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북진기 (16)
사람을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이코 킬러는 그저 쾌락과 호기심 같은 충동적이면서도 지극히 단순한 욕구만 있으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일반인이 어느 날 갑자기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 상황이 닥쳤을 때 망설임을 줄이기 위해 ‘훈련’을 한다.
물론 그 훈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정기적으로 정신교육을 진행한다.
우리가 망설임 없이 죽여야 할 적에 대해 배우고, 그들이 얼마나 악랄하고 잔혹한지, 그들을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지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 준비 과정이 모두 끝나면 마지막으로 ‘경험’만 채워 넣으면 된다.
처음 상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처음 상대의 흉부에 대검을 박아 넣고, 처음 상대의 머리에 야삽이나 헬멧을 때려 박는 그런 준비 운동 같은 것들.
그렇게 제 손으로 상대의 뜨거운 피 맛을 본 뒤에 무너지지 않는다면, 비로소 한 명의 살인자가 탄생한다.
그것은 군인일 수도 있고, 경찰일 수도 있고, 사이코 킬러일 수도 있고, 용병일 수도 있고,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다.
정말 중요한 건 ‘왜 사람을 죽이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느냐’다.
“긴장되냐?”
입을 열 때마다 흘러나오는 숨결이 새하얀 김이 되어 으스름한 새벽 공기 사이로 흩어지고 있을 때, 나는 문득 옆에서 엄폐한 채 총을 들고 있는 최묵호에게 그리 물었다.
녀석은 말없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우리는 긴장 같은 걸 하기엔 먹은 짬밥이 너무 많지.”
“그런 말 하는 놈들은 보통 긴장하고 있더라.”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옅은 한숨을 내쉰 최묵호는 어딘가 아련한 느낌이 감도는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되기까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 걸렸지.”
“1년? 새끼 복 받았네.”
“그렇지. 복 받았지, 너와 다르게.”
1년이나 제정신을 유지했었으니, 그렇게 중얼거린 최묵호는 한쪽 귀에만 착용한 하프 헤드셋에 귀를 기울였다. 나 역시 헤드셋에 귀를 기울였다. 아군의 무전이었다.
무전 내용은 별것 없었다.
이기열이 알아낸 정보대로, 우리의 예측대로, 적들의 계획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우회 기동하는 적의 현 위치와 병력 규모 정보가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대놓고 회전(會戰)을 준비하고 있는 적 본대는 당연히 우리의 시선이 태백으로 집중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속 편하게 별동대를 우회 기동시키고 있었다.
적이 회전을 준비하는 이상 우리도 최소한 동급, 혹은 그 이상의 병력과 화력을 준비해서 회전을 준비해야 했으니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
실제로 신해룡 육참총장 휘하의 현장 지휘관들이 대구에서 올려보낸 대병력을 이끌고 적절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우리가 자신들의 회전 준비에 교과서적인 대응을 보여 주고 있으니, 강대 강으로 충돌하는 회전 외에 다른 생각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조금 어처구니없다.
하지만 이건 적들이 멍청해서 안일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적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초반부터 감시의 눈을 뿌려서 우리의 움직임을 훤히 꿰고 매복을 준비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적들의 움직임을 먼저 파악했기 때문에 한 수 앞서 나가고 있는 것뿐이다.
이건 그냥 실제 전투만큼이나 중요한 정보전에서 서로 한 대씩 치고받은 결과에 불과한 거다.
우리가 매복으로 먼저 한 대 얻어맞았고(내가 대응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적의 기습적인 우회 기동을 차단하는 것으로 한 대 때리는 일만 남았다.
“온다.”
“매복을 당하더라도 기껏해야 소수정예로 움직이는 게릴라전을 생각했을 텐데, 깜짝 놀라겠군.”
우회 기동하는 적 별동대의 병력 규모와 화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얼마 전에 태백에서 진출해, 봉화의 험준한 길목으로 안일하게 움직이던 지원 병력을 골탕 먹이는 건 고작 각성자 4명으로 충분했었다.
하지만 또 같은 방식으로 달려들었다간 오히려 각성자 유격대원이 역으로 몰살당할 수도 있으니 우리 역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황이다.
