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97)화 (197/227)

197화 수복기 (47)

“빌어먹을, 더럽게 춥구만. 이놈의 나라는 겨울만 되면 산 채로 동태가 되는 것 같다니까.”

“동감해. 몇 년 전에 북녘땅에서 겨울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혹시 이게 본진 디버프인가 뭔가 하는 건가?”

“등신 새끼. 본진 버프가 있으면 있었지 디버프는 또 뭐냐?”

헬조선 단원들은 임무 특성상 야전에서 모닥불을 피울 수 없어, 동계 위장 방한복을 입고 그 안에 핫팩을 잔뜩 터뜨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본래 조직의 원대한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기만 했다면 이런 곳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다음 명령을 기다릴 이유도, 꼴 보기도 싫은 놈들과 협력하며 한솥밥을 먹지 않아도 됐을 터.

“쓰읍, 근데 저 사이비 새끼들은 안 춥나? 우리처럼 방한복도 아니고 평상복에 로브 하나만 달랑 걸치고 다니는 것 같은데.”

“신경 꺼. 얼어 죽어도 저 새끼들이 얼어 죽는 거니까.”

“아니, 내 말은 괜히 저 새끼들이 걸리적거려서 작전에 차질이 생기거나 뒤처리가 귀찮아지면 어쩌냐는 거지. 사람이 선심 좀 써서 핫팩 나눠 줄까 했더니 ‘오염된 물건’은 받을 수 없다더라고?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저놈들 교리가 워낙 뒤죽박죽이라 그래. 머리 박박 깎은 중들이 속세에 미련을 버린다고들 하잖아? 저놈들도 평화를 깨는 모든 요소를 오염되었다거나, 타락했다고 표현하더라.”

“넌 왜 그렇게 빠삭하냐? 이 새끼 설마……?”

“미친 새끼가 누굴 사이비로 아나! 나도 선배들한테 들은 거야, 인마!”

필요 최소한의 협력만 하며, 저들끼리 2인 1조로 팀을 짜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새천년평화교 신도들은 춥기만 하고 재미라곤 없는 야전에서 몇 안 되는 농담거리였다.

사이비 놈들 정체가 뭔지, 교단에서 뭘 하는 건지, 이 일시적인 협력 관계가 끝나면 바로 죽여야 하는지 같은 하잘것없는 대화의 소재로는 딱이었기에.

상대가 듣는지 안 듣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질 낮은 농담에 반응해서 뭐라도 보여준다면 지루한 시간을 조금 더 유익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고, 지금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면 재미없는 협력 관계를 계속 유지할 뿐이다.

다만 체온과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먹고 마셔 줘야 하는 겨울 야전 특성상, 동료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홀짝인 보온병 속 음료나 술은 금세 이뇨감을 불러왔다.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겪는 생리적 현상이다.

“오, 신호 왔다. 이번엔 무려 큰 거랑 작은 거 둘 다야. 이게 얼마 만이지?”

“아오, 더러운 새끼. 가능한 멀리 가서 해결해라. 여기까지 냄새 풍기면 죽여 버린다.”

“얼굴부터 더러운 새끼가 깔끔 떨기는.”

“빨리 꺼져라, 똥쟁아.”

낄낄대거나 욕하는 동료들을 뒤로한 채, 이윽고 그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어슴푸레한 저녁의 산길을 걸었다.

겨울은 해가 빨리 지고, 산은 특히 해가 더 빨리 진다. 거기에 눈까지 내리고 있다면 고작 오후 5시가 되었을 뿐인데도 작업에 불빛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훈련받은 이들이라면 절대로 야전에서 불을 사용하지 않는다. 야전에서 괜히 함부로 담배 피우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술을 마실지언정 담배는 태우지 않았고, 또 불빛 따윈 없어도 이 정도 환경이면 무리 없이 용무를 해결하고 돌아올 능력이 있었다.

훈련도 받았고, 각성도 했고, 찬란한 미래도 그리고 있는 꿈같은 나이 37세 전직 백수 헬조선 단원이니까.

