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214)화 (214/227)

214화 북진기 (14)

대한제국파의 수장이자 죽음의 상인이라 불리며 동아시아의 전란을 다시금 불피우고자 했던 남자 한대상.

그의 측근이자 가장 충실한 오른팔인 황근철은 강릉을 떠나오기 전에 나눴던 대화를 조용히 곱씹었다.

-이 전쟁으로 우리가 얻게 될 것은 크게 셋이다. 첫째는 손님의 지위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서서히 기어오르기 시작하던 헬조선과 새천년평화교의 전력 약화, 둘째는 이번 전쟁을 통해 적 각성자를 죽이는 것으로 대한제국파 각성자들의 강화, 마지막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대구에 숨어 있는 수백만 개의 상품(인간) 확보. 이 세 가지 전제를 유념하고 전투에 임해야 최소한의 손해로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낼 수 있을 거다.

-예, 우리는 표면적으로 헬조선과 새천년평화교의 분쟁을 일시적으로 중재하고 보급을 담당하는 ‘갑’의 위치라는 사실에 기반해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물자는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 놈들이 무기와 탄약, 폭약, 식량을 원한다면 아낌없이 퍼 줘라. 대신 우리 조직원들은 전방으로 내세우지 말고, 전투에 참여하는 인원도 최소 비율로 맞춰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풍족한 물자 보급 상황만을 믿고 두 세력이 앞다퉈 최전선으로 나아갈 거다.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가도 저승길에는 무엇 하나 챙겨가지 못하겠지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구에서 최근 들어온 첩보에 의하면, 우리를 노리고 북상하는 적 병력도 그 규모와 정예함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사이비와 테러리스트 놈들이 합심하고 덤벼들어도 쉽게 승패를 쉬이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렇겠지. 놈들도 매일같이 밀려드는 좀비 웨이브에서 도시를 지켜 냈으니 각성자로서의 강함이나, 군인으로서의 강함이나 부족한 점을 찾기는 힘들 터. 하지만 그래 봤자 결국 이빨 빠진 호랑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 국경선을 철통같이 지키기 위해 국내의 거의 모든 최정예 병력을 이북 땅으로 올려 보냈다. 최신예 전차도, 장갑차도, 자주포도, 심지어 전투기와 헬기마저도 수도권 인근 군사 기지나 이북으로 옮겼지. 해군 전력은 그나마 제주도 해군 기지에 일부 남겨 둔 것 같지만 그것도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이북 땅에 올려 보낸 최정예 병력들마저 이 혼란한 시대에 삼켜져 파도 앞 모래성처럼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아. 그게 아니라면 벌써 이북 땅에서 뭐든 넘어와 국내 상황을 살폈을 테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강원도 위쪽으로 잠깐 올려 보냈던 우리 애들도 군인들이 급하게 버리고 떠난 군사 기지나 북한 주민 수용소를 발견한 게 전부였다고 했으니, 형님 말씀대로 이북 땅에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은 극히 적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다. 대구에는 우리의 ‘발판’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이제 슬슬 효율이 떨어지는 좀비 사육은 관두고, 우리가 대구를 기반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는 거다. 거기에 다른 방해꾼은 필요 없겠지.

-최전선에 사이비와 테러리스트 놈들을 앞세워 최대한 적을 약화시킨 뒤 우리가 막타를 쳐서 대구를 접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보겠습니다.

대한제국파가 더 이상 ‘조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한대상과의 독대를 끝맺고 나왔던 황근철은 마침내 강릉에서 수만에 달하는 본대 병력을 이끌고 움직였다.

적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훈련과 실전을 거듭해 나름 강인해진 군대라고는 하나, 한대상의 말대로 그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

대구를 오랫동안 감시해 왔던 자들의 첩보에 의하면 대구 군대는 전차가 없어 병력 수송용 장갑차나 전술 지휘 차량을 겨우 굴리는 수준이고, 그마저도 모든 병력을 수송할 여력이 되지 않아 기동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도시 외부에서 감시한 정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부 사정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매일같이 질리도록 좀비들만 상대해 왔으니 인간 사냥에 도가 튼 각성자들에 비하면 전투력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종종 도시 외부로 빠져나가는 이상한 외형의 기차를 여러 번 목격한 적 있다고 했었지. 대구 정도 되는 대도시라면 당연히 기차역과 선로가 멀쩡할 테니 기차를 굴릴 수야 있겠지만, 그게 이번 전쟁의 변수가 될 수도 있다.’

황근철은 이미 최전선에 내보낸 선봉대와 지원 부대가 적과 전초전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화력에 시달렸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다.

