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북진기 (13)
“또야! 또 내 피 같은 UCAV가!”
내 UCAV는 날아다니기만 하면 방공망에 걸려 격추당하는 비운의 운명을 타고나기라도 한 걸까?
영주에서 전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한 내가 아침이 되었을 무렵, 다른 부대에서 들어온 정찰 지원 요청에 따라 봉화와 태백 인근 방면으로 UCAV를 띄웠는데 귀신같이 격추당했다.
미군이 내 UCAV를 격추할 때 사용했던 것과 비슷하게 맨패즈를 활용한 격추 시도가 있었고, 기만 체계 따위 없는 내 UCAV는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공중분해 돼 버렸다. 아까워 죽겠다.
인공위성 통제권(24시간)을 다시 구매하기에는 DNA 샘플 소모가 너무 심해서 하는 수 없이 UCAV를 띄웠던 건데, 그리 많은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잠깐이지만 고성능 정찰 카메라로 확인한 게 몇 가지 있었지.’
적의 본대를 직접 확인한 건 아니고, 딱 봐도 본대 소속일 것으로 추정되는 적 기계화 보병의 존재를 확인했다.
기계화 보병이라는 게 사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느낌이 강해서 대충 장갑차와 보병이 같이 다니기만 해도 기계화 보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내 기준에서 기계화 보병이란 대전차, 대공 능력을 두루 갖춘 지상 병력을 말한다.
상대는 이미 맨패즈로 대공 능력을 보여 주었으며, 우리처럼 어디서 주워 온 건지 모를 장갑차를 굴리고 있는 것도 확인했다. 그것도 단순 보병 수송용 구식 장갑차가 아니라 제대로 적을 조질 수 있는 기관포와 대전차 미사일을 탑재한 다목적 장갑차였다.
놈들이 어떻게 그런 물건을 손에 넣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 게 있다.
구 38선 경계 너머 이북 땅에 치안 강화 및 지역 안정화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가 강원도와 비교적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좀비 사태로 세상이 엉망이 된 마당에 저들끼리 강원도에서 지지고 볶고 있던 놈들이라면, 필시 가까운 이북 땅으로 넘어가서 혼란을 틈타 이것저것 훔쳐 왔을 것이다.
대한제국파가 아무리 불법 무기와 마약을 국내에 많이 들여왔다지만 장갑차 같은 군용 장비를 몰래 들여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저기 중남미의 카르텔 정도는 돼야 시도해 봄 직하다.
‘우리가 상대한 놈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정예군, 강력한 무기를 탑재한 다목적 장갑차, 헬기나 무인기에 대비한 휴대용 대공 미사일(맨패즈)까지 완비한 기계화 보병이라…….’
심지어 각성자라는 요소까지 추가하면 놈들에게 전차가 없다고 해도 결코 얕볼 수 없다.
적 정예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본대도 상당히 근접했다는 뜻이니, 머지않아 이 주변이 쑥대밭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정보가 더 필요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 정찰에 나서 볼까? 아니, 내가 직접 매복병을 급습하거나 저격수를 처리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위험한 일이다. 스릴에 미친놈도 아닌데 그런 도박을 남발할 수는 없지.
지금쯤 동해 어딘가에 떠 있을 미군을 이용해서 적들의 다른 거점을 타격하는 것으로 시선을 잠깐 돌려 놨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것 역시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 같다.
‘적 본대의 규모와 구성, 현재 위치, 각 부대의 진격로, 생각보다 모르는 게 많다. 그건 적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게 깜깜이 전투를 해도 된다는 건 아니야.’
전략 전술 같은 건 다 제쳐 두고 그냥 계획대로 진격해서 적을 만나면 쳐부수고, 적을 만나지 않으면 계속 진격하는 무식한 전쟁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우린 놈들을 확실하게 끝장내야 하고, 놈들도 우리를 확실히 처리한 다음 상대적으로 무방비해진 대구를 꿀꺽하고 싶을 테니까.
‘현대전은 중세의 전쟁과 달리 무작정 병력을 한곳에 집결시켜서 한꺼번에 움직이지 않는다. 적들도 생각이란 걸 한다면 저 정예 부대처럼 병력 규모를 최소 중대~대대 단위로 쪼갰을 거야.’
과거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옳았지만, 현대전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구조였다. 만약 적이 한 지역에 최소 수천~수만 단위의 병력을 모아 놨다고 생각해 보라. 대규모 포격이나 미사일 찜질 좀 해 주면 그거 다 죽는다.
