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209)화 (209/227)

209화 북진기 (9)

당연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출중한 각성자 4명이 작정하고 달려들었다고 한들, 선봉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의 대병력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아직 영역 지정 스킬 쿨타임이 돌고 있었고, 다수의 적들을 상대로 목숨 걸고 근접 전투를 해야 하는 진가희와 최묵호의 신체적, 정신적 부담은 말할 것도 없다.

조금 거리를 둔 채 원거리에서 탄환만 퍼붓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건 적들도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목적과 규모를 들킨 시점에서 소규모 게릴라를 계속 고집했다간 되레 큰코다칠 우려가 있다.

여러 조건과 현실적인 이유를 토대로 종합적인 판단을 내린 결과, 나는 적 지원 병력의 발목을 봉화 인근에 붙들어 둔 것으로 만족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게릴라전은 마치 주식과 같다.

무릎에서 사고 어깨에서 팔아야 한다.

적들에게 예상치 못한 기습을 퍼붓고 혼돈과 공포를 안겨 준 뒤, 적당한 시점에서 유유히 모습을 감추는 것. 이게 게릴라의 진짜 무서운 점이다.

괜히 욕심부려 봤자 첫 기습만큼의 효율을 끌어내긴 어렵다는 뜻이다.

“이만큼 피해를 입혔으니 적들도 경북과 강원의 지랄맞은 환경에 좀 더 움츠러들겠지.”

타타타타타! 퍼억! 퍽! 피이이이이잉!

투캉! 투캉! 투캉!

슬슬 아수라장을 수습하고 이쪽을 향해 총탄을 퍼붓기 시작하는 놈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대구경 탄환을 전부 퍼부어 준 뒤, 나는 미련 없이 장비를 수거해서 매복지를 벗어났다.

내가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산기슭 곳곳에 박격포탄과 유탄이 날아드는 걸 보니 적들도 상당히 빡쳤던 모양이다. 역시 욕심 안 부리길 잘했다.

‘적어도 1개 중대 규모의 피해를 입혔다. 이 정도면 고작 4명이 움직인 결과로는 최고야.’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가 만들어 낸 사상자는 못해도 200명은 된다.

확실하게 사망에 이른 놈들은 수십 명에 그치겠지만, 크고 작은 부상자를 100명 이상 만들어 냈으니 적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힌 것이다.

태백에서 남하한 적 지원 병력의 대략적인 규모는 대대급으로 추정되는 만큼, 1개 중대 규모의 피해가 전투 불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애매한 피해 규모가 놈들의 상처 입은 발목을 조금 더 처지게 만들 것이다. 차라리 전투 불능 판정을 받고 후퇴해야 할 상황이라면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지만, 애매하게 피해를 입은 탓에 어떻게든 재정비를 하고 진격해야 하니까.

태백에서 자신만만하게 남하한 주제에 고작 넷에게 발목이 붙들려 기동력을 크게 상실한 저것들은 이제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울진을 점거하기도 전에 좀비 웨이브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아직 분노를 완전 연소 하지 못한 해안 도로 선봉대와 포항 선행 부대가 곧 봉화로 치고 들어와서 우리 대신 저들을 상대할 것이다.

울진을 가득 메운 좀비들은 그 자체로 이미 거대한 바리케이드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냥 건드리지 말고 빙 돌아서 태백으로 곧장 치고 올라가자는 쪽으로 이미 얘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한편, 안동에서 한참 전에 전초 기지 구축을 끝낸 선행 부대는 이미 선봉대와 함께 영주로 진입해서 신나게 고립된 적들을 갈아먹고 있을 터.

우리는 이대로 그쪽과 합류해서 잔당을 소탕하고, 영월과 평창으로 쭉쭉 밀고 올라가면 된다. 물론 태백을 압박하는 것도 돕고.

어차피 속도를 내기엔 겨울이라는 계절과 산악 지대라는 지랄맞은 환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조바심 낼 것 없이 다른 부대와 발을 맞춰 가면서 진격하는 게 더 낫다.

