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북진기 (12)
해가 떠오르면서 빛이 세상을 향해 내달리고, 그에 따라 어둠이 소리 소문 없이 물러난다.
지독한 추위와 적막감으로 뒤덮인 겨울의 수많은 밤들 중 하나가 끝났을 때 지상에 남겨진 것은 평범한 시체의 산이었다.
총탄에 사지가 찢겨 나간 시체,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져서 육편과 뇌수를 흩뿌린 시체, 고통과 공포를 잊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나 목덜미에 불법 마약을 꽂아 넣던 자세 그대로 사망한 시체 등등.
전쟁 중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전투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이런 허무한 결과만이 남는다.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개발하는 것으로 문명을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악의와 무자비한 폭력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전쟁이니까.
“이, 이럴 수는 없다…….”
그리고 힘의 논리에서 패배한 이들은 대부분 정형화된 반응을 보이곤 한다.
“이럴 수는 없다고……!”
진호만도 역사가 증명하는 정형화된 패배자들 중 한 명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시간 전에 자신만만하게 병력을 소집해 태백에서 진출한 그는 목숨까지 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윗분들에게 댈 최소한의 변명거리가 필요해서 사소한 승리 포인트가 하나 필요했을 뿐이다.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 먹고 포인트를 적립하는 것처럼.
이만한 병력을 동원하면 연이은 전투로 크게 지쳐 있을 적 선봉대쯤은 손쉽게 꺾을 수 있겠다 싶었고, 협력 관계인 새천년평화교에서도 그의 계획에 동조하여 별도의 수를 준비해 영주에 투입시키겠다는 확답까지 받은 상태였다.
남은 건 쇼핑하듯 적들의 모가지를 적당히 수확한 다음 다시 태백으로 복귀하여 본대와 합류하면 그만.
군사 작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이 특수 피크닉 작전은 지난밤까지만 해도 스무스하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매복을 당해 뼈아픈 손실을 입기 전까지는.
‘그래, 거기서부터 문제였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그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그게 스노우볼이 되었던 거야.’
제대로 작전도 구상하지 않고, 지휘도 형편없었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기보다는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기습을 가한 적들이 문제였다고 생각하는 그의 태도는 놀랄 만큼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진 괜찮았다.
실제로 피해를 입은 병력은 잘 쳐줘도 1개 중대 규모였으니까. 사상자를 후방으로 돌리고 빠르게 재정비를 끝내면 다시 진격할 수 있었다.
그가 회의실에서 부하들에게 윽박질렀던 대로, 새천년평화교와 헬조선, 대한제국파가 한데 뭉친 이상 힘 싸움에서 꿇릴 것이 없었으니까.
병력도, 무장도, 실전 경험도, 심지어 각성자의 수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정면에서 제대로 붙기만 한다면 결국 압도적인 머릿수로 밀어붙일 수 있는 자신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원래 믿음이란 것이 이토록 쉽게 사람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이었나?
진호만은 자신을 포함해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서,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의 산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신들도 적들의 후속 공격에 대비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첫 기습을 당한 직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만큼 더욱 철저하게 대비했고, 실제로 후속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다들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왜 결과가 이 모양이지?’
자신이 부하들에게 ‘왜 패배했느냐’고 윽박질렀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이렇다 할만한 대답을 낼 수는 없었다. 진호만 본인도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니까.
주변 지형이 대규모 전투를 벌이기에 매우 부적합했다든가, 야간 전투는 원래 선공을 허용한 쪽이 불리하다든가, 각 세력 간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든가, 처음부터 적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든가 하는 것은 전부 변명에 불과하다.
정작 그 사소한 변명거리가 필요해서 이렇게 귀찮음을 무릅쓰고 진출했던 것인데, 이제는 또 다른 변명거리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진호만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이를 악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들이 도망쳐 나온 도축장에서 지금도 간간이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필시 시체의 산속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군을 적들이 하나하나 찾아내 확인 사살 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직도 간밤에 치른 혼돈의 야간 전투를 떠올리면 간담이 서늘해지고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이렇게 살아나온 것이 기적이라고 느낄 만큼.
매복에 당한 직후 재정비를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적 부대가 자신들을 공격할 때만 해도 승산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각성자들의 스킬과 아이템이 엄청나게 소모되었지만 그만큼 빠르게 적들을 도륙할 수 있었고, 야밤에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는 아군의 것이 아니라 적군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주변을 둘러봤을 때 남은 것은 매섭게 역공을 가하는 아군이 아니라, 산처럼 쌓인 아군의 시체였다.
마치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자신이 이끌던 지원 부대는 비명횡사를 하고 만 것이다.
‘설마 적 선봉대의 허를 찌르려다 되레 이쪽이 허를 찔릴 줄이야.’
적들이 단기간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과 화력은 강원도 경계에서 바로 진출한 자신들보다 뒤처질 것이라고 오판한 탓이다.
……쐐애애애애액!
“음?”
이 실패를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애초에 만회할 기회나 있을지 걱정하고 있던 그때.
진호만의 귓가를 때리는 낯선 소음에 그는 시선을 조급 위쪽으로 돌렸다.
저 멀리,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유유히 날아오고 있는 커다란 점이 보인다. 단순 크기만 놓고 보면 헬기보다는 작고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장난감 드론보다는 훨씬 커 보였다.
