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수복기 (45)
영화 속 미군은 언제나 멋있게 등장한다는 국룰에 따라 우리도 선행 부대의 근처를 잠깐 돌면서 끝내주는 지원으로 첫 선을 끊었다.
드르르르르르르륵!
스프린터 선수처럼 아스팔트 도로 위를 미친 듯이 내달려 기어코 바리케이드와 가시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좀비 무리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곧바로 미니건을 쏴 갈겼다.
포항으로 몰려들었던 좀비들도 만만찮았지만, 최근 들어 생존자 집단이 존재하는 도시 각지에서 좀비들의 전체적인 전투력과 호전적인 성향이 크게 증가한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
미니건으로 수백에 달하는 좀비들을 1분도 채 걸리지 않아 쓸어버렸지만, 이미 어그로에 이끌려 몰려드는 좀비 떼의 진격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총만 쏴 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헬기 조종사에게 적당한 위치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전초 기지 후보로 선정된 한 학교 옥상에 헬기가 착륙하고, 몸이 한껏 달아올라 있던 각성자 동료들이 먼저 튀어 나갔다.
각성자란 결국 더 많은 좀비, 혹은 더 많은 각성자(범죄자 한정)를 처치해야 성장할 수 있으니, 이미 대구에서부터 수많은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저들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좀비 떼를 바라보는 것도 당연했다.
세상이 이 지경으로 망해 버린 이상, 재력이나 권력보다는 압도적인 무력이 쾌적한 생활과 안전한 생존에 더 도움이 된다. 각성자들도 그걸 잘 알고 있으니 구태여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다.
“휘유, 대구에 매일같이 몰려드는 좀비들도 상당한 수였지만, 이곳도 머릿수 대비 만만찮은 것 같습니다. 군인들이 집단으로 움직여서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이만한 규모의 습격은 조금 과하죠. 전초 기지를 구축하고 있는 군인들의 수는 잘 쳐줘도 2~300명인데.”
심지어 이곳 말고도 다른 지역에서 전초 기지나 라인을 연결하고 있는 작업이 진행 중인데, 가장 최전방에 해당하는 이곳만 공격받았다는 건 굉장히 미심쩍었다.
한동석을 말을 가볍게 받아넘긴 나는 총 대신 얼마 전 각성 범죄자 놈들이 사용했던 손도끼를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분명 수도권을 기점으로 전국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좀비들이 퍼진 것은 사실이고, 야생 좀비의 머릿수는 못해도 수천만 이상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대구 같은 대도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좀비 웨이브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지금껏 숱한 좀비 웨이브를 막아 왔음에도 여전히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것도 야생 좀비의 수가 워낙 많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런 작은 지방 도시의 외곽에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건 말이 안 돼.’
이미 죽어 버린 이 도시에 남아 있던 좀비들은 한참 전에 생존자들을 찾아 떠났을 텐데, 이제 와서 유령 도시의 외곽에 군대가 기어들어 왔다고 다짜고짜 대규모 기습을 가한다?
애초에 안동의 인구가 기껏해야 10만 단위였던 것을 감안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누가 고의적으로 좀비 어그로를 통제하지 않고서야, 도시 내부로 진입하지도 않은 선행 부대가 이런 기습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우선 어그로부터 떨쳐 내자.’
계속 총성을 내면 인근 지역의 좀비들이 밑도 끝도 없이 달려드니까, 일단 군인들은 뒤로 물려서 전초 기지 구축에 집중하게끔 하고 각성자인 우리들이 직접 나서서 몸으로 때워야 한다.
“아오, 엽총이 아니면 폼이 안 나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엽총 대신 메탈 프레임의 사냥용 새총을 꺼내 든 그가 능숙한 솜씨로 큼지막한 쇠구슬을 장전해서 쐈다.
각성자가 쏘는 새총은 샷건으로 치면 묵직한 슬러그샷을 쏜 것과 다를 바 없는 위력이라 쇠구슬이 적중한 좀비의 머리통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나도 즉시 근거리 전투 특화 각성자들과 합류해 군인들을 뒤로 물리고, 붕붕 돌리던 손도끼를 힘껏 내던졌다.
미친 속도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간 손도끼가 침을 질질 흘리며 맹렬하게 달려오던 좀비의 두개골을 둘로 쪼개 버린 것도 모자라 뒤따라오던 놈의 미간에 반쯤 박혔다.
두개골이 박살 나 허무하게 쓰러지는 좀비의 시체를 짓밟고 훌쩍 뛰어올라 반쯤 박힌 손도끼를 발로 짓밟아 주니, 뒤따라오던 좀비의 두개골도 깔끔하게 쪼개졌다.
튀어 오르는 육편과 뇌수를 무시하고서 쌍도끼를 손에 쥔 채 몸을 가볍게 회전시켰다. 장작 따위는 힘을 주지 않아도 쪼개 버릴 듯한 날카로운 도끼날의 회전력에 좀비들의 모가지가 잘 여문 과일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딱히 근거리도, 원거리 전투 특화 각성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그때 손에 드는 무기에 따라 전투 방식이 바뀌는 타입이었다.
