 쏘는 창작물 속의 히어로에 비하면 ‘각성자’라는 존재들은 여전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좀 더 대단하고, 좀 더 강할 뿐이지. 너희는 사람을 손쉽게 죽이는 특수 부대를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하나? 제아무리 강한 인간도 생명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이상, 총 한 발이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대위는 강릉을 촬영한 이미지를 차례차례 넘기면서, 재설정된 작전 인원 투입 경로를 보여 주었다.

“따라서 큰 화력으로 도시 전체를 시원하게 두들긴 다음, 소수 정예를 밀어 넣어서 요인 암살을 한 뒤 철수한다는 기존의 계획은 변경되었다. 지상 작전이 가능한 해병대와 해군이 고속정 및 보트를 타고 야간 침투를 감행할 것이다. 단 직접적인 교전과 요인 암살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적들의 지역 방위 능력을 파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각성자들이 이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이상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우리는 더 이상 주역이 아니다. 그러니 할 수 없는 일은 포기하고,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그건 군인이라기보단 용병 아닙니까?”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병장. 애초에 우리가 타국 내전에 참전한 이유는 보수로 막대한 물자와 편의를 약속받았기 때문이야. 여기에 명예와 애국심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군인이 아니라 용병이다. 오히려 그게 제군들에게도 와닿을 것 같군.”

세상이 이 지경이 되면서 본국과의 교신은 끊어진 지 오래고, 가장 가까운 일본에 있을 미 함대와의 연락도 되지 않는다. 그들이 죄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각성자들에게 뒤처진 미군이 살아남으려면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한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이 유명한 구절이 이제는 ‘일하지 않은 자, 살지도 말라.’가 되었을 만큼 세상은 급변했으니까.

“다소 리스크를 감수하게 되겠지만 침투 병력은 적들과의 교전보다는 교란과 공작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게 핵심이다. 적의 지역 방위 능력을 최소 반 이상은 빼앗아야 본함도 적들에게 어느 정도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테니까. 그 정도만 해도 의뢰자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겠지.”

“젠장, 화력 지원을 못 받고 보병이 먼저 적지에 들어가야 하는 작전은 하나같이 재수가 없다던데…….”

“여기가 아프간이었다면 그랬겠지. 그리고 착각하지 마라. 제군들이 먹고 입는 모든 것들이 이미 우리의 목숨값으로 지불된 것들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아군마저 배신하고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면 도망쳐도 좋다. 그게 아니라면 아군이 우리에게 보내 준 신뢰와 보수만큼 일해야지.”

“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작전 투입은 언제입니까?”

“지금 움직이면 되겠군.”

대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미 채비를 끝마친 군인들은 머릿속에 새롭게 공유받은 정보를 새기면서 마지막 점검에 들어갔다.

그들에게 추가적인 폭약과 신호탄이 지급된 것은 물론, 기존보다 작전 인원이 대폭 늘어나면서 침투 작전을 보조하기 위한 타 병과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적들을 섬멸하거나, 요인을 암살하거나, 지역 전체를 점거해야 하는 무리한 작전은 아니다.

작전 인원이 파고들 수 있을 만큼 파고들어서 적들의 대공망과 감시 체계를 폭파하고 철수하는 교란 작전이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일반적인 테러리스트나 범죄 조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게 문제일 뿐.

그럼에도 앓은 소리를 내거나 온갖 핑계를 대며 회피하려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바뀐 세상에 적응하려면 목숨 걸고 투쟁해야 한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고, 군인이라는 직업군은 그런 변화에 상당히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익숙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현 시간부로 강릉 침투 작전을 개시한다. 전원 타이머를 맞추도록.”

한겨울의 바다에서, 드물게도 달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천운을 등에 업은 채 완전 무장 한 군인들이 조용히 물살을 가로지르며 육지로 접근했다.

해안가에서부터 약하게 내리던 눈발이 육지에 발을 들인 순간 조금 더 거세졌다. 강원도는 겨울만 되면 시도 때도 없이 눈이 내리는 지역이라 이 부분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전방에 철조망.”

“절단기로 길을 확보하겠다.”

