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북진기 (15)
이기열의 합류는 생각보다 빨랐다.
내가 지정한 랑데뷰 포인트에 직접 마중을 나간 것도 있었지만, 적의 본대가 강원도 남부 지역을 완전히 점거하기 전에 이기열이 앞만 보고 죽어라 남하한 덕도 컸다.
본래 이런 무식한 방법은 김호연이나 최묵호 정도나 쓸 법한데, 이기열은 자신도 당당한 북진 용사 중 한 명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쿨럭! 쿨럭! 흐으……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다, 승권 아쎄이!”
약 1년간 정신 병원에 갇혀 있었다더니 그새 체력이라도 줄어든 것일까, 이기열은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특유의 씹덕 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한겨울에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산을 넘어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 고생했다.”
녀석을 차에 태운 뒤 핫팩을 마구 터뜨려서 온기를 쬐어 주고, 이미 적 소탕이 끝난 영주로 되돌아왔다.
“김호연을 두고 나만 내려온 건 미안하다. 하지만 김호연은 민간인들을 꼭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묵호 아쎄이에게 반드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우리 사정 때문에 묵호 아쎄이를 혼자 내려보냈는데,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해서 헛되이 죽게 할 수 없었다.”
“이해해. 오히려 보호하던 민간인을 버려 두고 너희만 내려왔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흐흐, ‘무고한 민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까. 그렇지?”
“그렇지.”
추위에 식어 버린 몸을 핫팩으로 녹인 이기열은 추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덜덜 떨리는 것 같은 시선을 요리조리 굴렸다. 북진군 출신에게는 흔히 볼 수 있는 증상 중 하나였다.
어딜 가든 항상 눈이 빠르게 굴러가면서 주변을 살피는 강박증 비스름한 것. 이렇게 눈을 열심히 굴리지 않으면 북한군의 매복이나 부비 트랩을 사전에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쯤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주변의 안전은…… 이미 확보했겠지?”
“나 이승권이야. 깐깐함으로 따지면 주말마다 일광 건조랑 생활관 청소시키는 중대장보다 더하다고.”
“그건 그렇지.”
그제야 안심한 듯 이기열은 핫팩의 온기를 만끽하며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편히 누였다.
이기열이 부족한 장비로 혼자 평창에서 이곳까지 내려오기 위해 지난 며칠간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이 간다. 한겨울의 행군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학원 숙제 같은 것이었으니까.
“김호연은 평창의 한 산장에서 민간인들과 버티고 있다. 내가 빠져서 입이 줄어들었으니 며칠 더 버틸 수 있을 거다.”
“각성자는 1일 권장 섭취량이 높으니까. 호연이라면 분명 주변에서 산짐승을 사냥하거나 산나물을 채취해서 너흴 먹여 살렸겠지. 그런데 너희 셋 정도면 민간인들을 호위하면서 남부 지방으로 내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에 강원도 전역은 인간 사냥꾼과 야생 좀비들로 득시글거렸다. 게다가 겨울이 가까워지는데 생필품은 턱없이 부족해서 그 많은 민간인들을 데리고 남부 지방까지 내려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마 내려오는 도중에 반드시 인간 사냥꾼들에게 발각되었거나 좀비들의 습격을 받았겠지. 한 번에 많은 인원이 움직일수록 은밀성과 기동력은 확 떨어지니까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김호연, 최묵호, 이기열 조합이라면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 지형이라도 제집 안방처럼 자유롭게 활보할 능력이 있는데, 그런 놈들이 평창에 묶여 있기만 했다는 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으니까.
오히려 그들이 민간인들을 이끌고 평창의 깊은 산속에 있는 산장에 틀어박힌 덕분에 모두 안전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고 짐승이나 좀비 언저리에서 놀고 있는 이 끔찍한 시대에도 여전히 내 동기들은 ‘인간성’을 필사적으로 지켜 냈다는 어찌 기쁘지 않을까.
