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207)화 (207/227)

207화 북진기 (7)

“난 순애 지지파인데, 남의 애인 뺏는 게 이렇게 흥분될 줄이야. 페티쉬계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 가는 기분이군.”

묵직하고 매끄러운 흑철빛 총신에 코를 박고 스윽 훑어 올리자 비릿하면서도 화끈한 화약과 기름 냄새가 내 전두엽을 자극했다. 전두엽이 맞나?

아무튼 그 지랄맞고 염병할 저격수를 처형해서 갈취한 이 대물 저격총은 마땅히 나 전쟁 군주 이승권의 새로운 애인이 될 자격이 있었다.

고구려 수박도에는 총과 군인은 한 몸이라는 조상님들의 얼과 지혜가 담긴 로맨스 서사시가 그려져 있었으니, 비록 러시아제 저격총이긴 해도 한국인의 손에 들렸다면 한국제나 다름없다.

“그건 그렇고, 인연에도 없던 매복을 하려니 좀이 쑤시네.”

경상도와 강원도의 연합 세력 간 전초전이 시작된 지 정확히 35시간 하고도 26분 35초가 경과한 지금, 나는 1차적으로 전장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 끝에 ‘매복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참이다.

왜 급하게 치고 올라가도 시원찮을 판국에 뜬금없이 매복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생각이다.

-우리도 이미 한 차례 매복을 당했는데, 당연히 당한 만큼 되갚아 줘야 하니까.

뭐, 사실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가 매복에 당한 건 맞지만 예상했던 것만큼 피해가 크지도 않았고, 오히려 적들을 압도해서 싹 쓸어 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장의 상황은 우리가 꿈꾸고 있는 밝은 미래처럼 전망이 좋은 것은 아니었는데, 우선 첫 번째로 울진을 통한 해안 도로 공격로가 갑작스러운 좀비 웨이브로 인해 돈좌되었다.

포항에서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고 올라가던 선봉대와 그 뒤를 따르던 선행 부대는 갑자기 인근 지역에 통제를 걸고 무한 PK를 시전하는 좀비 대군의 등장에 일시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군부대가 가지는 화력은 어지간한 수의 좀비 떼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쓸어버릴 수 있으나, 울진을 비롯한 인근 산과 도로를 마구 점거한 좀비 떼는 ‘어지간한 수’가 아니었다.

해당 지역 일대에 포탄을 최소 수백에서 수천 발 이상 때려 박지 않는 한, 알보병만으로 구성된 부대를 밀어 넣는 건 명백한 자살 행위였다.

현장에 있는 군인들도 이미 대구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대규모 좀비 웨이브를 겪어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정도 분간은 할 줄 알았다. 분간 못 한 놈들은 진즉에 다 뒈졌으니까.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그 좀비들은 어그로를 끌지 않는 한 울진 인근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놈들이 어떤 개수작으로 발생시킨 인공적인 좀비 웨이브라 그런 건지, 아니면 변종이나 특수 개체가 끼어 있지 않은 일반 좀비들뿐이라 그런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울진에서 발생한 좀비 웨이브는 놈들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어할 수 있었다면 진즉에 좀비들을 이동시켜 우리 부대를 공격하게 했거나, 좀비들이 좀 더 넓은 지역을 점령하도록 전술적인 움직임을 취했겠지.

‘역시 좀비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아니야.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그런 개사기 스킬이 튀어나올 리가 만무하지.’

퇴역병의 거점 지정 스킬은 그럼 개사기 스킬이 아니냐고? 뭐, 어쩔 건가. 퇴역병은 불쌍하니까 시스템이 선심 쓰듯 조금 더 얹어 줬나 보지.

“아오, 더럽게 춥네. 우리 그냥 불 피우면 안 돼요?”

“또 미필 티를 내는구나, 가희 아쎄이. 매복의 기본은 기도비닉 유지와 불빛을 흘리지 않는 거란다. 적들도 하는 걸 우리가 안 하면 어떻게 되겠니?”

“우린 각성자니까 괜찮잖아요.”

“적들도 각성자야.”

“아, 맞다.”

‘아, 맞다.’ 이 지랄.

순간적으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진가희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손목 스냅 45도의 황금 각도를 유지해서 시원하게 갈겨 주고 싶었다.

라떼는 말이야, 근무 중에 이런 찐빠를 내면 바로 동기들이 꼽을 주곤 했어. 심지어 사소한 찐빠 하나로 족히 일주일을 우려먹으면서 다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친절하게 일깨워 주었지.

