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206)화 (206/227)

206화 북진기 (6)

“이런 개새끼들이!”

쾅!

헬조선에서 태백시의 현장 지휘관으로 파견된 진호만 돌격대장이 회의용 테이블을 주먹 한 방으로 쪼개 버렸다.

지역 하나를 다스리는 지부장에 비하면 계급이 낮지만, 전투 시에는 현장 지휘권을 가지게 되는 돌격대장 특성상 조직 내에서 그의 위치는 결코 낮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에 적극적으로 기용되는 인재들은 대개 최상급자들에게 잘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사실상 계급이나 다름없는 ‘위치’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밉보이면 끝장난다는 걸 모를 만큼 머릿속이 꽃밭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공을 세워야 하건만, 정작 들려온 소식이라곤 경북권으로 침투한 선봉대의 씁쓸한 패배라니.

이번 전쟁에서 자신들에게 불법 무기와 마약을 팔며 꺼드럭대는 대한제국파의 밑에 들어간 데다, 꼴도 보기 싫은 사이비 광신도들도 손을 잡으면서까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고자 했다. 그 굴복과 순응의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 개새끼들아! 대한제국파에서 지원해 준 대량의 물자와 장비, 사이비 광신도들을 통해 확보한 사냥개용 좀비 떼, 그리고 대인 전투라면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우리의 강인한 정신력과 풍부한 경험까지! 갖출 건 전부 갖췄는데 왜 시작부터 꼴사납게 패배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입이 있으면 설명을 좀 해 보라고!”

회의실에 모인 이들 중 진호만의 일갈에 선뜻 나설 수 있는 자들은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그들도 진호만만큼이나 어째서 아군 선봉대가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패배했는지 알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으니까.

적들이 아군의 예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수준의 병력과 화력으로 무식하게 밀어붙인 것도 아니다. 이번 전초전은 강원도의 3세력 연맹과 경상도의 생존자 연합이 서로 선봉대만 투입시켰으니까.

양측 본대는 아직 본격적으로 전장에 나서지도 않았을뿐더러 이제 막 몸을 풀고 있는데, 꼴사납게 전초전에서 패배한 것도 모자라 사실 적 본대에게 당한 거라며 거짓말까지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진호만은 더욱 열불이 뻗치는 것이고, 아랫것들은 변명이 더욱 궁색해질 뿐이었다.

“선봉대장이 벌써 둘이나 죽었어! 경북권으로 침투시킨 3개의 선봉대 중 2개는 적들에게 완전히 분쇄되었고!”

적들이 대구와 포항을 벗어나 조금씩 북상하면서 전초 기지를 구축하고, 체계적인 보급과 통신망을 놓는 것으로 전쟁 수행 능력을 보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전해 들은 바 있다.

3세력 연맹 역시 당연히 적들의 전초 기지 구축을 가만 내버려 둘 수 없었으므로, 우선 선봉대를 경북권에 침투시켜서 적들의 북상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한편, 강원도와 경북 경계 인근에 전초 기지를 구축했다.

각각 영주, 봉화, 울진에 파견된 3개의 선봉대는 본래의 의도대로였다면 못해도 적들의 발목을 1~2주는 붙들고 있어야 했다. 아니, 혹독한 한파가 찾아오는 겨울과 태백산맥이라는 최고의 환경을 이용한다면 한 달 이상도 가능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그 잘난 게릴라전은 다 어떻게 된 거야! 태백산맥에 작정하고 숨어든 우리 애들이라면 적들이 찾아내기는커녕 꽁무니만 쫓다가 된통 당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심지어 효율적인 게릴라전을 위해 그 사이비 새끼들에게서 사냥개용 좀비 떼와 그걸 부르는 변종 좀비까지 지원받았는데…… 그걸 홀라당 까먹었다고!”

콰직! 콰직!

회의실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도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진호만은 자신이 쪼개 버린 테이블을 발로 콱콱 짓밟으면서 부하들을 압박했다.

선봉대는 애초에 소규모로 구성된 부대인 만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쟁에서 큰 활약을 기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선봉대에게도 엄연히 역할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대계가 흐트러지는 것도 당연했다.