인간성은 우리를 북진군 출신에, 전쟁에 미친 정신병자들이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해 주는 ‘최후의 보루’다.
이 전쟁도 그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그보다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건 이제 좀 괜찮냐? 지금부터 가게 될 곳에는 내 동료들이 좀 많거든.”
“얼마나 많은데? 한 5명?”
“미친놈. 500명도 넘는다.”
“이런 씨발 인싸 새끼!”
이기열이 갑자기 내게 핫팩을 던지며 발작하는 이유는 별것 아니다. 전쟁 중에도 몰래 숨겨 온 라노벨을 틈틈이 읽어 댔던 놈이 어울릴 수 있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우리 소대 정도.
그래서 이 불쌍한 자발적 아싸 놈은 나의 인싸력 45만을 버티지 못하고 발광하고 있는 것이다.
“인마, 현실을 봐! 난 잘생겼고, 섹시하고, 매력적이고, 리더십 있고, 가진 것도 많잖아. 당연히 내 주변에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지. 난 그냥 태어날 때부터 호감형이었어! 오죽하면 우리 엄마도 틈만 나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말하셨겠냐고!”
“이런 쌍꾸릉내 나는 나르시스트 새끼! 넌 가짜다! 당장 이승권을 돌려줘!”
“이미 늦었죠? 내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죠? 이제 신나는 자기소개 시간이죠?”
“설마 장기 자랑을 시키진 않겠지?”
“전시잖아. 그건 평시가 되면 생각해 보자고.”
목적지에 도착한 내가 차에서 녀석을 끌어낸 뒤,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베이스캠프에 복귀했다.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묵호는 뒷덜미가 잡혀서 질질 끌려오는 이기열을 보고는 킬킬 웃으며 걸어 나왔다.
“이승권 사단 합류를 환영한다, 아쎄이. 안 그래도 너 같은 노예를 기다리고 있었지.”
내게서 이기열을 넘겨받은 최묵호는 녀석을 질질 끌어서 전술 지도 앞에 앉혀 놓았다.
이기열이 평창에서부터 죽어라 산을 넘어와 간신히 이곳까지 도달하느라 지쳐 있는 것은 이해하나, 전시 상황인 지금은 1분 1초가 아까웠다.
지휘 막사 안에 모여든 수많은 각성자 유격대원과 군인들은 우리의 새로운 노예가 어떤 말을 첫마디로 내뱉을지 숨죽인 채 기다렸다. 이런 과한 관심이 이기열에겐 엄청난 부담이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우선 코코아 한 잔부터. 내 머리는 정기적으로 당분을 공급해야 돌아가는 구식이라서.”
탁!
내가 인벤토리에서 따끈한 코코아 한 잔을 꺼내 녀석 앞에 내려놓자, 이기열은 코코아를 홀짝이며 전술 지도를 더듬더듬 손으로 가리켰다.
“강릉에서 출발한 놈들의 본대 규모는 못해도 2만 이상. 당연하지만 대한제국파 단일 규모는 아니고, 춘천에 본거지를 둔 새천년평화교와 속초에 본거지를 둔 헬조선 단원들이 이 병력의 7~80% 정도 차지하고 있다.”
“이 시기에 그만한 인원을 동원하는 게 가능한가? 놈들은 이미 선봉대와 지원 부대를 내려보냈다가 우리에게 된통 당해서 피해가 만만찮을 텐데.”
“이놈들은 좀비 사태 초기부터 강원도에 자리 잡아 수백만 민간인을 노예처럼 부려 먹고, 좀비 사육의 먹이로 던지며 속 편하게 성장한 놈들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키워 온 힘을 전력으로 투사할 곳이 없었는데, 이번 전쟁으로 몸을 풀 수 있게 되었으니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다.”
내 질문에 이기열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답하더니, 곧 전술 지도 위에 표적용 말을 하나씩 척척 올렸다. 우리가 기존에 태백 위에 올려 두었던 가상 표적 말을 제외하고도 2개가 더 추가되었다.
