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98)화 (198/227)

198화 수복기 (48)

“평화가 깨졌다.”

그렇게 중얼거린 한 로브 차림의 사내는 손짓으로 자신의 옆에 있던 부제에게 신호를 내렸다.

그와 함께 2인 1조로 활동하고 있던 부제는 즉각 달려가 일시적 협력 관계를 맺은 헬조선 단원들에게 다른 매복지가 적에게 발각되었고 기습당했음을 알렸다.

‘평화가 깨졌다.’는 의미는 쉽게 말해 스킬로 연결된 새천년평화교 사제들 중 누군가가 스스로 비평화주의적 행동을 하거나, 타의에 의해 평화가 강제로 깨졌을 경우, 해당 스킬에 연결되어 있는 가장 가까운 사제에게 알람 메시지가 발송되는 심플한 구조였다.

지금 막 그에게 알람 메시지가 도착했으니,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매복지가 적에게 발각되어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뜻했다.

본래 그들이 이 산맥 곳곳에 자리 잡아 주요 길목을 차단하거나 감시하고 있는 이유는 ‘폭력주의자’들이 강원도로 넘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게릴라전을 펼치며 치명적인 기습을 일삼거나, 부비 트랩을 설치해서 진격 속도를 지연시키거나 하는 등 다소 과격한 계획도 준비되어 있었다.

다만 새천년평화교 사제들은 철저하게 교리를 따르는 입장이었기에, 그런 폭력적인 행동은 전적으로 협력 관계인 헬조선 단원들에게 일임했다.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또 싸워야 하는 상황임에도 일부러 싸움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말로 싸워야 한다면 저 헬조선 단원들조차 질리도록 싸울 수 있다. 종교 단체도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성전 선포’가 있기 때문이다.

명분만 있다면 그들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선공을 허용했으니 명분이 생겼다.’

예로부터 종교인에 대한 핍박은 전 세계로부터 지탄받아 마땅한 행위였으니, 종교인을 핍박한 국가치고 끝이 좋았던 국가들은 거의 없었다. 그 위대한 로마 제국조차 끝이 그 모양 아니었던가.

실제로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자신의 스킬에 대한 제약 일부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종교인에 대한 외세의 핍박이 시작되면, 처음에는 더욱 강한 정신력을 가지게 된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올곧게 서 있을 수 있다.

‘단순한 핍박을 넘어 불의가 행해지면 두 번째 제약이 풀린다.’

평화가 깨진 직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형제가 잔혹하게 사살당했다. 불의에 당한 것이다.

빠르게 두 번째 제약이 풀리자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세 번째 제약만 풀리면 성전을 행할 수 있다. 위대한 평화가 내려주는 초월적인 힘으로 폭력주의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다.

그들을 역으로 핍박하고, 형제들이 당한 만큼 합법적인 불의를 행할 수 있으며, 성전에서 승리한 끝에는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먼 옛날 십자군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했던 수많은 귀족과 기사단들처럼.

이미 헬조선과 싸울 때도 성전의 막대한 축복(버프) 효과를 누린바, 그 힘만 있다면 적이 아무리 강대하고 머릿수가 많아도 능히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매복지를 기습한 적들이 머지않아 ‘학살’을 자행하면 마지막 제약이 풀릴 터. 남자는 또 한 번 자신의 육체에 폭포수처럼 쏟아질 어마어마한 은총과 충만한 힘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후욱!

“……허?”

따끔한 통증에 고개를 내려 보니 자신의 가슴팍에 뭔가 튀어나와 있다.

아니, 뭔가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박혀 있다.

기껏해야 나무젓가락 굵기에 길이는 성인 남성의 손가락보다 조금 긴 송곳 비스름한 것. 그것을 인지한 순간 남자는 자신의 가슴팍을 중심으로 새하얀 로브가 검게 물들어 가는 것을 확인했다.

출혈이 일어났다면 붉은 피가 새하얀 평화의 상징을 적셔야 할 텐데, 마치 땅에서 막 뽑아 낸 석유처럼 시커먼 액체가 줄줄 새어 나왔다.

“도, 독……!”

그것도 단순히 몸을 저릿저릿하게 마비시키는 깜찍한 수준의 독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텐데, 그의 체내에 주입된 독은 빠르게 밀려오는 불안과 공포를 현실화했다.

“커헉!”

출혈.

“그으으……!”

신경 손상으로 인한 호흡 곤란.