본래 험준한 태백산맥을 이용해 소수 정예의 선봉대를 여기저기 매복시키고 적들을 최대한 괴롭히면서 야금야금 전력을 갉아먹으려는 속셈이었는데, 적들은 오히려 초장부터 맹렬한 공격으로 순식간에 선봉대를 치워 내면서 전선을 앞당겼다.

‘첩보만으로는 알아내지 못한 변수가 개입한 게 틀림없다.’

어차피 자신이 이끄는 본대가 움직인 이상 적들이 가진 것 이상으로 막강한 화력을 퍼붓고 물량을 밀어 넣으면 어렵지 않게 이길 전쟁이긴 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최소한 대비는 해 둬야 한다. 그래서 혹시 몰라 정보 유출을 막을 겸, 적들의 통신 체계를 무력화하기 위해 광역 재밍까지 준비해 두지 않았나.

강원도 전체가 자신들의 영역이라고는 하나, 어디서 쥐새끼가 자신들을 감시하고 외부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우리가 움직이기도 전에 대구의 군대가 먼저 움직임을 보였으니 이쪽에도 감시의 눈이 붙어 있다고 봐야 한다.’

감시의 눈을 떼어 내지 못하고 본대를 움직이는 게 꺼림칙하기는 하나, 이미 전쟁이 벌어진 마당에 머뭇거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황근철은 지휘 차량을 겸하고 있는 장갑차 내부에서 부하에게 대뜸 물었다.

“그래서, 최전선에서 들어온 보고의 분석은 끝났나?”

“예, 놈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역시나 일반적인 군용 보병 화기 및 중화기에서 그쳤습니다. K-2, M16 소총을 사용하는 보병이 절대다수이며, 기관총과 박격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고속 유탄 발사기나 대전차 무기는 아예 사용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그 수가 매우 적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포병 전력은 오히려 이쪽보다 우세합니다.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인 선봉대와 지원 부대 대부분이 포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후방에 낡은 견인포(곡사포)와 포탄은 넉넉하게 남아 있을 테니 그걸 가져온 거겠지.”

2차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북한을 흡수 통일하면서 대한민국 남부 지방은 문자 그대로 진짜 후방이 되었다. 물자를 생산하고 신병을 훈련해서 위로 올려 보내는 역할이 전부인 후방으로.

이제는 줘도 쓰지 않을 낡은 견인포와 자주 박격포, 그리고 재고가 미치도록 남아도는 105mm, 155mm 포탄 정도는 저들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터.

원래 산이 많은 한반도에선 육군 중에서도 포병 전력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게 맞지만, 지금은 그것도 옛말일 뿐이다.

일반인보다 월등한 육체 능력과 직업에 걸맞은 스킬, 상점창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각종 아이템을 두루 활용할 수 있는 각성자 군단이라면 종심 돌파도 어렵지 않다.

필요하다면 부대를 여럿 나눈 다음 사방에서 적들을 에워싸듯 포위 섬멸할 수도 있다. 각성자에겐 그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있다.

“적의 포병 전력을 포함한다면 화력은 양측이 엇비슷한 수준입니다만, 대인 전투에선 저쪽이 살짝 우위를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군대의 특성상 효율적으로 적을 소탕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결국 자신들보다 상대적으로 머릿수가 적은 소수의 선봉대를 상대할 때나 먹힌 전술 아닌가? 태백에서 움직인 지원 부대가 기습을 당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그것도 적 포병에게 좌표를 먼저 따인 것이 컸고.”

“예, 적들은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며 이미 적잖은 화력을 소모한 바 있습니다. 이 겨울에 타 지역으로 대규모 원정까지 나오면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치곤 물자 소모가 너무 과합니다. 전초전에서 힘을 그렇게 뺐으니 우리 본대를 상대할 때는 오히려 뒷심이 부족해져서 제대로 싸우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분석관의 보고에 황근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구처럼 거대한 도시를 수 개월간 지킨 군대가 원정을 나온 만큼 철저하게 준비를 했겠지만, 그 전에 의무나 사명 같은 것에 사로잡혀 수백만 민간인들을 먹여 살리고자 불필요한 물자를 소모했을 게 뻔하다.

모든 물자를 온전히 전쟁에 투입해도 모자랄 판국에 민간인들까지 신경 쓰면서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으니, 그들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전초전을 치르며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이해가 된다.

이 이상 오랫동안 야전에서 버틸 능력이 없으니까 속전속결로 강릉을 무너뜨릴 속셈이었던 것이다.

‘최근 동해와 삼척시를 두들긴 의문의 포격도 자신들이 곧 경북을 넘어 강원도로 진격할 것이라고 페이크를 주기 위한 양동이었겠지.’

실제로는 경북을 넘어올 힘도 없으면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모양새를 보이며 이쪽을 위축시키고자 했던 얄팍한 술수에 불과하다.

