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북진기 (3)
“쿨럭! 쿨럭! 후우!”
하마터면 좆될 뻔했지만, 그래도 DNA 샘플을 왕창 퍼부은 보람이 있었다.
못해도 6~800m 정도는 떨어져 있는 산 중턱에서 날아든 무지막지한 대구경 탄환을 방호 드론이 성공적으로 막아 주었다.
방호 드론은 고작 한 발에 망가져 버린 데다, 파편까지 크게 튀어서 맨몸이었다면 자칫 위험할 뻔했다. 그래도 다른 아이템을 덕지덕지 두른 덕분에 상처 없이 끝났다.
직후, 나는 감지와 경계 스킬을 모두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연막탄을 투척해서 내 존재를 완전히 지웠다.
‘인공위성으로 이미 네 위치는 파악해 뒀다, 병신아.’
좀비 아포칼립스로 수많은 국가가 몰락하면서 자연스럽게 통제를 벗어나 무의미하게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들. 그중 하나의 통제권을 24시간 동안 가져오는 데만 1만 DNA 샘플을 지불했다.
내 능력이라면 금세 메꾸고도 남을 금액이지만, 저 망할 놈 때문에 1만 DNA 샘플이나 썼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짜증 난다. 이러면 놈을 처리한 이후에도 인공위성 뽕을 최대한 뽑기 위해 더 열심히 싸워야 하니까.
나는 인공위성을 통해 미리 확인해 둔 놈의 매복지 근처에 능동 감지형 살포 지뢰를 잔뜩 보냈다.
커다란 원반형 금속 물체에서 거미 다리 같은 것이 우수수 돋아나더니, 곧 수면 위를 걸어 다니는 소금쟁이처럼 엄청난 속도로 눈 위를 질주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능동 감지형 살포 지뢰가 반응했으니 놈은 자신의 매복지가 발각되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후욱!”
몸을 감추고 있던 연막을 벗어나 근력, 심폐 지구력, 반사 신경 증강제를 순차적으로 팔다리에 꽂았다.
정상인이라면 절대 자기 몸에 각기 다른 작용을 하는 약물을 연달아 주사하지 않겠지만, 상점창에서 판매하는 아이템은 하나같이 가격이 비싼 값을 했다.
전신의 근육이 마구 뒤틀리고 심장이 터지기 전에 약물 부작용 중화제까지 꽂아 넣자 야생마처럼 제멋대로 날뛰던 육체가 빠르게 진정되었다.
반동이 매우 심하지만, 성능이 확실한 ‘전투 자극제’ 스킬에 비하면 가성비가 매우 떨어지는 방식이지만, 정예 저격수를 잡기 위한 대가라면 싸다.
나는 미끄럼 방지 군화의 힘을 빌려 미친 듯이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아래에서 위로 오르는 중인데도 주변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갈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투캉!
저 위에서 발악하듯 총성이 울려 퍼졌지만, 총성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도달한 탄환조차 내 몸을 찢어발기지 못했다.
“위치가 발각된 저격수에게 당해 줄 만큼 내 감이 죽지는 않았거든!”
예측하기 힘든 눈먼 탄환도 아니고, 뻔히 총구 방향과 방아쇠를 당기는 타이밍까지 보이는 탄환이다. 이만큼 도핑하고서 못 피하면 SSS급 이승권 딱지 떼야 한다.
촤아아악!
산 위를 두꺼운 솜이불처럼 덮고 있던 눈더미가 흩날리면서 쫓는 나와 쫓기는 상대가 얼마나 격하게 움직이는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타타타타! 타타타타!
무식하게 포격을 퍼부을 수 없다면 그냥 총알을 마구 퍼부어서 제압 사격만 가해도 저격수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떠넘길 수 있다.
특히나 대물 저격총 같은 변태적인 물건을 들고 다니는 놈들일수록 기동력이 떨어지기 마련. 한 몸과도 같은 총을 내던지고 도망친다면 또 모를까, 적어도 놈에게는 그 정도의 배짱이 없어 보였다.
‘아니, 총마저 포기하면 정말로 뒈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어느 쪽이든 뒈진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겠지만, 뭐 어떤가. 상대에게 작은 희망 정도는 심어 줘야 나도 사냥할 맛이 나지 않겠나.
“그래! 꼴사납게 계속 도망쳐라, 개새끼야!”
타타타! 타타!
사실 마음먹고 짚라인까지 써 가며 기동에만 집중하면 놈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희망을 줘야 할 대상은 지금 나무 사이로 요리조리 몸을 숨기며 열심히 도망치는 놈만이 아니다.