바둑에서도 고작 한 수를 잘못 둔 것만으로도 승패가 결정되는 마당에, 양 세력의 머릿수를 모두 포함하면 족히 10만이 넘는 인간들이 서로의 허를 찌르기 위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

거기서 시작부터 봉화와 울진의 선봉대를 허무하게 잃어버린 3세력 연맹은 ‘전세가 기울 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뼈아픈 실책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대장님, 그래도 울진은 아직 적들이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틈에 우리가 병력을 재투입한다면, 이미 전투로 크게 지쳐 있을 놈들의 선봉대를 역으로 꺾어 버리고 다시 주춤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울진의 선봉대는 이미 궤멸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아직 적들이 확보하지 못한 거지?”

“울진이 적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그…… 선봉대에 소속된 사이비 광신도 사제 한 명이 ‘평화의 대가’라는 스킬을 시전했다고 합니다.”

“미친.”

한 부하가 평화의 대가라는 스킬을 거론하자 진호만은 표정을 싹 바꾸었다.

과거 사이비 광신도들과 헬조선이 서로 치고받던 시절, 놈들은 자신들이 밀릴 것 같다 싶으면 사제 계급에 속한 인원 중 누군가가 직접 스스로를 제물 삼아 ‘평화의 대가’라는 스킬을 시전하곤 했다.

멀쩡한 각성자 한 명이 제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 시전하는 만큼, 그 스킬의 효과는 매우 심플하면서도 강력했다.

스킬을 시전한 지역 일대에 좀비 어그로를 엄청나게 끌어올려서 해당 지역을 좀비로 들끓게 만드는 것이다.

좀비로 들끓게 된 해당 지역은 인간끼리 싸울 수 없게 되니 확실히 일시적이지만 평화가 찾아오기는 했고, 그 대가로 사제 계급의 각성자 한 명이 죽는 것이니 매우 직관적인 스킬이었던 셈.

동해의 해안 도로를 따라 빠르게 북상하는 적들이 울진을 집어삼킬 것 같으니 냅다 자신을 희생시킨 것도 놀랍고, 그걸 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이비 광신도 놈들은 더더욱 놀라웠다.

헬조선 단원들이 제대로 싸우지 못해 자신들의 소중한 동료가 희생했으니, 그 대가를 지불하라고 득달같이 따지고 들 줄 알았더니만, 지금까지도 다른 지휘 본부(새천년평화교) 측에선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그 사이비 놈들이 제어할 수 있는 좀비는 스킬에 의해 매우 섬세하게 조정된 소수 개체들뿐이기에 어그로가 끌려서 몰려든 야생 좀비 무리는 저쪽에서도 어떻게 해 줄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적들이 그 지역을 점거할 수 없도록 자연 방벽 역할을 해 주고 있으니 우린 그걸 이용하면 됩니다.”

“적들이 어그로에 끌려 몰려든 좀비들을 처리하느라 병력과 물자를 더욱 낭비하는 동안 재정비를 해서 약해진 놈들을 역으로 공격하자? 나쁘지 않군. 비록 우리가 먼저 선봉대를 잃긴 했지만, 적 선봉대도 꺾을 수 있다면 공으로 과를 덮을 수 있겠지.”

물론 이 일을 두고 나중에 사이비 광신도들이 이권(대가)을 요구한다면 얘기가 좀 복잡해지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전쟁 중 아닌가. 전쟁 중일 때는 군인(전투원)에게 잘못을 묻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그럼 울진은 당장 적들에게 넘어갈 일은 없을 테니 일단 넘어가고, 영주와 봉화는 어쩔 거지? 선봉대 2개가 분쇄당하면서 영주에 남겨진 마지막 선봉대가 고립될 위험에 처했다. 이미 지원 요청이 들어온 참이야.”

“적들이 울진에선 일시적으로 가로막혔으나 봉화는 확실히 꺾었으니, 아마 골치 아픈 울진의 좀비 떼를 먼저 처리하기보단 영주에 남아 있는 우리 선봉대를 먼저 걷어 내려고 할 겁니다. 막말로 야생 좀비들은 어그로만 끌지 않는다면 그냥 주변을 배회할 뿐인 멍청한 괴물들 아닙니까. 놈들의 상위 형태인 변종이나 특수 개체가 상당히 위험해서 다들 섣불리 건드리지 않을 뿐입니다. 놈들도 그걸 모를 리 없을 테니 당연히 봉화와 안동을 통해 영주를 우선적으로 압박하려 들겠지요. 우린 놈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진호만이 분을 참지 못해 박살 내 버린 테이블에서 전술 지도를 주워 든 부하가 화이트보드에 자석으로 고정시키고, 적들의 예상 진격로를 표시했다.