별동대의 우회 기동을 차단하는 작전이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작은 규모의 회전(會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간다.”
“살살 해라.”
“총 살살 맞는다고 안 죽겠나?”
이번에는 드물게도 근접전 전문인 최묵호가 아니라 내가 먼저 나섰다.
절그럭! 절그럭!
방탄, 방편, 방폭 기능을 두루 갖춘 대형 전신 방호복(저거노트 슈트)을 착용한 내가 기갑 차량 상부에 얹을 법한 12.7mm 중기관총을 꼬나쥐고 움직이자 시끄러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이 시가지의 주요 길목에 위치한 건물마다 잠복해 있는 아군 수백 명이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기존에 상점창에서 구입했던 여러 보호 아이템을 어떻게 조립하면 잘 써먹을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아예 아이템을 추가 구매해서 전신 방호복 형태로 개조해 버리자는 결론에 도달한 물건이었으니 이해한다.
우리가 영화나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저거노트 슈트와는 성능부터 궤를 달리하는데, 소총탄 정도는 가볍게 막을 수 있다.
관통력이 매우 높은 대물 저격총이나 ‘포’를 쏘는 게 아닌 이상 단독으로 나를 죽일 수 있는 인간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왜 폭탄 해체 전문가가 EOD 슈트만 입으면 뒤뚱뒤뚱 움직이는지 알겠군.’
이 특제 저거노트 슈트는 각성 레벨이 굉장히 높은 내가 근력 증강제 주사를 꽂은 후에야 비교적 쾌적하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갑갑하고 무겁다.
EOD 슈트가 평균적으로 3~40kg이라고 하는데, 이놈은 못해도 100kg은 될 거다. 화장실을 미리 다녀와서 다행이다.
저거노트 슈트와 등 뒤에 메고 있는 거대한 탄약 박스, 그리고 탄띠로 연결되어 있는 중기관총을 포함해서 작은 경차와 맞먹는 무게로 움직인 끝에 나는 적들의 진격로 앞에 도달했다.
여기서는 예의 바르게 통성명이라도 하면서 하이쿠를 읊으라고 외치고 싶지만, 전쟁은 애새끼 소꿉장난이 아니므로 일단 방아쇠부터 당겼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미군에게는 핍티캘(50 Cal)이라고도 불리는 이 흉악한 중기관총이 냅다 불을 뿜자, 진격하고 있던 적의 선두 차량이 몇 초 버티지 못하고 화려하게 폭발했다.
탄약 박스에 채워 둔 탄약은 모두 고속 소이 철갑탄이었기 때문에 1차로 장갑을 관통하고 내부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 차량의 엔진을 부수고 연료통을 관통했다면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 찍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적은 고속으로 우회 기동하여 후방 침투하는 것이 목적인 별동대답게 모든 병력이 차량에 탑승하고 있었는지라, 나의 깜짝 불꽃놀이에 재빨리 대응할 수 없었다.
기어코 차량 두어 대가 더 폭발한 후에야 급정차한 차량에서 병력이 속속 하차하기 시작했다. 개나 소나 각성한 놈들 아니랄까 봐 나를 향한 즉각적인 대응 사격도 상당히 빨랐다.
티잉! 퍽! 피이이잉!
하지만 이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내가 상점창에서 구입한 비싼 보호 아이템을 개조해서 만든 특제 저거노트 슈트다. 거기에 일반 군용품을 적절하게 섞었는지라 방호력은 최상급.
어지간한 공격은 충격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기동력 하나가 장점인 별동대가 기동을 멈췄다면 더 이상 별동대도 뭣도 아니다.
“사격 개시!”
“저 병신 새끼들한테 한 방 먹여 줘라!”
느릿느릿 움직이던 적 장갑차가 기관총으로 나를 노리기 위해 박살 난 차량의 잔해를 밀어 내며 전진한 순간, 아군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고 전투를 개시했다.
갑작스럽게 건물 곳곳에서 쏟아지는 총탄과 각성자들의 능력, 그리고 무방비하게 홀로 앞으로 나온 장갑차의 상부 장갑을 노리는 90mm 무반동총.