자신들과 교대로 외곽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기분 나쁜 사이비 광신도들을 지나쳐, 임시 매복지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장소까지 간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거인의 발걸음처럼 성큼성큼 찾아오는 어둠, 그리고 눈이 내리는 소음조차 조용하기 짝이 없는 이 산속에서 용을 한 마리 낳을 생각이다.

‘신호를 보니 이건 틀림없이 용이다. 용이 아니라면 하다못해 이무기 정도는 되겠지.’

설마 각성을 한 뒤에도 변비에서 벗어날 수 없을 줄이야, 하고 중얼거리며 적당한 곳에 자리 잡은 그는 감각을 집중시켰다.

야생동물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감각을 극대화하고, 일부 생리 현상을 최대한 단축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고 들었다.

예를 들어 물을 마시거나, 짝짓기를 하거나, 잠을 자고 있을 때처럼 필연적으로 자신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그 순간에 최대 수준의 경계 모드가 된다.

30대가 넘도록 취직을 하지 않은 상태로 이딴 나라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헬조선에 가입, 이후 좀비 사태를 겪으면서 ‘자택 경비원’으로 각성한 그는 매우 훌륭한 경계 스킬을 보유하게 됐다.

예를 들어 부모의 지갑에서 돈을 슬쩍하던 그때처럼, 부모 몰래 야심한 시각에 냉장고를 뒤지던 그때처럼, 혹은 지금처럼 자신만의 은밀한 시간을 가질 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이 뛰어난 경계 스킬 덕분에 모든 적성체와 중립체의 접근을 사전에 파악하고, 시스템이 직접 그에게 경고성 알람 메시지를 발송한다. 잠들어 있는 와중에도 발동하는 이 경계 스킬이라면, 장거리 저격이라도 당하지 않는 한, 상대는 무조건 그의 감시망에 먼저 포착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스킬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번에 매복조와 함께 배치되어 공적을 쌓고자 했던 것인데.

푸욱!

“그르르륵……?”

어째서 경계 스킬을 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등에서 흉부를 정확히 뚫고 폐를 찢어발긴 칼날이 시야에 들어온 것일까.

스킬은 분명 발동 중이었을 텐데, 어째서 알람 메시지가 오지 않았지?

어째서 적이 이렇게나 가까이 왔음에도 선공을 허락한 거지?

“마침 바람이 자네들 쪽으로 불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뭔가.”

칼날이 매끄럽게 자신의 체내에서 빠져나간 것을 느낀 그는 물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파들파들 떨며 시선을 돌렸다.

경계 스킬에 잡히지 않은 인물이 무려 둘이나 있었다.

한 명은 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연세가 지긋한 노인임을 알 수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자신들처럼 동계 위장복에 방독면까지 착용한 채 칼날의 피를 털어 내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칼침 세게 맞은 것치곤 고통이 적지? 산에는 환각, 마비, 각성을 유발하는 온갖 성분들이 존재하거든. 어쭙잖은 등산가들이 함부로 주워 먹었다가 병원 실려 가는 버섯 같은 것들. 거기서 액기스만 뽑아내면 바로 ‘약’이 될 수 있지. 내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써먹을 수 있고.”

약도 경우에 따라, 필요에 따라, 배합에 따라 사람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다. 혹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거나.

그 대상은 설령 스킬을 보유한 각성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그렇게 말을 끝맺은 노인은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뱃속에서 슬슬 용인지 이무기인지를 낳을 준비가 됐다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더러운 신호가 아니라, 환각과 마비에 절어 있는 37세 전직 백수 현 테러리스트를 마무리하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혹한 신호.

하늘에서 함박눈과 함께 무광 처리된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 * *

“솜씨가 깔끔하구만. 나야 이미 늙어서 그쪽으로는 잘 모르지만, 젊은 사장 같은 북진군 출신들은 원래 다 그런가?”

“외국인도 한국에서 몇 년 살다 보면 금세 젓가락 쓰는 법을 익히고, 씨발 같은 욕이 입에 착착 달라붙지 않습니까. 북한 땅에서 5년을 보냈더니 어느 샌가 손에 뱄더라고요.”