보급이 형편없고 군의 사기까지 바닥이라면 공격자 입장인 우리는 경북의 경계를 넘을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나 이승권이 존재하는 한 아군의 보급과 사기가 바닥을 칠 가능성은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기서 발목 잡힌 적들도 이제 충분히 경계하기 시작했을 테니 한 번 더 양동으로 흔들어 줘야겠지.’

매복에 당한 탓에 일시적이긴 해도 기동력을 상실한 놈들이 뜬금없이 적들에게 후방을 공격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된 이상 곧바로 진격해야 할지, 되돌아가서 후방을 지켜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현 위치를 사수하면서 적의 북상을 저지할지. 순식간에 선택지가 늘어나면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압박감을 받을 것이다.

진격, 후퇴, 사수,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를 알 수 없지만, 선택을 잘못한다면 전멸이라는 결과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뽑아낼 수 있는 악질적인 로또.

‘놈들이 머리통 싸쥐고 고통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즐겁군.’

선택을 하지 않아도 좆되고, 선택을 함부로 해도 좆되는 상황을 강제로 들이밀면서 서서히 고통받게 하다가 최후의 희망마저 꺾어 버리는 것.

나 이승권은 오직 이것을 위해 북진을 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현재 포병 전력은 영주를 신나게 두들기고 있을 테니 당장 그쪽의 지원을 받기는 어렵다. 대신 지금쯤이면 동해 앞바다에 떠 있을 미 해군에 연락을 넣었다. 적들도 바다 위의 적은 절대로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일할 시간이다, 양키!

* * *

“00:02시에 입전한 이승권 각성자 대표의 요청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지 시각 기준 일출 직전인 00:06시에 삼척시와 동해시의 해안가 구역, 첨부한 좌표를 향해 포격을 가해 달라. 해당 지역에는 더 이상 무고한 민간인과 아군, 중립 세력이 일체 존재하지 않음. 단 필요 이상의 과한 포격을 할 필요는 없음.’이라고 합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함장님?”

에빈 부함장의 보고에 잭 함장은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대구와 창원, 김해 생존자 집단이 이번 전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지는 2주 가까이 되었지만, 막상 미 해군은 지금까지 이렇다 할 만한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창원에서 괜히 국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에 트집을 잡힐까 봐 은밀하게 준비해서 빠져나오느라 시간을 잡아먹기도 했고, 막상 창원을 빠져나온 뒤에는 해안선을 따라 동해로 북상한 게 전부였으니까.

포항 인근을 지나칠 즈음에는 적들에게 포착되지 않기 위해 해안가와 조금 거리를 두고 움직였지만, 애초에 기본적인 육지 정찰도 시행하지 않고 동해로 팍팍 올라온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이건 그들이 결코 게으르거나 아군에게 비협조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며칠 전부터 적과 맞붙기 시작한 생존자 집단 연합군(지상군)이 생각보다 훨씬 잘 싸워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군 소속도 아니고 일시적 동맹 상태에 지나지 않는 미군을 거의 한 식구처럼 여기며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빠짐없이 전장 정보를 공유해 주었다.

그래서 굳이 육지에 헬기나 고속정 정찰을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바다 위만 둥둥 떠다니는 건 그들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미 좀비 사태가 발발한 지 2개월 넘게 바다를 떠다닌 아픈 기억이 있기도 했고.

그런 와중에 지원 요청이 들어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다른 건 몰라도 그 북진군 출신에게 잔뜩 받은 게 있는데 사람이 염치가 없지 않고서야 모른 체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현재 우리가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본함의 함대지 능력을 총동원하면 5인치(127mm) 함포와 순항 미사일을 충분히 퍼부어 작은 지방 도시 하나는 어렵지 않게 산산조각 낼 수 있습니다.”

“포탄이나 탄약은 추후 그 친구가 관리하는 군수 공장에서 생산하는 대로 추가로 보급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미사일 종류는 보급받기 힘들 테니 가급적 아껴 두라고 했었지.”

포탄과 탄약은 서구권과 동구권에 따라 각기 다른 나라의 군대에서 사용해도 호환이 잘 되게끔 표준으로 맞춰 놓은 것들이 많지만, 별도의 라이센스 생산 경험이나 기술 이전이 선행되지 않은 특수한 무기들은 타국에서 보급받을 수 없다.

