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204)화 (204/227)

204화 북진기 (4)

모든 생명체에게는 때가 되면 반드시 죽음이 찾아온다.

하지만 전쟁은 각자가 가진 수명을 누구보다 먼저 끊어 내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과도 같았다. 탈락자들은 여지없이 지면에 얼굴을 처박고, 승리자들은 그저 조금 더 늦춰졌을 뿐인 죽음에 감사하며 또 하루를 버틴다.

“저 개새끼들 다 쏴 죽여!”

“좆이나 까잡숴라, 염병할 새끼들아!”

타타타타타! 투카카! 카카카카!

본격적으로 경상도 생존자 집단의 선봉대와 강원도 범죄자 집단의 선봉대가 교전에 돌입하자 순식간에 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작 1초 남짓한 시간에 쌍방을 오가는 탄환이 못해도 수천발은 넘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수한 탄환들 중 인간의 생살과 뼈를 찢는 것은 한 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여기저기서 까무러치는 비명과 최후의 숨소리가 끊이질 않고 터져 나왔다.

대구에서 이번 전쟁을 위해 임시 예편하여 최전방으로 지원 보낸 보병 대대 예하 소총 중대 소속의 어느 평범한 각성 군인은 쉴 새 없이 탄을 퍼부었다.

강릉에서 이번 전쟁을 위해 역겨운 사이비와 꼴같잖은 테러리스트들과 붙여 주며 파견을 보낸 대한제국파 소속 각성 범죄자도 쉴 새 없이 탄을 퍼부었다.

무슨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도 아니고, 각자의 이념과 생존 본능(살인 충동)에 따라 지역 경계에 모여든 생존자들이 벌이는 살육전은 좀처럼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치명적인 기갑 장비(전차, 화력 지원용 장갑차)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양 세력의 부대 구성이 좀 더 다양했다면 이 지역 일대는 잠깐의 충돌만으로도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1소대는 내 뒤를 따른다! 지금부터 저 뒷골목에서 빌어먹던 부모 홀수 새끼들 오늘 울진 앞바다에 싸그리 입수시킨다!!”

“뭐, 좋은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중사님?!”

“아주 좋은 계획 있지! 내 버프 스킬로 고속 이동해서 우회한 다음 저 새끼들 엉덩이에 불주사 놔주기!”

기존의 전쟁이었다면 당장 눈앞의 중사를 때려눕혀서 후방 정신 병원으로 이송시켜야 했겠지만, 각성자들로 구성된 군부대 내에선 스킬과 아이템의 적극적인 활용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 증거로 교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전장을 가로지르는 건 비단 총탄만이 아니었다.

“적 박격포 운용 병력 확인!”

“방벽 펼쳐!”

“방벽전개!”

“방벽 스킬 보유자들은 모두 방벽을 전개해라! 포탄 새면 다 뒤지는 거야!”

몇몇 각성자들이 머리 위로 쏟아질 박격포탄을 막기 위해 방벽 스킬을 펼치거나, 꽤나 비싼 값 주고 구입해야 하는 아이템을 사용했다.

이것이 전황을 순식간에 유리한 쪽으로 이끌 만큼 가성비가 좋지는 않지만, 목숨 보험이 조금 늘어난 것만으로도 교전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황비룡 중사가 진군의 나팔이라는 버프 스킬을 사용하자, 곧 1소대원들 모두 RPG 게임처럼 신체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주요 격전지인 해안 도로를 순식간에 벗어나, 도로 옆 야트막한 산을 단숨에 주파해 적들의 옆구리를 칠 수 있을 만큼 우월한 기동력을 선사해 주었다.

교전이 시작된 이 일대에선 이미 탁 트인 개활지든 시야 확보가 어려운 숲이든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으나, 고작 그 정도에 겁먹고 후퇴하기엔 양측 세력 모두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타카카카카!

“끄으으…… 아아아!”

“커헉!”

“매복! 매복이다!”

“사이비 빨갱이 양아치 새끼들 아니랄까 봐! 응전해!”

지금 강원도를 끝장내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구도 타 도시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는 정신 교육 자료가 이미 대구 전역에 퍼졌다.

이승권이라는 각성자 대표가 여과 없이 풀어 버린 끔찍한 진실 속에서 정당하게 분노할 이유를 찾아낸 군인들은 사사롭게 제 목숨, 명예롭게는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사람 잡아먹는 저 짐승 미만 병신 새끼들한테 지지 마라! 쏴!”