무심코 망원경을 들어 확인해 보니, 군용 무인 정찰기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이 주변을 탐색하듯 활공하면서 지상을 훑고 있었다.
저런 물건에는 거의 반드시 하부에 고성능 카메라가 탑재되어 있으니 자신의 위치도 진즉에 발각되었으리라.
이미 전투가 끝난 마당에 악착같이 무인 정찰기까지 보내서 추적케 하는 적들의 집요함에 진호만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크고 작은 산이 많으니 작정하고 숨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여기서 더 밍기적거리면 머지않아 적 지상 병력의 추적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아니, 이미 늦었다.
어서 도망치자고 소리치는 주변 아군과 달리, 길가에 멍하니 서 있던 진호만은 문득 자신들이 향하고 있던 방향에서 하늘을 가로지르며 빠르게 날아가는 투사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빠르게 날아간 투사체는 곧 무인 정찰기에 적중해 화려한 폭발을 일으켰다.
헬조선 소속인 그는 갑작스럽게 하늘을 가로지른 그 투사체가 뭔지 알고 있었다. 현대 민간 무장 세력(테러리스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맨패즈……?”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무장세력이 매우 싼값에 적 공중 자산을 격추시킬 때 사용하는 보병 휴대용 대공 미사일.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지금 그런 걸 운용하는 세력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이것저것 많이 들여온 대한제국파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대가 도착했다!’
일그러져 있던 패배자의 얼굴이 다시금 환희로 물들었다.
* * *
“통신 상태는 좀 어때? 묵호한테 놈들이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서둘러 알려야 하는데.”
“저 간악무도한 놈들이 재밍을 하고 있다. 군사 장비와 스킬을 모두 활용한 광범위 재밍이라 방법이 없다.”
김호연의 질문에 이기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평창에 위치한 북진 성채에 머무르고 있는 두 사람은 점점 상황이 좋지 않은 쪽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인지한 지 오래였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겨울이 기어코 강원도 산골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펑펑 쏟아져 내리는 새하얀 똥 덩어리는 식량 수급과 정보 수집마저 힘들게 했다.
책임감 있는 최묵호라면 반드시 남부 지방에서 지원을 끌고 강원도로 올라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지원이 도달하기 전에 이곳에 고립된 이들이 다 같이 얼어 죽을 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신들만 살겠다며 보호 중인 민간인들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쳐 내려가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군인이기 이전에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기껏 우리를 돕기 위해 북상하고 있을 묵호가 되레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아.’
최근에 강릉에서 집결하기 시작한 대규모 병력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포착했다.
놈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동 수단을 사용해서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을 이동시켰다.
전원 각성자로 구성된 병력의 머릿수가 가볍게 1만을 넘었으니, 어지간한 군대를 데려다 놔도 그들에게 쉽게 대적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세상에는 알고도 못 막는 공격이라는 게 있는데, 놈들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하물며 최묵호가 이끌고 올라올 지원 병력이 아무것도 모른 채 놈들을 맞이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도 없을 터.
김호연은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장 밖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통신병인 이기열이라면 어떻게든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적들이 작정하고 군사 장비와 각성자의 스킬까지 동원해 가며 재밍을 하고 있는 탓에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간 참이다.
이제 남은 건 적들보다 먼저 자신들이 내려가서 직접 정보를 전달하든가, 아니면 이대로 산장에 처박혀 음울한 미래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움직이면 이곳에 남게 될 민간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겠지.’
아무리 김호연이라고 해도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이곳으로 복귀할 때까지 최소 3일 이상은 걸릴 텐데, 이미 겨울의 추위와 부족한 생필품으로 쇠약해진 민간인들이 각성자의 도움 없이 3일 이상 버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기열도 반쯤 보살핌을 받는 입장이었으니 민간인을 돌보는 데 큰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김호연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하고 있으려니, 대뜸 자리에서 일어난 이기열이 자신의 방한 용구를 주섬주섬 챙겨 입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적들의 간계(재밍)가 우리 북진 용사들의 전우회 커뮤니티(통신)를 방해하고 있으니 내가 직접 움직여야지.”
“그 몸으로?”
그 몸으로, 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기열에 한해서는 ‘그 정신머리로?’라는 의미로 통한다.
북진 용사들의 육체는 고작 1~2년 사용감 없는 새 것 같은 중고 상태를 유지해도 쉬이 쇠약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기열의 정신이 살짝 불안정해서 혼자 보내기 불안할 뿐.
하지만 이기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눈빛으로 자신의 장비를 챙기며 굳은 의지를 표명했다.
“묵호 아쎄이가 예정된 일정보다 늦는 이유는, 저 사악한 빨갱이 스-껌에 의해 북진 용사들 간에 연결된 신성한 칼라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타락하지 않으려면 다시 칼라를 연결해야 한다.”
“……괜찮겠어?”
“정신 병원이나 한겨울 산장에 갇히는 것보단 낫지.’
통신병인 그가 직접 움직여야 적들의 재밍 범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최묵호에게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을 테니, 결과적으로 틀린 선택은 아니다.
“따끈따끈한 신삥 아쎄이들과 함께 돌아오겠다.”
그렇게 말한 이기열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장 밖으로 나섰다.
온통 새하얀 세상이 머지않아 붉은 피로 물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겨울은 지독하겠어.”
북진군 출신 동기들이 북한 땅에서 겨울을 맞이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떠들어 댔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