황근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아 썩 만족스러웠다.

새천년평화교와 헬조선 병력을 우선적으로 내보내면서 그들의 전력에 큰 공백을 만든 것은 물론, 적들의 물자를 초장부터 과하게 소모시키면서 전쟁 지속 능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대로 본대가 적을 밀어붙이기만 하면 한대상이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올해가 가기 전에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새해를 맞이하는 것과 동시에 대한제국파가 선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개 범죄 조직에서 새롭게 건국될 국가의 수반으로 거듭나는 그 절절한 스토리는 자서전을 100권 시리즈로 써도 부족하리라.

벌써부터 이 전쟁의 결말이 보이는 듯해서 흐뭇해하고 있던 그에게, 이번에는 보고를 끝낸 분석관이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형님, 저희가 강릉에서 이렇게 많은 병력을 이끌고 나와도 괜찮은 겁니까?”

“무슨 의미냐?”

“그…… 사이비와 테러리스트 놈들이 강릉에 집결시킨 정예 병력까지 모조리 끌고 내려가는 건데, 그럼 강릉이 위험해질 수도 있잖습니까. 보스를 지키는 최정예 조직원분들이 남아 계신다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합니다.”

“난 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황근철은 부하의 걱정이 하등 쓸모없는 우려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저 나사 빠진 사이비 놈들이나 앞뒤 안 재고 일단 달려드는 전투광 테러리스트 놈들이 왜 형님 앞에서 고분고분했던 것 같냐?”

“그야…… 우리 대한제국파가 두 세력에 각종 무기와 물자를 대 주는 입장이고, 또 그만큼 강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야.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바로 형님이 우리 조직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우리 조직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형님의 능력이라고, 병신아. 너는 씨발 밀수 루트가 완전히 끊긴 마당에 대체 어디서 불법 무기와 물자가 나오는 것 같냐? 강릉에 세운 우리 조직 전용 건물은 일일이 손으로 세웠을까 봐? 우리 조직과 관련된 건 전부 형님을 통해서 나온다. 형님이 곧 대한제국파이고, 우리는 형님의 부속품에 불과해. 우리가 없어도 대한제국파는 잘 굴러가겠지만 형님이 안 계시면 대한제국파도 없는 거라고. 그런데 형님이 위험할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미 기반이 완성된 강릉에서 형님을 잡을 수 있는 놈들은 없어.”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잘해, 이 새끼야. 일만 잘하면 말단이든 뭐든 포상도 두둑이 내려 주시고 크게 간섭 안 하시니까 형님이 물렁해 보이지? 하지만 실제로는 전부 다 알고 계셔. 우리가 뭘 하는지, 조직 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전부. 그러니 너도 다른 머저리들처럼 대체되기 싫으면 알아서 잘하라고.”

“예!”

한대상 밑에서 일을 잘하면 그만큼 신임을 받고, 신임에 걸맞은 책임과 권력을 부여받는다. 또한 충성심은 그 과정에서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대상은 아랫것들을 과하게 쪼아 대지 않는다.

대신 행동 대장 같은 중간 관리자나 황근철을 포함한 측근들을 수시로 압박하면서 더 큰 성과와 절대적인 충성심을 원한다. 말단에 불과한 아랫것들은 백날 쪼아 봤자 효율이 크게 높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대상이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관대하다는 뜻은 아니니 처음부터 책잡히지 않도록 잘해야 한다.

적어도 밑바닥에서 시작해 한대상의 오른팔까지 아득바득 기어 올라간 끝에, 마침내 이번 전쟁의 총지휘를 맡게 된 황근철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일단 받은 것이 있다면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2인분을 할 자신이 없다면 적어도 1인분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 한대상의 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다.

‘나는 그 음침한 놈처럼 허무하게 죽진 않을 거다.”

암살에 능해 예전부터 한대상의 지시로 이런저런 타깃을 암살하고 다니며 큰 신임을 얻었던 대한제국파의 전속 히트맨.

그가 이번에 선봉대로 나서 1순위 타깃인 ‘이승권’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조직 내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보고에 의하면 시신이 잔혹하게 토막 난 것도 모자라 현대 미술처럼 기괴한 장식으로 만들어져, 무너진 베이스캠프 한복판에 전시되었다지.

일단 한 번 나섰다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데, 그놈은 실패했으니까 죽은 거다. 아마 성공적으로 살아서 도망쳐 왔다고 해도 암살에는 실패했으니 한대상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겠지.

그러니 자신도 성공해야 한다.

이 전쟁을 이기고, 대구라는 새로운 기반을 통째로 들어서 한대상의 발 앞에 갖다 바쳐야 더욱 많은 부귀영화와 생명 연장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걸 위해서라면 짐승보다 더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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