드론, 미사일, 어뢰 등이 주로 이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저쪽에서 먼저 화력을 아껴 달라고 요구한 걸 보니 적의 본거지와 가까운 동해와 삼척을 본격적으로 타격해서 지역을 완전히 파괴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적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양동으로 보이는군. 일전에 울진 근처 해안 도로에서 진격이 돈좌되었다던 공격 부대가 최근 진격로를 봉화로 수정했다고 하던데, 아마 양동에 크게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적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타격할 상황을 만들고 싶은 모양이야.”

“그럼 순항 미사일은 몇 발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함포 사격을 적당히 퍼부으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적들은 해군이나 공군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테니 방공망이고 뭐고 없을 겁니다. 적들의 본거지인 강릉이라면 군사 기지가 있으니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래, 일단은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잭 함장은 내심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다.

알레이 버크급 이지스 구축함은 타 강대국 군함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우수한 방공, 대함, 대잠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함대지 능력만큼은 다소 빈약한 함포와 순항 미사일에만 의존해야 하는 게 단점이었다.

물론 작정하고 보유 중인 순항 미사일을 미친 듯이 퍼부으면 어지간한 폭격 지원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실적을 낼 수는 있다. 에빈 부함장의 말마따나 단 1척만으로 방공망이 없는 작은 지방 도시 정도는 박살 낼 수 있다.

실제로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미군은 순항 미사일만 죽어라 퍼부어서 이라크의 모든 방공망과 주요 거점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화려한 전적도 있지 않나.

하지만 독자적인 모델의 미사일은 현지 보급을 받을 수 없는 이상,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급적 아껴야 한다는 게 중론이었다.

아직 제주도를 점거한 채 조용히 발톱을 갈고 있는 중국군도 있고, 자신들이 헐레벌떡 도망쳐 나온 한반도 북부와 인접 국경지대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 국내 치안 안정화 및 무너진 인프라와 사회 재건이라는 대의명분에 의해 내전까지 발발했으니,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수틀리면 핵 버튼을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잭 함장도 순항 미사일을 최후의 카드처럼 아껴 둘 필요가 있다.

“동이 트는군.”

육지로부터 족히 수십 km는 떨어져 있는 동해에 있다 보니 동이 트는 것을 조금 더 빨리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몇 안 되는 바다 사나이들의 낭만 중 하나임을 알지만, 실상은 그저 태양을 등지고 포탄과 미사일을 투사하기 딱 좋은 시간대일 뿐이다.

이미 함교 내부는 물론이고 함 내 인원 모두가 전투 배치에 들어갔다.

사골처럼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을 우려먹기 좋아하는 미국 정부 덕분에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함포는 능히 40km 너머의 적도 타격할 수 있고, 좌표만 땄다면 순항 미사일을 날려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사실 말이 좋아 미사일이지, 그냥 중거리 탄도탄 수준의 높은 항속 거리를 자랑하는 초고속 자폭 드론이나 다름없으니 함대지 능력만큼은 믿을 만하다.

타국의 내부 사정에 타국 군대가 끼는 것만큼 꼴사나운 짓도 없지만, 어쩌겠나 세상은 이미 B급 영화처럼 비현실과 초자연이 넘쳐나게 됐는데.

이러다 정말 쫄쫄이에 망토를 걸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정신병자들까지 등장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다.

물론 그런 어처구니없는 걱정도 사격 통제관을 거쳐 올라온 사격 최종 허가에 대한 답변과 함께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지만.

VLS(Vertical Launching System)를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미국의 자랑스러운 도끼(토마호크)가 이윽고 지정된 좌표를 향해 거의 수평에 가까운 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아무튼 세상은 여전히 혼돈과 파괴 속에서 새로운 질서와 체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법칙의 당위성을 오직 총성과 포성만으로 알려야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낄 뿐.

고요한 바다 위에서 터져 나온 포성을 육지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듣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세계는 듣고 있었다.

이런 시대가 되어도 전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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