꽈아아아앙!
적 장갑차가 제대로 힘을 쓰기도 전에 연약한 상부 장갑이 관통되어 그대로 유폭했다. 아무래도 내부에 탄약이나 폭약을 실어 두고 있었던 모양인데 어설펐다.
차량 여럿이 박살 나고 믿음직한 장갑차도 순식간에 무력화되자 적들은 혼비백산했다.
하지만 후퇴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고, 후퇴하기 위한 이동 수단도 이 짧은 시간에 절반 가까이 잃어버렸다. 이젠 좋든 싫든 우리와 진흙탕 싸움을 해야 한다.
“여긴 시가지다! 우리가 파고들면 적들도 실내전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도망치지 말고 파고들어!”
그렇게 즉각적인 대응책을 낸 것은 시가전 경험이 있는 국내 테러리스트 조직, 헬조선의 단원이었다.
놈이 외친 것과 동시에 우왕좌왕하던 적들이 빠르게 태세를 가다듬고 병력을 쪼개서 시가지 곳곳으로 산개했다.
돌파와 후퇴가 모두 불가능하다면 하다못해 이곳에서 작정하고 싸워서 작은 승리라도 챙기겠다는 심산이다. 어쩌면 그렇게 싸워 이긴 다음 추가 지원을 요청해서 우회 기동을 속행할 수도 있고.
나쁘지 않은 판단이지만 애초에 놈들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게끔 우리가 유도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하다.
콰앙! 쾅! 타타타타타타! 타타타!
여기저기서 우리가 미리 설치해 둔 부비 트랩이 터지고, 미리 실내전을 준비해 두고 배치한 아군이 무작정 내부로 진입하려는 적들을 시원하게 갈아 마시는 소음이 흘러나온다.
“작전 계획이라는 놈은 전투가 시작되면 3초 이상 가는 법이 없다지만, 막상 잘 풀리면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다니까.”
철컥!
간간이 내 쪽으로 쏟아지는 적들의 발악적인 사격이 있었지만 저거노트 슈트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2차 포화 준비를 끝마친 나는 다시 중기관총을 들고 전진했다.
상점창에서 구입하는 대부분의 아이템은 ‘내구도’ 나 ‘횟수 제한’ 판정을 받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에 상회하는 강력한 공격이나 스킬이 아니라면 내게 피해를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하지만 그 정도로 강력한 각성자를 고작 후방 침투가 목적인 별동대에 배치했을 리는 없다. 그런 인재는 강대 강의 싸움에 써먹어야 하니까.
콘크리트도, 철판도 막아 주지 못하는 12.7mm 중기관총을 들고 필사적으로 엄폐하고 있는 적들과 상당히 가까워졌다. 육안으로 적들의 긴장한 표정과 침을 꿀꺽 삼키는 목울대를 볼 수 있을 만큼.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이럴 때일수록 웃어야지.”
“이 미친 새……!”
투카카카카카카카!
내게 불법 AK 총구를 겨눈 헬조선 단원과 대한제국파 조직원이 사이좋게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었다.
내장과 피를 흩뿌리며 아름답게 날아간 두 사람분의 육편은 길바닥에 철퍽 쏟아지면서 한 사람분으로 합쳐졌다. 그 뒤에서 관통한 총탄에 팔이 날아간 로브 차림의 광신도가 남은 한 손으로 권총을 뽑아 들었다.
탕! 탕! 탕!
권총탄이 내 저거노트 슈트를 몇 번 간지럽힌 끝에 달칵달칵 공이 치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평화의……!”
“합죽이가 됩시다.”
합!
마지막 발악으로 스킬이라도 발동시켜 보려던 놈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잡아서 그대로 으깨 버렸다.
두꺼운 장갑 틈새로 흘러내린 진득한 피와 뇌수가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이, 하다못해 속이라도 깨끗하면 어디가 덧나나?
손을 가볍게 털어 낸 뒤, 총구를 돌려서 어설프게 엄폐한 놈들에게 최소 50cm 두께의 콘크리트 방벽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 주었다.
정말 즐겁고 보람찬 일이다,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