“재장전!”

“재장전할 때는 자세 낮추라고, 이 새끼야!”

“각성했다고 무적인 것 같아?! 너도나도 총 한 방씩 맞으면 그냥 뒈지는 거야!”

매복과 기습이 특기인 헬조선 테러리스트들은 교묘하게 주변 환경에 맞게 위장하여 1소대의 우회 기동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

반면 우회 기동이 중간에 막힌 1소대장 황 중사는 이를 바드득 갈며 자세를 낮춘 채 경기관총의 탄띠를 교체했다.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부대 화력이나 전투원 개개인의 능력이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서로 무조건 뚫는 창과 무조건 막는 방패가 되어 엎치락뒤치락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다.

황 중사는 ‘진군의 나팔’ 버프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적들의 차단을 뿌리치고 우회하고 싶었다. 소대 단위의 우회 기동은 대규모 교전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수는 없으나, 전장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충분했으니까.

“사상자 보고!”

“경상 셋, 중상 하나, 전사 하나입니다!”

“쯧, 회복 스킬이나 아이템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응급 처치 하고, 의무병은 중상자 봐주고 있어. 전사자는 무전으로 위치 알려 주고 후방 회수조에게 맡긴다.”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황 중사는 연막 너머로 제압 사격을 퍼붓고 있는 놈들을 향해 가감 없이 호전성을 드러냈다.

“지금 저 새끼들 못 끊어먹으면 여기서 낮이고 밤이고 총질만 해야 할 판이다. 다들 이 엄동설한에 참호 없는 참호전 하고 싶나?!”

“아닙니다!”

“그럼 움직여!”

그 말과 함께 전방에 연막탄을 내던진 황 중사는 연막이 자욱하게 퍼지는 것을 확인한 직후, 경기관총을 난사해 소음 어그로를 끌었다.

순식간에 전방 시야와 환경음까지 차단당한 적들은 산발적으로 연막 너머에 탄을 흩뿌리기만 할 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저들은 방어자의 입장인지라 섣불리 위치를 이탈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황 중사님이 어그로 끄는 동안 우리가 치고 들어간다.”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김뱀.”

적들이 방어자의 입장을 고수하며 우회 기동을 차단할 뿐이라면, 그걸 한 번 더 우회해서 두들겨 주면 된다. 이른바 통수에 이은 통수, 우회에 이은 우회였다.

연막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가려 주는 사이, 사브락사브락 밟히는 눈더미 위를 빠르게 질주한 1소대원들이 좌우로 산개해 적들의 양 측면을 노렸다.

두 갈래로 찢어진 병력이 적들의 양면을 동시에 타격할 때는 눈먼 탄이 반대편의 아군에게 날아들지 않도록 적당한 대각선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다행히 3개월 가까이 질릴 정도로 좀비 웨이브에 시달렸던 만큼, 대구 출신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포지션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인간이 아니라 좀비만 상대하던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습관적으로 제자리에 서서 멍청하게 재장전을 하는 사소한 찐빠가 있었지만, 숙련된 선임들의 눈부신 ‘전우애’가 번번이 그들을 살려 냈다.

뒤늦게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적들이 무지성 사격을 자제하면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지만, 이미 학익진처럼 그들의 좌우에 전개한 군인들의 총부리는 설령 각성자라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씹……!”

드드드드드드드드!

매복하고 있던 자신들에게 발목이 잡힌 놈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치고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 못 했던 오판의 결과는 참혹했다.

흡사 전기톱으로 목재를 갈아 버리는 듯한 격렬한 총성이 울려 퍼진 뒤에 남은 것은 스킬과 아이템을 사용하려던 어정쩡한 자세로 벌집이 된 시체들의 산이었다.

필사적으로 나무와 바위 뒤에 몸을 감추고서 탄환이 자신을 빗겨 나가기만을 빌던 놈들도, 저만 살겠다고 냅다 도망치던 놈들도 모두 공평하게 죽었다.

전쟁이란 속임수 없는 갬블과도 같다.

실력 없는 놈, 운 없는 놈은 모조리 잃고 속옷까지 벗겨진 채 쫓겨난다.