“우선 놈들은 머릿수도 많지만 그만큼 물자도 풍족하다. 놈들이 전면전을 피하지 않고 남하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째서 놈들의 물자 상황이 풍족한지는 앞서 설명했으니 넘어가고.”
놈들이 보유한 물자, 불법 무기, 각성자만 상점창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각종 아이템은 모두 무고한 민간인들의 핏값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포착한 놈들의 움직임은 정선군 방면에서 병력을 반으로 쪼개 각각 태백과 영월 방면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너희가 전술 지도에 표시해 둔 대로 울진이 모종의 이유로 진입 불가능한 지역이 돼 버렸으니 봉화와 영주를 통해 경북으로 진입하든가, 아니면 해당 지역에 자리 잡은 뒤 병력을 더욱 잘게 쪼개서 침투전을 벌일 가능성도 있다. 놈들은 그걸 가능케 할 장비와 병력이 있으니까.”
이기열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적들이 어떤 장비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그 구성은 어떤지 펜으로 세세하게 적어 나갔다.
“장갑차와 전술 차량, 수송 트럭, 바이크는 물론이고 대형 버스까지 죄다 동원해서 움직이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각성자의 스킬과 군사용 재밍 장치를 병행 활용한 광역 재밍 탓에 전자 장비로 기록할 수는 없었지만 잘못 보진 않았어.”
“아무리 각성자 군단이라고 해도 이 겨울에 강원도와 경북 지역을 도보로 이동할 생각은 안 했겠지. 우리도 병력을 전진 배치하기 위해 모든 운송 수단을 최대한 활용했으니까.”
“그러니까 이론상 길만 멀쩡하게 뚫려 있다면 놈들은 어떤 방향으로든 침투할 수 있다. 영월에서 제천, 충주 라인으로 빙 돌아서 내려가거나, 아니면 영월에서 단양, 문경 라인으로 확 치고 내려간다거나. 놈들의 최종 목표가 대구인 이상 어떤 식으로든 뚫고 내려갈 방법은 많아.”
“그럼 처음부터 병력을 경기도와 충북으로 돌려서 내려보냈으면…… 아, 그건 안 되겠네.”
“그래, 수도권을 포함해서 경기도 인근 지역은 좀비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내가 스킬로 무전을 도청한 바에 의하면 인간 사냥꾼들도 그쪽으로는 안 다닌다고 하더라고.”
이곳에 모인 각성자들 대부분은 수도권에서부터 대구까지 미친 듯이 도망쳐 내려온 아찔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기열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로 수도권을 포함해서 경기도 인근 지역은 좀비들에게 완전히 넘어간 듯했다.
바꿔 말하면 좀비들이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지역을 군대가 재빨리 관통해서 후방으로 침투하기만 하면 허를 찌른 기습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기열의 말마따나 놈들이 굳이 좀비들과 싸우지 않고 운송 수단을 총동원해서 고속 우회 기동 작전을 실행한다면, 확실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후방을 공격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2차 세계 대전 개전 초기 당시 철통같이 마지노선을 지키며 독일군을 막고자 했던 프랑스군을 약 올리듯, 독일군이 그대로 우회 기동해서 후방 침투에 성공한 것처럼.
만약 이기열이 제때 이 정보를 전달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엘랑 6주 컷을 21세기에 다시 한번 재현시킨 천하의 병신이 되었을 것이다.
설명을 듣자 하니 6주 컷까지 갈 것도 없어 보였다. 대구가 따이기까지 딱 6일 컷이면 충분해 보였다.
“우회 기동도 주의해야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주의해야 할 것들이 아직 더 남아 있다. 바로 놈들의 정예가 사용하는 온갖 불법 무기다.”
“그래봤자 보병 화기 수준 아닌가?”
“아니, 중화기는 물론이고 대전차, 대공 무기도 갖추고 있다. 자신들의 상대가 ‘정규군’이라는 것을 알고, 군대가 사용할 법한 무기와 장비를 상회하기 위해서 대한제국파가 아껴 두었던 물자를 대출혈 할인 서비스로 제공한 거다.”