지금 늦지 않게 움직인다면 자신들의 소중한 각성자 저격수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려 줄 백업 부대에게도 희망을 줘야 한다.
그 실낱같은 희망이 아군에게 독이 될지 이득이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뭐든지 직접 당해 봐야 ‘아, 내가 병신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테니까.
부무장인 권총으로 내게 위협 사격을 마구 퍼부으며 열심히 도망치는 놈은 정말로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원래 남몰래 뒷공작 벌이는 놈, 멀리서 총질하는 놈들은 전 세계 어딜 가나 좋은 꼴을 못 본다. 놈도 그걸 알고서 필사적으로 백업 부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까지 도망치는 것이겠지.
문제는 놈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는 거다.
‘너만 백업 부대 있냐?’
이미 저격수의 위치를 특정 짓자마자 각성자 유격대와 추가 지원 부대에게 무전을 보내 두었다.
내가 저격수를 다른 곳으로 내몰아서 이 지역 일대의 킬링 필드를 치워 버리면 즉시 진격할 준비를 해 두라고.
다행히 내가 저격수에게 당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킬링 필드를 걷어 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아군이 장갑차와 전술 차량을 동원해 빠르게 치고 나왔다.
적들의 백업 부대는 정예 저격수 한 명을 구출하기 위해 비전술적으로 움직이겠지만, 우리 측 아군은 내가 만든 빈틈을 이용해 전술적 이점을 취한다는 심플한 계획이었다.
내가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나 다름없는 이 근본 없는 계획을 믿어 주고, 기어코 실행에 옮기기까지 하는 아군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제정신 박힌 놈들부터 죽어 나자빠지는 세상이니 별수 있나.’
언덕을 넘어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한 저격수와 저 멀리서 저격수의 구조 요청을 받고 몰려드는 병력들이 보인다.
저격수가 러시아제 대물 저격총을 사용할 때부터 대충 눈치는 챘지만, 역시나 놈들은 대한제국파에서 대 준 불법 무기와 장비로 완전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동굴이나 지하에 몸을 숨긴 채 AK와 RPG-7을 들고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는 구시대적 테러리스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 눈에는 정규군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다.
‘랑데뷰 포인트 확인했고.’
적들이 저격수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이번에는 나를 향해 제압 사격 같은 위협 사격을 마구 퍼부었다.
단 한 명을 옴짝달싹못하게 만들기 위해 총탄 수백 발을 한 번에 퍼붓는 걸 보니, 상대도 꽤나 여력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후방의 곡사포 진지에 재빨리 무전을 때려 좌표를 불러 주었다. 놈들이 전술적 이점을 취할 수 있는 지점을 벗어났으니 지금이야말로 불방망이로 혼내 줄 때다.
-그 지점이라면 데인저 클로즈입니다!
“상관없으니까 그냥 쏘세요!”
내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적들이 계속 나를 압박하기 위해 위치를 고수하며 더딘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데인저 클로즈고 나발이고 저놈들 머리통을 박살 내려면 나라는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애초에 옛 중세 시대에 전쟁이 터지면 허구한 날 장수들이 혼자 튀어나와 일기토를 벌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적의 선봉을 먼저 꺾어야 기선 제압을 하고 효율적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양측 세력 간의 선봉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이 전초전은 우리가 무조건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
그래야만 안동에서 봉화군으로 이어지는 이 길목을 확보해, 영주와 울진, 그리고 태백시를 동시에 압박할 수 있다.
내가 윽박지르자 전포대장은 하는 수 없이 각 포반에 해당 좌표로 포격 명령을 하달했다.
선행 부대가 밤낮으로 열심히 구축한 전초 기지에 막 배치된 155mm 곡사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온갖 약물로 신체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일까, 저 멀리서 희미한 포성이 울려 퍼진 것과 동시에 포탄의 궤적이 보였다.
‘전쟁의 꽃은 역시 포병이지.’
미리 뿌려 둔 능동 감지형 살포 지뢰도 이미 더한 연쇄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 적 주변으로 은밀하게 몰려들었다.
적들의 소중한 정예 저격수 하나를 위협해서 적의 백업 부대까지 끌어들인 다음 한 번에 싹 쓸어버리는 이 전략, 내가 생각했지만 참 지독하다.
내 머리 위를 무심하게 가로지른 포탄이 산 아래에 모여든 적들을 정확히 타격했다.
꽈아아아아앙!