그러니까 지금은 적 본대가 강원도와 경북의 경계 인근에 본격적으로 병력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아직 대대적인 공세가 들어오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반드시 맞붙게 될 폭풍전야.
반면 우리는 적의 선봉대는 전부 걷어 내고, 영주를 돕기 위해 태백에서 진출한 지원 병력도 뚝배기를 깨 버렸다.
다만 적 본대와 달리 우리 본대는 병력 전개에 조금 늦고 있다. 이건 지리적 구조상 우리가 먼저 움직였음에도 적들보다 늦을 수밖에 없는지라 감내해야 했다.
-저와 채성아 씨가 이끄는 전투 부대가 1시간 안으로 집결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기다리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휴식 시간이 끝난 야전 부대에서 주변 아군은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고, 나는 무전기를 든 채 지도를 살폈다.
마지막까지 후방에 남아 본대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던 김진경과 채성아가 올라온다면 봉화와 영주 인근에 병력을 전개할 것이다. 이는 사전에 신해룡 육참총장과 작계를 짜면서 논의한 내용이기도 했다.
만약 우리가 움직인다면 적들도 무조건 움직일 것이고, 지리적 이점(가까운 거리)을 가지고 있는 적들은 우리보다 빠르게 강원도와 경북 경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이유를 들어 울진(지금은 불가피하게 울진을 점거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봉화, 영주를 먼저 걷어 내서 세 방면으로 적들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 세 곳이 아니면 달리 적을 맞이할 곳도, 또 우리가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원주가 제4의 진격로 후보로 꼽히기는 했지만, 그곳으로 빙 돌아서 병력을 밀어 올리자니 리스크가 너무 커서 바로 폐기했다.
인간끼리 죽어라 싸우는 와중에도 간간이 좀비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상황인데, 좀비 사태 초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수도권과 경기도 인근의 원주시로 병력을 올리자? 좀비 떼에게 병력을 산 제물로 바치는 꼴이다.
대구에서 매일같이 대규모 좀비 웨이브를 막을 수 있었던 건 방어자 입장이었기 때문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연약한 인간을 보호해 줄 방벽이나 건물이 적은 야전에서 머릿수가 10배, 100배 이상 차이 나는 좀비 떼와 맞닥뜨리면 아무리 강한 각성자 군대라고 해도 쌈 싸 먹힐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면, 앞서 말한 세 지역이 결국 이 전쟁의 핵심 그 자체. 심플하게 밀리면 불리하고, 밀어내면 유리한 고지전의 양상이다.
여기서 1차로 적들을 밀어내야 2차로 영월, 태백, 삼척을 빠르게 관통하여 최종적으로 놈들의 본거지인 강릉을 전방위로 조질 수 있다. 평창에 갇혀 있을 김호연과 이기열을 구하는 건 덤이고.
‘병력 전개는 저쪽이 우리보다 더 빠를 수밖에 없으니, 이번에는 반대로 우리가 시간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다.’
정찰을 위한 시간 벌이, 혹은 병력 전개를 위한 시간 벌이.
다만 현실적으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건 힘든 만큼, 과감하게 어느 한쪽을 포기하고 다른 한쪽을 확실하게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작전 지도 옆에 올려 둔 최묵호의 군용 무전기가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를 토해 내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적은 희생을 감수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을 것이다.
-치직, 치지직…… 훅훅! 현재 강원도와 경북 경계 어딘가에 있을 지각 용사 묵호 아쎄이는 응답하라. 반복한다. 현재 강원도와…….
“우리 여기에 있다고 아주 동네방에 다 떠들어라, 이 새끼야!”
테이블에서 낚아채듯 무전기를 가져간 최묵호가 즉시 응답했다.
하지만 상대인 이기열도 만만찮은 기열찐빠였기 때문에 최묵호의 꾸짖음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넘겼다.
이기열은 내 동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철면피 라노벨 씹덕이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담대한 정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전투는 이승권처럼, 일상은 이기열처럼 보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아무튼.
구미에서 우연찮게 라디오를 통해 이기열의 생존 사실을 확인했던 이후, 꽤나 오랜만에 듣는 녀석의 목소리였다. 특히 이런 상황이라면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안 그래도 너랑 연락하려고 주기적으로 무전을 보냈었는데, 왜 연락이 안 됐었던 거냐?”
-빨갱이 스-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릉 주변을 뒤덮을 만큼 광역 재밍을 시전했다. 아마 자신들의 출병 사실을 외부에 흘러 나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연락할 수 있는 건데?”