야간투시경을 착용한 해병대원이 앞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절단기로 철조망을 하나씩 끊어서 길을 열어 주었다.

강릉에 침투한 인원은 총원 60명. 30명씩 나뉘어 각각 강릉의 남부와 북부 해안가에 침투하여 각기 다른 목표를 노리기로 얘기가 끝났다.

그중 남부 해안가에 침투한 이들은 범죄자 집단이 새롭게 장악하여 개조한 옛 강릉 군사 기지에 배치된 방공망을 무력화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주목표였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경계 인원 없음.”

“보통 이런 중요 거점일수록 경계 인원은 필수 아닌가?”

“놈들은 각성자야.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놈들에게 대입하면 안 된다고 이미 얘기 들었잖아.”

“내가 먼저 간다.”

해병대원이 리드하고 해군이 그의 뒤를 따라 사주 경계를 하면서 기지 내부에 진입했다.

하다못해 중남미의 마약 카르텔도 군대 못지않게 거점 경계를 철저히 하는 마당에, 이곳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마치 관리 인력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내부에서 전해 들은 얘기가 있기에, 각성자와 일반인과의 불공평한 전투까지 걱정하면서 움직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

그들은 기지 내부에 진입하자마자 다시 분대 단위로 쪼개져 파괴할 목표물들을 찾아 나섰다.

대공포와 대공 미사일, 레이더 장비, 기타 군용 장비는 파괴할 수 있다면 가능한 모두 파괴하는 게 좋다.

“전방에 저거, 대공 미사일과 레이더 차량 아니야?”

“……상당히 구식 같은데? 저 정도면 러시아제가 아니라 소련제라고 해야겠어.”

“그럼 이런 곳에 S-400이라도 있을 줄 알았냐? 아무리 러시아가 부패한 국가라지만 그런 것까지 밀수하진 않아.”

“확실히 저런 성능 떨어지는 물건이라도 지천에 깔려 있다면 순항 미사일 수십 발로 도시를 박살 내기는 힘들겠지.”

잘됐다 싶어 설치용 폭약을 꺼내 든 미군은 문득 이상한 점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분명 장비들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왜 ‘운용 인원’이 없지?”

“…….”

“…….”

구식 궤도 차량 위에 대공 미사일 발사대가 올라간,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쯤에나 주력으로 쓰였을 소련제 대공 미사일 차량은 놀랍게도 덜덜거리는 진동음을 내뱉고 있었다. 즉 시동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레이더 장비도, 대공포도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운용 인원 없이 자발적으로 회전하면서.

“……무전 쳐 봐.”

“뭐?”

“다른 곳에서 목표물에 접근한 인원도 우리와 같은 상황인지 무전 쳐 보라고!”

적들이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이 장비들을 내버려 두고 어디서 퍼질러 자고 있을 리는 없고, 미군처럼 최첨단 장비를 운용하는 군대도 완전 무인화 시스템은 아직 도입하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데 장비가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귀신이 장비를 움직이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는 거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라는군. 운용 인원은 아예 전무하고, 경계 병력도 거의 볼 수 없었다고…….”

“그럼 이 모든 게…… 각성자의 신묘한 힘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라고?”

“미친.”

누군가 욕설을 내뱉은 순간, 군사 기지의 거대한 격납고 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전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밖으로 나왔다.

저것 역시 소련제의 구식 전차였으나, 대전차 능력이 상당히 부실한 보병들에게는 그 자체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다른 장비처럼 운용 인원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텅 빈 전차라면 더더욱!

“변변찮은 대전차 무기도 없이 빨갱이 AI 전차와 싸우게 될 줄이야. 콜 오브 듀티 다음 시리즈 스토리는 이걸로 쓰면 되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해병대원은 함께 엄폐한 동료에게 넘겨받은 덕 테이프로 C4를 둘둘 감았다.

천하의 미 해병대가 스스로 움직이는 빨갱이 구식 전차 하나 이기지 못해서야 진정한 해병대라고 할 수 없지.

오늘 그는 새로운 전설을 쓸 것이다.

어쩌면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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