추위에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재빨리 칼날을 털어 내고 천으로 닦아 낸 나는 혈향이 번지지 않도록 시체를 눈 속에 파묻었다.

다행히 지독할 정도로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어서 적당히 파낸 구덩이 속에 시체를 파묻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몇 분 지나지 않아 시체는 금세 새하얀 이불을 덮게 될 것이다.

그보다도.

“독은 얼마나 더 쓸 수 있겠습니까?”

“이런 귀한 독은 재생산까지 재료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라 양이 그리 많지가 않어. 그래도 앞으로 서너 번은 더 사용할 수 있겠구만. 더 필요한가?”

“아뇨, 박마춘 아재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본인의 보험용으로 남겨 두라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하기야, 각성했다고 괜히 무리하면 허리 나가는 법이지.”

각성이 노화하고 삐그덕거리는 신체를 어느 정도 보정해 주는 데다, 레벨 업을 할수록 조금씩 더 강해지지만 그래도 본판의 노쇠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각성자도 결국 사람이고, 사람이라면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죽거나 다칠 우려가 있다.

박마춘 아재를 뒤로 물린 나는 군용 대검을 휘리릭 돌려서 역수로 쥐었다.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놈을 입막음할 때면 주로 폐부나 목을 찔러서 소리 없이 죽이지만, 그냥 좆같은 놈들을 마구잡이로 도륙해야 할 때는 역수로 쥐고 냅다 찍어 버리는 게 편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칼잡이들처럼 냅다 돌진해서 배를 마구 찌른다거나 하는 건 매우 비효율적이다. 배 좀 찌른다고 사람이 죽지도 않고, 그렇게 한 놈 간신히 처리했다고 해서 다른 놈들도 얌전히 모가지 내밀고 곱게 죽어 주지 않는다.

‘암행.’

암행 스킬을 사용해 발소리를 크게 줄이고,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과 빼곡히 자리 잡은 나무들을 장막 삼아 미친 듯이 뛰었다.

다만 인간의 각력과 보폭으로는 무릎까지 잠기는 눈 위에서 일정 수준 이상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기에, 나는 쿨타임이 돌 때마다 짚라인의 후크를 쏴서 나무에 박고 순간적으로 고속 기동했다.

해는 이미 완전히 졌다. 산 위에서 맞이하는 함박눈은 장마철에 미친 듯이 쏟아붓는 폭우와 다를 바 없다.

체술(B) 스킬의 힘을 빌려 허공에서 단숨에 적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매복 지점까지 기동한 다음, 멍하니 서 있는 새하얀 로브 차림의 사이비 광신도에게 짚라인의 와이어를 걸었다.

끼이이이이익! 콰직!

놈의 등 뒤에 착지하면서 후크를 마저 회수하자 와이어에 연결된 후크가 놈의 목을 시원하게 날려 버렸다.

“침입……!”

후욱!

머리통이 날아간 놈의 옆에서 침입 경보를 외치려던 놈의 목덜미를 붙잡고 단숨에 끌어당긴 뒤 역수로 쥔 칼날을 정수리에 때려 박았다.

인간의 두개골에서 정수리는 의외로 생각만큼 튼튼하지 않다. 턱밑만큼 물렁하지 않아도 작정하고 때려 박으면 함몰되거나 뚫린다.

손잡이를 강하게 비틀어서 칼날로 놈의 뇌를 한 번 헤집은 뒤 쑥 뽑았다.

놈들은 우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이 추위에도 불을 피우지 않은 듯했지만, 이쪽에는 산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는 사람, 사냥감의 움직임을 훤히 꿰고 있는 사람, 그리고 ‘훈련받은’ 사람의 심리를 훤히 꿰고 있는 사람도 있다.

훈련받은 놈들일수록 훈련받은 내용대로만 움직이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굳이 예언가로 각성하지 않아도 놈들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건 어린아이 사탕 뺏는 것보다 쉬웠다.

그리고 지금부터 할 일도 아마 하품이 나올 만큼 쉬울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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