찢어질 듯한 폭음과 눈부신 폭발, 그리고 타격 지점 일대를 싹 쓸어버리는 막대한 양의 파편과 폭압까지.
단 하나의 생명체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일념이 느껴질 만큼 확실하게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나도 재빨리 짚라인을 이용해 후방으로 몸을 빼지 않았다면 재수 없게 날아든 파편에 얻어맞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비싼 아이템을 덕지덕지 바른 이유는 비단 저격수에 대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폐부가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 산의 공기마저 후끈하게 만들어 버린 대규모 포격의 여파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사장님, 좀전에 포격 확인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쿨럭! 후우, 전 괜찮아요. 그보다 놈들이 경북과 강원도 경계를 봉쇄하기 위해 인공적인 좀비 웨이브를 일으킬 우려가 있으니,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주변 지역을 확보해야 해요. 최대한 빨리 움직여 주세요.”
-놈들 중에 전투 지속이 불가능한 부상자가 여럿 있을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어떡합니까?
“포로는 안 잡습니다.”
-……알겠습니다.
인권 좋지.
하지만 자신의 인권을 존중받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타인의 인권을 존중해 줘야 한다.
정부도, 법도, 질서도 무너진 이 사회에서 남은 것이라곤 철저한 힘의 논리뿐. 무고한 민간인들보다 더 강했던 놈들이 인권을 유린했듯이, 놈들보다 더 강한 내가 인권을 유린해 주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뒈질 놈들은 뒈지고, 살 놈은 살아야지. 심플하잖아.”
1차 세계 대전을 알리는 첫 총성이 울려 퍼진 것처럼, 한반도에서 또 한 번 불기둥이 치솟았으니, 전쟁이 나를 부르고 있다.
북진할 시간이다.
* * *
“포로는 없답니다.”
한동석이 그리 전하자 각성자 유격대원들이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시국에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못 내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놈들은 ‘조금’ 나쁜 놈들이 아니었다.
무고한 민간인들을 가축처럼 대거 잡아들여서 노예로 부려 먹거나, 좀비 사육에 써먹은 천하의 개새끼들이었다.
과거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처넣고, 수용소에 가둬서 온갖 끔찍한 인체 실험이나 고문을 자행했다던 나치와 비견해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지경이니 말 다 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일반적인 각성 범죄자도 매우 강경하게 대응해야 간신히 생존자 집단 내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데, 하물며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범죄 집단이 상대라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이승권의 살신성인과도 같은 똥꼬쇼에 위협적인 각성자 저격수와 적 선봉대 일부가 처리되었다. 나머지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잔당을 처리하고 지역을 점거하는 것뿐.
전술 차량과 장갑차에 올라탄 군인들은 좁은 지방 국도를 따라 움직이고, 각성자 유격대는 산과 들판을 빠르게 넘나들며 목표 지점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즉각적인 작전이 가능한 것도 이승권이 산 하나를 통째로 영역으로 삼아 전초 기지로 만든 덕분이었다.
안동 외곽에 구축해 둔 전초 기지에서부터 출발했다면 족히 한나절은 이동해야 했을 것이다.
“적 전초 기지 확인했습니다. 사장님에게 어그로가 끌려 섣불리 진출했던 병력 대부분이 포격에 쓸려 나가자 크게 당황한 것 같군요.”
“지금쯤 추가 지원을 요청하거나 퇴각 준비를 하고 있겠지. 어쨌든 혼란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이야말로 덮치기 딱 좋은 상황이야. 내가 리드할 건데 다들 괜찮지?”
한동석의 간략한 정찰 보고에 최묵호가 샷건을 들고 물었다.
방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그는 손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다는 눈치였다.
이승권의 동기이자 그와 같은 북진군 출신으로 알려진 최묵호는 유독 적들에게 과한 호전성을 내비쳤다. 이래저래 저 악독한 놈들에게 쌓인 게 많은 건지, 아니면 저런 족속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인 건지.
아군이 잘 싸워 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한동석은 진가희에게 눈짓으로 그를 보조해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엽총을 들고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았다.
적들의 혼란을 틈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각성자 유격대는 과연 이승권이 믿고 고른 인재들답게 금세 전초 기지에 침투, 적들과 교전에 돌입했다.
피가 튀고, 뇌수가 흐르고, 뜯겨 나간 사지가 전초 기지 전체에 마구 굴러다니기까지는 정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포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유격대원들 중 누구도 적들의 투항 의사를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살고 싶었다면 총알이 박히고 칼날이 살갗을 찢어발기기 전에 먼저 항복이라고 크게 외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