물론 이승권의 매콤 쌉싸름 주먹을 맛본 동기들은 더 이상 내게 꼽을 주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좀비들이 점령한 울진을 섣불리 공격할 수 없고, 봉화에서 더 북진하기엔 영주에 남아 있는 적들이 거슬리기 때문에 숨 막히는 전초전의 1라운드를 조기 종료 하기로 했다.

적들은 지금쯤 우리가 영주에 남아 있는 잔당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열심히 병력을 움직이고 있을 거라 생각할 텐데,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뒤에서 포격 지원을 해 준 선행 부대를 안동으로 보내는 한편, 우리는 안동으로 가는 척하면서 봉화의 서쪽 길목에 매복했다.

그냥 빠르게 선행 부대와 합류하여 영주를 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내가 상점창에서 구입한 24시간짜리 위성 통제권을 이용해서 적들의 움직임을 확인한 결과, 소름 돋게도 우리의 뒤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즉 우리가 진짜 작정하고 영주를 치기 위해 우르르 몰려가면, 놈들도 즉시 우리 꽁무니에 병력을 붙일 터.

그래서 역발상에 이은 역발상, 상대가 한 수를 앞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두 수를 앞서 나가는 방법으로 역매복을 택했다.

물론 상대가 확실히 속아 넘어가야 매복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기에, 선봉대와 선행 부대를 진짜 합류시켜서 영주로 보냈다. 그럼 영주에 남아 있는 적들은 우리 부대의 규모를 확인하고서 미친 듯이 헬프를 치겠지.

-적들이 지금 여기에 다 몰려와 있으니까 빨리 옆구리든 뒷구멍이든 후려갈겨서 우리 좀 구해 줘!

그럼 태백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적들은 얼씨구나 좋다, 우리의 예상대로구나! 하면서 헐레벌떡 움직일 것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움직임이 인공위성으로 전부 감시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근데 우리가 매복한다고 해서 제대로 먹히겠어요? 적 규모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천 명 단위일 텐데.”

“저격수 한 명이 대대 단위 병력을 붙들어 두는 경우도 있어.”

내 새로운 애인과 함께라면 그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지.

내가 묵직한 대물 저격총에 코를 박고 죽을 기세로 쓰다듬고 있으려니, 진가희가 살짝 질린 기색으로 나를 흘겨보면서 혀를 찼다.

아니, 자기도 검을 애인처럼 애지중지 여기면서, 정성껏 손질해 주고 가끔 혼잣말도 중얼거리면서 왜 나한테만 그런 시선을 보내는 거지? 이게 좀비 아포칼립스판 남녀 차별인가?

“제 말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적들에게 줄 수 있는 피해 규모가 너무 적지 않겠냐는 뜻이에요. 많이 썰어 봤자 수십 명이 한계인데. 게다가 적들도 그냥 당해 주지는 않을걸요. 저라고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은 다 못 피해요.”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 못 피하면 칼로 쳐 내야지.”

“아, 그런 사람들 꼭 있죠, 진짜 실력 있는 검객은 칼 한 자루로 날아오는 총탄을 베어야 한다고. 예전에 우리 도장에 웬 이상한 사람들이 단체로 찾아와서 다짜고짜 진검을 배울 수 있냐고 하길래 그건 오랫동안 수련하고 정식 면허를 가진 사람들만 가능하다고 했더니, 도장은 그런 거 가르쳐 주는 곳 아니냐면서 막 따지더라고요. 알고 보니 무슨 이상한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이 검으로 총탄을 베는 걸 보고 자기들도 해 보고 싶어서 단체로 찾아온 거였어요. 픽션이랑 현실도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었던 거죠. 실제로는 총성을 듣기도 전에 사람 몸에 구멍이 뚫리는데.”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게 있는…….”

“물론 전 가능하지만요.”

“…….”

뭐지? 자기 과시?

“아까 픽션이랑 현실은 구분해야 한다며.”

“픽션의 어중이떠중이 검객보다 현실의 제가 더 강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실제로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게 더 짜증 난다.

각성자는 좀비를 죽이면 경험치와 DNA 샘플, 또는 매우 낮은 확률로 추가 특전 스킬이나 아이템을 얻는 것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구는 좀비 한 마리씩 썰어서 성장하고, 누구는 각성자를 한 명씩 썰어서 성장한다면 그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이 전쟁을 통해 운 좋게 총으로 상대를 죽인 군인 각성자들은 꽤 짭짤한 경험치와 DNA 샘플, 그리고 상대의 시체를 직접 파밍해서 아이템까지 얻었을 것이다.