한술 더 떠 피부를 벗겨 낸 다음 생살에 소금을 뿌리고 불로 지지는 듯한 엄청난 격통까지.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중독 증세처럼 게거품을 물고 몸을 파르르 떨며 수 초 만에 즉사했다면 기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런 고통은 모른 채 죽었을 테니까.

“가, 가아아…… 아아아아악!”

교단에서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 직접 내려 준 은총(버프)의 효과를 받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뚫고 들어온 독은 그의 생명을 가능한 고통스럽게 앗아 갔다.

일부 독극물의 작용을 억제하고 치료할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는 군용 주사기라도 있었다면 허벅지나 흉부 언저리에 꽂고 버텼으련만, 그의 몸은 너무나도 빨리, 하지만 너무나도 느리게 무너졌다.

자신의 할 일을 끝마치고 바쁘게 돌아오던 그의 부제는 눈 속에 파묻혀 검은 피를 흘리고 있는 시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발을 뚫고 날아온 군용 대검에 미간이 꿰뚫렸다.

“들킨 시점에서 매복은 의미가 없다고, 병신 새끼들아.”

새하얀 순백의 세상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붉은 빛의 괴한은 숨결조차 얼어붙을 듯한 혹한 속에서 뜨거운 혈향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중독으로 사망한 사제가 가장 가까운 매복지에서 평화가 깨진 것을 확인한 지 정확히 1분 하고도 47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우선 나는 생화학 무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생화학 무기를 엄청나게 꿍쳐 놓은 빨갱이 새끼들이 틈만 나면 우리들에게 생화학 무기를 사용해 전투의 양상을 바꾸려고 시도하거나, 부비 트랩에 써먹으며 이쪽의 전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혐오스러웠던 것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무색, 무미, 무취라는 정신 나간 옵션을 갖춘 북괴 버전 VX 가스였다.

피부 접촉만 돼도 신경가스로 유명한 사린의 독성 100배에 해당하는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고 있는 놈이라, 재빨리 해독제를 맞지 않으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사망에 이른다.

호흡기 흡입도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라 사실상 제독 부대처럼 전신 방호복과 방독면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VX가 대량 살포되었을 때 일반 보병이 버틸 재간이 없다.

물론 우리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던 빨갱이들은 가급적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지 않게끔 여러 조건을 따져 가며 생화학 무기를 사용했다.

덕분에 우린 놈들의 생화학 무기 사용 패턴을 어느 정도 습득하고, 역으로 놈들이 설치해 둔 부비 트랩을 해제해서 생화학 무기 일부를 확보, 놈들의 무기를 우리가 써먹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교훈을 하나 배웠다면, 적이 쓰는 생화학 무기는 좆같지만, 우리가 쓰는 생화학 무기는 집 안에 편의점이 있는 것처럼 편리하다는 것이다.

“성능 확실하네.”

박마춘 아재에게 넘겨받은 젓가락보다 작은 크기의 송곳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요 작은 송곳이 가슴에 박혔을 뿐인데 실전 압축 고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발작하다가 끔찍한 몰골로 죽어 버렸다. 땅꾼으로 전직한 인간이 작정하고 긁어모은 독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상점창에 여러 종류의 치료제나 해독제, 백신 등을 팔고 있지만 너무 비싸서 미리 구비해 두지 않은 거겠지.’

아니면 조심해야 할 건 오직 좀비들뿐이라며 DNA 샘플을 쓸데없이 낭비한 멍청이들이거나.

어느 쪽이든 내 입장에선 일 처리가 쉬워졌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전장에서 죽을 놈은 이렇게 죽고, 살 놈은 나처럼 산다.

후웅! 후웅!

내 귓가에 파공성을 밀어 넣으며 매서운 속도로 날아간 쇠구슬이 나무 뒤에 숨어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놈들의 머리통을 두들겼다.

재수 없게 즉사한 놈들은 그대로 고목처럼 쓰러졌지만, 운 좋게 코뼈가 부러진 선에서 그친 놈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이쪽을 향해 총을 마구 난사해 댔다.

이렇게 소란을 피울 거면 처음부터 매복을 한 의미가 있나?

타타타타타타!

즉시 옆으로 짚라인의 후크를 쏴서 몸을 확 끌어당긴 나는 놈들이 쏘는 불법 소총의 탄환 세례 범위에서 벗어났다.

내가 순식간에 자신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놈들은 사격을 중지하고 저들끼리 무어라 소리치며 위치를 변경했다.