-김호연에게 북진성채를 맡겨 두고 내가 직접 영월까지 내려왔다. 적들이 펼친 광역 재밍의 범위가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선까지 이동한 끝에 겨우 북진 용사 전용 채널로 연락을 취한 거다.
“……호연이한테 다 맡겨 두고 너까지 내려왔다고? 괜찮은 거냐?”
-괜찮지 않은 상황을 해결해야 하니까 내가 움직인 거다. 다행히 강릉에서 출발한 적의 대규모 병력은 아직 이 지역에 완전히 전개하지 못했으니 정보를 전달할 시간은 충분하겠지.
최묵호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무전기에 대고 응답했다.
“지금 네가 정보를 전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배신인가, 묵호 아쎄이!
“그런 거 아니야, 미친놈아. 듣고 놀라지나 마라. 지금 내 옆에 개또라이 있다.”
-거기에 개또라이승권이 있다고?!
내 이름은 이승권이지 개또라이승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시 최묵호의 손에서 무전기를 낚아챘다.
그리고 단전에서부터 긁어모은 기합과 거친 호흡을 담아서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새끼, 기열!”
-악! 실례지만 이 무전기 너머에서 대답하시는 분이 정말로 북진 용사의 에이스이자 살아 있는 긴빠이의 달인이며, 3분 컵라면을 기합만으로 30초 만에 끓여 먹을 수 있는 오도짜세 이승권 병장님이 맞으신지 의구심에 관하여 질의가 생긴 것에 대하여 이를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아니한다면 궁금증을 가질 것을 확인받아도 될지 검증하는 것을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새끼…… 허가한다!”
-으음! 무전기 너머로도 똑똑히 전해지는 목소리의 바이브레이션, 특유의 지랄맞은 말투, 기상나팔보다 더 불쾌한 쌍기역(ㄲ) 악센트, 틀림없는 이승권이군!
나는 슬쩍 최묵호를 바라보며 왜 주먹으로 이놈을 다스리지 않았는지 물었다.
주먹과 발은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치료 효과를 볼 수 없었다는 그의 항변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확실히 이기열은 주먹과 발로 다스리기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했으니까 만나면 몽둥이찜질을 해 줘야겠군.’
한 두어 시간 패다 보면 다시 옛날의 이기열로 돌아오겠지. 난 우리 북진 용사들 믿어.
“잡담은 이쯤 하고, 너랑 호연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다시금 확인하니 안심이 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우리가 최묵호의 정보를 토대로 강원도에 자리 잡은 쓰레기들을 처리하기 위해 군을 대거 움직인 상황이야. 그러니까…….”
-전장 정보가 필요하겠지?
“……그래. 우린 현재 영주와 봉화 인근에서 임시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적의 정예와 언제 어떻게 싸울지 논의하고 있어. 적보다는 느리지만 우리 측 정예도 머지않아 이 근방에 병력을 전개할 예정이야. 다만 계절과 주변 지형 때문에 섣불리 산에 병력을 배치할 수는 없으니, 싸우기 적합한 지형을 선점해야 해. 아마 빠르면 내일 새벽, 늦어도 모레 안으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데, 평창에서부터 다 보고 내려온 너라면 아는 게 많겠지?”
-놈들의 병력 구성과 규모, 주요 진격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디쯤에 놈들이 자리 잡았는지도 전부 기록했지.
역시 그 지옥 같던 5년의 경험이 어디 가질 않는다니까.
고작 북진군 출신 세 명이 민간인 피난민들을 지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강원도에서 제 세상이 온 것처럼 미쳐 날뛰고 있던 놈들의 위협을 사전에 눈치채고 정보를 꾸준히 수집해 왔다.
심지어 놈들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 같으니 새로운 정보를 동료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목숨 걸고 직접 내려오기까지 했다. 내 동기지만 존경스럽다.
핵심적인 정보가 없으면 엉덩이 무거운 군대는 잘 움직이지도 않고, 설령 군대가 움직였다고 해도 정보 없이 싸우면 패배할 위험이 있다는 걸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 근방에도 놈들의 광역 재밍이 전개될 거다. 그렇게 되면 원거리 통신으로 정보를 전달해 주기 어려우니 내가 직접 합류해서 정보를 공유하겠다.
“좋아, 랑데뷰 포인트 찍어 줄게.”
이제 스타팅 북진 몬스터를 두 마리 모았으니 나머지 한 마리만 더 모으면 나도 북진 마스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