“지금 놈들은 아주 급합니다. 전초전에서 먼저 승리를 쟁취했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지요. 울진에서는 진격이 가로막혔고, 영주에는 아직 우리 측 선봉대가 버티고 있습니다. 적들 입장에선 당연히 우리가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 생각할 테니 그 전에 서둘러 영주를 확보하고, 울진의 좀비 떼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미 격한 전투를 치른 아군에게 휴식을 취할 기회도 없이 또 한 번 무리한 작전을 강요할 텐데, 그때 우리가 놈들의 측후방을 타격하면 놈들이 제대로 대응이나 하겠습니까?”

“알면서도 못 막는다 이거군.”

“적 선봉대가 우리 선봉대를 꺾은 건…… 몹시 유감스럽지만, 적 선봉대가 더 강했다는 증거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축적된 피로, 소모된 화력이 분명 존재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반적인 선봉대 규모 이상의 병력과 화력을 동원하고, 적 선봉대를 걷어 내면서 시간을 벌면 됩니다. 거리상 우리 쪽 본대가 무조건 적 본대보다 먼저 강원도와 경북 경계에 도달할 테니, 적 본대보다 우리가 먼저 선공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선공권을 가져온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심지어 그것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과 화력을 보유한 본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먼저 자리 잡았고 먼저 봤으니 먼저 쏜다.

이 심플한 삼단 논법에 의해 결국 적들이 심대한 타격을 입으면서 전세는 크게 기울 것이다.

딱딱하고 숨 막히던 회의실 내부 공기는 어느샌가 편히 숨 쉴 수 있을 만큼 풀어졌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진호만도 부하가 제시한 이 전쟁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마음에 들었다.

복잡하게 작전을 새로 구상할 필요도 없고, 자신들에게 허용된 범위 내에서 병력을 운용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결과에 따라 본대의 위세를 등에 업기만 하면 된다.

완벽하게 전초전을 마무리 짓지 못한 상대가 선택의 딜레마에 빠져서 조급하게 움직이는 틈을 타 허를 찌른다. 성공하면 크게 갚아 주는 것이고,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다고 해도 적들을 주춤거리게 할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봉화와 울진 선봉대처럼 자신들마저 어이없게 전멸당하지만 않는다면, 적 본대보다 무조건 먼저 도착하게 될 아군 본대가 적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각성자 비율 100%의 만 명 단위 전투 집단이 가지는 위용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각 부대에 전투태세를 하달한다. 놈들은 이미 봉화를 끝장내고 그곳에서 관심을 거둬들인 것과 동시에 영주로 진격하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소수의 선봉대로 거점을 오랫동안 장악할 수는 없을 테니 거점 장악보다는 거점 파괴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을 터. 이번엔 우리가 봉화로 진출해서 놈들의 측후방을 타격한다.”

“울진에서 진격이 가로막힌 놈들의 또 다른 병력이 우리의 뒤를 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사이비 광신도 놈들에게 연락해. 지역 일대에 좀비를 더 끌어들여서 아예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라고. 며칠 안에 우리 측 본대가 도착하면 그때 다 보상받을 테니 거절하지는 않겠지.”

게다가 강원도와 경북 사이의 경계는 태백산맥 때문에 산세가 매우 험준하고 도로 상황도 영 좋지 않다. 작정하고 도로 몇 개만 틀어막아도 이 한겨울에 산으로 이동해야 할 텐데, 적들이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제 살을 깎아 먹는다면 진호만 입장에선 오히려 땡큐였다.

‘놈들이 우리 측 선봉대를 꺾은 건 계산 밖이었지만, 그건 그대로 되갚아 주면 된다. 이 전쟁의 향방은 결국 매우 강력한 힘에 의해 결정된다. 우린 그 전까지 최대한 적들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시간을 끌면 돼.’

전초 기지를 살리면서 홈그라운드 이점도 그대로 유지하고, 적들이 아군 본대와 싸우기도 전에 과하게 병력과 화력을 소모하게끔 유도한다면 그 공이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다.

전쟁의 일등 공신까지는 아니지만 대충 이등 공신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이런 피곤하기만 한 돌격대장 감투 대신 어디 지역 하나 맡아서 다스리는 지부장 자리를 요구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진호만은 우선 엉망진창이 된 울진을 뒤로한 채 봉화로 진격하여 영주를 지원하고, 적들의 선봉을 돈좌시키는 것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봉화의 파괴된 아군 베이스캠프에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식된 대한제국파 수장의 측근 중 한 명인 암살자의 말로를 보기 전까지는, 그래도 자신들이 아직 유리하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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