어깨에 총탄이 스쳐 대충 가루 지혈제를 뿌리고 붕대를 칭칭 감은 황 중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번이 첫 교전임에도 불구하고 1소대원들은 자연스럽게 진군하기 시작했다.

못 먹어도 무조건 GO를 외치는 덕암리 최대 아웃풋 86세 박복자 할매의 요양원 스타일 고스톱처럼, 전장의 열기와 고동이 일깨운 그들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혈관이 수축되고 동공은 확장된 채, 쿵쾅쿵쾅 뛰는 심장과 달리 매우 절제된 호흡으로 총기의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움직인다.

“적 박격포 진지 확인했습니다.”

“교전 중에는 선보고 후조치가 아니라 무조건 선조치 후보고다. 싸그리 죽여.”

탕! 탕! 탕!

연사로 시원하게 갈기던 것과 달리, 1소대원들이 조금 거리가 떨어진 적들의 박격포 진지를 신중하게 겨누고서 단발로 끊어 쐈다.

고작 100m 남짓한 거리라면 특등 사수나 저격수처럼 대단한 사격 실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살기 위해서 진득하리만치 총을 쏴 본 군인들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중장거리 사격술을 터득했으니까.

지난 3개월 동안 대구에서 난리를 피우던 각성 범죄자 몇 놈과 좀비 군단 수백만 마리를 상대해 본 것이 전부인 평범한 군인 A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한다.

“똥 마려운 개새끼 같은 자세로 뒈지는 게 아주 일품이네.”

“스샷이라도 찍어 둬야 하는데 말입니다.”

“나중에 PC방 복구되면 그때 가서 실컷 찍어라.”

갑작스럽게 쏟아져 들어온 탄환 세례에 박격포를 쏘다 말고 머리통이 터져 나간 적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그대로 전멸했다.

뒤늦게 후방의 박격포 진지가 기습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서 전선을 유지하고 있던 적 병력 일부가 복귀했지만, 급하게 달려온 놈들을 맞이해 준 것은 매복하고 있던 1소대원들의 기습이었다.

자신들이 당한 것을 그대로 적들에게 써먹은 그들은 본격적으로 적들의 후방을 휘젓고 다니며 분탕을 치기 시작했다.

일신의 능력이 뛰어나고 전장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체크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진 지휘관이라면 즉각 몽둥이를 들고 분탕을 저지했겠으나, 3개 세력이 연합한 형태인 그들에겐 확립된 ‘체계’가 없었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놈을 지휘관 자리에 앉혀 두었다고 한들, 그 아래에서 움직이는 놈들이 서로 엇박자만 열심히 두드리는 꼴통 집단이라면 효율이 급감할 수밖에.

반대로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 아래에 똘똘 뭉친 군인들은 지난날 동안 숙성 심화 과정으로 다져 온 실전 경험과 철저한 지휘 체계를 통해 완성된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었다.

교전, 보고, 확인, 보고, 처리, 보고.

기본적으로 모든 행동 끝에는 항상 위쪽으로 보고가 들어갔으며, 상황에 따라 위쪽에서 적절한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다.

그들에겐 이미 서로를 보완할 능력과 경험이 있었고, 빈틈없는 지휘 체계는 평범한 군인들도 합리적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살인 기계로 바꿔 나갔다.

모두 6년 전의 선배들이 이북 땅에서 겪었던 것들이었다.

경상도권 생존자 집단 측 선봉대가 앞뒤로 적들을 조지며 울진 입성까지 머지않았다고 희희낙락하고 있던 그때, 저 멀리서 겨울의 날카로운 바닷바람을 뚫고 들려오는 괴성이 그들의 촉각을 곤두세웠다.

3개월간 하룻밤도 멀쩡히 넘어가는 법이 없었던 대구 출신 군인이라면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그것’.

“좀비 웨이브다!”

“저 개새끼들이 인공 좀비 웨이브를 일으켰다! 다들 물러나!”

“부상자 및 전사자는 후방으로 빠르게 이송하고, 나머지는 포지션 잡아!”

“병력 수송 장갑차랑 전술 차량으로 도로에 방벽부터 세워! 보급 쌀국수 한 그릇 뚝딱할 수 있는 3분 준다!”

“온다! 온다아아아아!”

“대좀비 화력반 뭐 해, 개새끼들아!”

울진에서 개떼처럼 쏟아져 나온 좀비 군단이 각성자들 간의 전장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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