내가 이동했으니 자신들도 이동해서 방어자가 가질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도였겠지만, 이미 원숭이보다 빠르게 나무 사이를 오가고 있는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먼저 치고 들어가는 놈이 기본적으로 불리한 것은 맞으나, 그것도 상대가 내 움직임을 훤히 꿰고 있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말이다.

상대가 내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면 아무리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고 방어를 굳힌다고 한들, ‘기습’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렇게.

콰직!

나무 위에서 눈더미와 함께 수직 낙하한 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총을 들고 있던 놈의 목덜미를 짓밟고 관자놀이에 대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즉사한 놈의 시신을 발판 삼아 훌쩍 뛰어올라서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이런 씹!”

“위쪽이다! 쏴!”

“잠깐, 너무 화력을 집중시키지 마! 나무 파편과 눈이 튀어서 시야 확보가……!”

마지막에 소리친 놈은 그래도 생각이 좀 있는 놈이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지만, 그렇다고 머리가 조금 좋은 정도로 몸이 고생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머리가 미친 듯이 좋아야 몸이 고생하지 않는 거다.

서컥! 촤아아악!

나를 노리고 따라붙는 십자 포화를 적당히 피하며 나무 사이를 오가다가, 적당한 나뭇가지가 보이면 손도끼로 단번에 찍어서 떨어뜨렸다.

침엽수의 쓸데없이 부피가 커 보이는 잎과 그 위에 쌓인 눈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면서 놈들의 정신을 더욱 사납게 했다.

타타타타타! 탕! 탕!

“어디야, 씨발! 어디냐고!”

“진정해, 개새끼야! 탄약 카운트하면서 쏘라고!”

“닥쳐! 각성자 상대로 총알을 아끼는 미친놈이 어디 있……!”

으직!

“아아아아아아아악!”

내가 나무 사이를 오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멍청하게 위를 쳐다보고 있던 놈의 배후에 접근해 손도끼를 휘둘렀다. 척추 사이에 정확히 박힌 도끼날은 신경다발을 무참히 끊어 냈다.

인간을 손쉽게 반신불수, 혹은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척추 파괴술은 사실 혼전에서 꽤 쓸 만하다.

운 좋게 기절하지 않는다면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겠지만, 일단 척추가 망가지면 정말로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못 하기 때문이다.

그다음 머리와 턱(하악)을 잡고 확 비틀어서 단숨에 목을 꺾어도 좋고, 아니면 척추만 망가뜨린 채 다시 이동해도 된다.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적은 자연스럽게 주변의 동료들에게까지 심적 스트레스를 안겨 주니까.

물론 나는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놈의 옷 틈새에 수류탄을 끼워 넣고 발로 뻥 걷어찼다.

자신의 옷자락에 들어온 수류탄을 직접 빼낼 수도 없어 무력하게 동료들 앞으로 내던져진 적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복잡미묘한 감정을 다채롭게 느끼기에는 3초 하고도 0.n초. 그리 길지 않았다.

퍼어어엉!

자신들에게 내던져진 동료를 쏴야 하나, 수류탄을 빼 줘야 하나, 아니면 즉시 몸을 돌려 피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해 머뭇거리던 놈들은 수류탄이 터지면서 함께 폭사했다.

인간의 육편을 갈기갈기 찢으며 사방으로 퍼져 나간 파편은 그들의 망설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반면,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려 피하는 선택을 내린 극소수의 적들은 퍽! 퍽! 하고 지면과 나무에 파편이 박히는 끔찍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이이이익……!”

“멍하게 있지 마! 놈을 죽여!”

“그래! 내가 스킬을 쓸 테니 엄호해!”

여기까지 해도 전의를 상실하지 않는 놈이 있다는 건 순수하게 존경할 만한 부분이었다.

무력해진 동료가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수류탄을 품은 채 자신들에게 내던져졌음에도, 그 기습적인 자폭 공격에 동료 여럿이 침묵했음에도, ‘나는 아직 할 수 있다.’고 믿는 정신이 어찌 대단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난 그걸 5년이나 유지해 왔거든.”

짬을 너무 처먹은 탓에 지나가던 짬타이거도 나한테 냐옹~ 대신 형님~ 한다.

“컥! 그륵, 으그그그……”

“커헉! 쿨럭! 쿠흡!”

“어억, 앞이 안 보……”

내가 왜 근접 전투에서 걸리적거리는 방독면을 계속 쓰고 있었겠냐?

나는 쓸데없이 전투 의지를 불태우다 부주의하게 생명의 불을 꺼뜨린 놈들에게서 조용히 돌아섰다.

아직도 사냥감이 많이 남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