전장에서 잘 쳐줘도 몇 명 죽이는 게 고작인 군인들에 비해, 한 명당 최소 적 모가지 수십을 따는 강자들은 어떨까. 그들은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운 대신 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 내고 있다.

만약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대학교에서 평범하게 청춘을 즐기고 있었을 진가희가, 근접전 한정으로 목숨 걸고 덤벼든다면 내 사지 일부를 앗아 갈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물론 이런 강자들조차 내 성장 속도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내가 순수하게 신체 능력만이 아닌, 각성자로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아이템을 사용한다면 내 손으로 도륙 내지 못할 상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 내 레벨은 40에서 42로 껑충 뛰어올랐으니까.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 업이 더 힘들다는 걸 감안해 보면 괄목할 만한 성장 속도였다.

진가희와 내가 적들이 그랬던 것처럼 눈 덮인 산기슭에서 비트를 파고 숨어든 지는 30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솔직히 나도 이 엄동설한에 몇 시간씩이고 비트에 숨어 있기는 싫었다.

요컨대 내 예상이 맞는다면 슬슬 때가 무르익었으니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반대편 매복지에 있는 한동석과 최묵호 팀이 무전을 쳤다.

-저 멀리 접근 중인 다수의 헤드라이트 불빛 보입니까? 적 차량 행렬입니다.

“이야, 저 미친놈들 기어이 그 험준한 길로 병력을 이동시키네.”

경북과 강원도를 잇는 유일한 일반 지방도인 청옥로는, 석개재라는 고개를 넘어야 하는 만큼 코스가 지랄맞기로 유명하다.

소규모 부대인 선봉대나, 태백산맥에 매복을 위해 움직인 게릴라 부대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할 수 있겠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군부대가 이용하기엔 좀 많이 하드한 구간이다.

솔직히 16시간 전쯤에 인공위성으로 놈들의 움직임을 대충 확인하면서도 ‘에이,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어?’ 하고 있었는데, 막상 진짜 하는 걸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말 여간 기합인 게 아니다.

-그런데 놈들의 움직임이 꽤나 빠른 것 같은데, 우리 측 아군이 영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난 놈들이 어째서 이 야밤에 저렇게 다급하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다.

놈들이 반드시 이 길을 이용하기 전에 들러야 하는 전초 기지를 개판으로 만들어 둔 것도 모자라 저격수까지 멋진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으로 만들어 뒀기 때문이겠지.

천하의 나쁜 놈들이라도 자기들이 뭔 짓을 했든, 일단 동료가 당하면 분노 게이지부터 상승시키고 본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뻔뻔하고 양심 없는 놈들이 더 크게 날뛰고, 더 크게 목청껏 울부짖는 법이다. 오죽하면 한국이 괜히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나라로 유명하겠나.

“영주에 과할 정도로 병력을 집중시켰으니, 놈들 입장에선 얼른 우리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겠죠. 그래서 선행 정찰도 보내지 않고 저렇게 막무가내로 병력을 이송시키는 겁니다.”

-보통 전쟁이 터지면 주요 도로에 지뢰나 매복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저 새끼들 중에 실제로 전쟁을 겪어 본 사람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을걸요.”

반전 운동을 펼치던 정신 나간 사이비 광신도 집단, 그냥 사회와 정부, 시스템 그 자체가 싫어서 민족 반역자로 등극한 테러리스트 집단, 그리고 전쟁의 여파로 흘러들어 온 불법 무기와 마약을 열심히 팔아 재낀 그냥 범죄자 집단.

쓰레기 매립지에서도 안 받아 줄 오물 덩어리 집단에 명예로운 북진군 출신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 치안 유지 및 형식적인 전방 근무를 위해 전쟁에 발만 살짝 담갔던 어중이떠중이 몇 명이라면 저들과 함께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은 전쟁에서 당연히 알아야 할 상식을 모른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얻은 신묘한 힘과 권력에 취해서 약자들을 핍박하고 싶을 뿐인 버러지들에게 그런 법칙과 상식이 다 무슨 소용이겠나.

그러니까……

“모르면 죽어야지.”

나는 진가희를 시켜 아스팔트 도로를 별 모양으로 예쁘게 잘라서 일부를 들어낸 다음 그 아래에 가득 심어 두었던 폭탄을 원격으로 폭파시켰다.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는 경북과 강원도의 경계에 위치한 한 야밤의 도로에서 화려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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