“맞아. 얼마 전에 내가 정찰을 위해 내보냈던 UCAV도 놈들이 쏜 것으로 추정되는 맨패즈에 격추됐으니까. 설마 이런 시국에도 정규군을 제외하고 그런 무기를 사용하는 놈들이 있을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대한제국파는 더 이상 밀수도 못 하는 주제에 그런 것들을 어디서 구하는 거지?”
“놈들도 우리처럼 각성자니까 당연히 관련 직업으로 각성하고 사기적인 스킬을 얻은 놈이 있겠지”
해외에서 불법 무기와 마약을 밀수해 와 국내에서 팔고 그 이윤을 남겨 먹는 것으로 엄청난 자본을 쌓으며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인프라를 구축했다던 대한제국파.
그놈들이라면 분명 나처럼 거점이나 물자를 대량으로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사기적인 직업을 각성한 놈이 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정규군도 아닌 마당에 수만 명을 무장시킬 수 있을 만큼 물자가 쏟아져 나온다는 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
상점창은 시스템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이런저런 무기와 장비를 구입할 수는 있어도, 거기에 들어가는 DNA 샘플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아무리 많은 민간인과 좀비를 죽였다고 해도 계산이 안 맞는다.
“즉 우린 후방인 대구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고, 놈들은 강릉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군.”
“우리에게 대구는 돌아가야 할 집이자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안전지대이고, 놈들에게 강릉은 대한제국파의 우두머리(물주)가 자리 잡은 보급 기지 같은 개념인 거지.”
우리는 돌아갈 집을 겸하는 안전지대를 잃으면 사회 재건이라는 원대한 목표로부터 크게 멀어질 것이고, 놈들은 자신들의 원동력과 같은 피의 전투와 학살을 뒷받침해 줄 꾸준한 물자 보급이 없으면 사막에 버려진 인간처럼 말라 죽을 것이다.
이건 각자의 후방을 지키면서도 눈앞의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혀 확실히 죽여 버려야 하는, 우리가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머리 아픈 전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린 공격자 입장이라 우회 기동을 못 하지 않습니까? 놈들처럼 빙 돌아서 북상하자니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움직임이 무조건 포착될 겁니다. 이건 우리가 무조건 불리한 싸움이에요.”
잠자코 듣고 있던 한동석이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는 지형 특성상 절대 공격자가 쉽게 파고들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오히려 강원도에서 남하한 적들이 비교적 도로가 잘 깔린 충북과 경북 라인으로 파고들기 쉬운 상황인 데다, 해안 도로가 이어진 울진 방면은 좀비 떼로 막혔으니 그의 말도 맞았다.
하지만 그가 잊고 있는 게 하나 있었으니.
“우린 그냥 정면에서, 그리고 우회 기동하는 적들을 정직하게 때려 부수고 북상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적들이 원하는 양상 아닙니까?”
“그렇죠.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이미 한참 전에 우회 기동을 시작했으니까요.”
나는 전술 지도의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동해에 새로운 아군 말을 올려놓았다.
이미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은밀하게 창원에서 출항한 미 해군이 지금쯤 동해에 도착해 강릉을 목전에 두고 있을 터.
본래 그들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면 해안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포격 및 순항 미사일로 지원해 주며, 우리와 함께 강릉까지 북상해서 적들의 퇴로를 완전히 막고 강릉을 붕괴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많이 변했으니 이제 그들을 별동대처럼 활용해야 할 때가 왔다.
“남의 땅에 쳐들어가서 민주주의를 배달하는 건 미군의 전매특허니까 전적으로 믿어도 됩니다.”
설령 그들이 실패한다고 해도 내겐 제2, 제3의 카드가 더 준비되어 있다. 전쟁을 더 오래 지속하기 위한 더 많은 물자도.
원래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더 잘 먹고, 전쟁도 해 본 놈이 더 잘하는 법.
나는 전쟁이 애새끼들 소꿉장난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