그래서인지 직접적인 전투 효율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그 증거로 내가 좀비 서넛을 겨우 썰고 있을 때 진가희나 오함마 아재는 벌써 십수 마리 이상을 박살 내고 있었다.
건물 옥상에서 무심하게 새총을 당기고 있는 한동석도 스코어를 꽤나 올린 듯, 우리 주변에는 머리통이 박살 난 좀비들로 수두룩했다.
내 스킬은 대부분 특정 거점이나 영역을 손에 넣고 그곳에 틀어박혀서 농성을 벌이는 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넷플러스가 아니라 무협 소설이나 실컷 봐 둘걸.’
깨우침을 얻은 각성자 이승권이 ‘본좌의 힘을 쬐끔만 보여 주겠다.’ 하고 중얼거리며 천마군림보를 쓴다면 얼마나 멋있어 보이겠나. ‘퇴역병 천마님 아포칼립스에서 생존하신다’ 같은 제목으로 드라마 찍었으면 잘 팔렸을 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가리.”
콰직!
최강을 논하는 자리에서 항상 쌍검, 쌍권총과 함께 후보에 오르는 쌍도끼 아니랄까 봐 좀비 머리통 박살 내는 데 아주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도끼날에 묻은 피 기름을 털어 낸 나는 문득 좀비의 시체가 회색빛 입자로 변해 소멸하기 전, 놈들의 복부나 등짝 같은 넓은 신체 부위에 새겨진 이질적인 문양을 발견했다.
인간만 보면 이렇게 호전적으로 달려드는 놈에게 누가 겁도 없이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진 듯한 흔적이었다.
‘월계수와 비둘기?’
월계수와 비둘기는 서로 큰 연관성이 없지만, 국제 사회에서 좋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주로 평화와 조화를 나타낼 때 많이 사용하는 국밥 같은 상징인 데다, 이런 상징을 사용하는 국제 기구 및 민간 단체는 대체로 이미지도 좋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런 형편 좋은 국제 기구나 단체의 상징 문양이 좀비의 몸에 새겨질 일은 없다. 애초에 세상이 무법 지대로 변하면서 그런 부류는 가장 먼저 멸망했을 것이다. 무법자들은 원래 남 돕기 좋아하는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
‘어디서 많이 본 문양인데…….’
퍼억!
호기롭게 달려드는 좀비의 턱주가리에 도끼를 올려치듯 날을 때려 박고 그대로 들어 올려서 복부와 등짝을 확인했다. 역시나 이놈에게도 같은 문양이 인두로 지진 것처럼 새겨져 있었다.
“월계수, 비둘기…… 평화, 평화, 평화.”
새천년평화교.
6년 전에 2차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이 세상에서 모든 불화와 다툼, 분쟁은 사라져야 한다며, 전 인류의 영구적인 평화를 천명했던 교주의 뜻에 따라 반전 운동을 전개했던 사이비 종교 단체. 그놈들의 문양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찢기고 해진 옷 안쪽에 찍힌 이 작은 문양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애초에 각성자 대부분이 좀비의 모가지를 따고 나면 시체가 자연 소멸하는 것을 알고 그냥 지나치기도 했고.
손도끼에 턱이 들어 올려져 버둥거리던 좀비를 확실하게 끝장낸 뒤, 나는 다른 각성자들이 해치우고 지나간 다른 좀비들의 시체도 하나씩 살폈다.
지금 우리에게 달려드는 좀비들의 약 7~8할 정도가 복부나 등짝에 이런 문양이 찍혀 있었다.
“……좀비를 통제하는 각성자라도 있는 건가?”
내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퇴역병 스킬도 충분히 사기적이긴 하지만, 좀비 통제가 가능한 스킬이나 직업이 존재한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중의 진짜 아닌가.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에서 좀비에게 죽을 걱정은 없다는 건 사실상 무적이라는 걸 의미한다. 누군 좀비와 이 악물고 싸우는데, 자기만 좀비들의 틈바구니에서 안전하게 돌아다니며 생존할 수 있다는 거니까.
당연하지만 시스템이 그걸 용납할 리가 없다. 기묘하리만치 인간과 좀비 사이의 밸런스를 신경 쓰는 듯한 이 시스템은 철저하게 양측의 투쟁을 종용하고 있는데, 투쟁 그 자체를 부정하는 직업이나 스킬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시스템의 행보는 그랬다.’
나는 입자화되어 소멸하는 좀비의 시체를 바라보며, 새천년평화교를 상징하는 저 문양이 어떤 제한적인 조건으로 좀비를 통제할 수 있는 스킬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렇다면 상대가 우리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노골적으로 이 벽지에 좀비 대군이 나타난 것도 이해가 된다.
진가희가 열정적으로 마지막 좀비의 모가지까지 깔끔하게 베어 버렸을 때, 더 이상 전초 기지를 공격하는 좀비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일부러 총을 사용하지 않고 각성자의 힘만으로 좀비들을 처리하는 의도를 눈치채고서 더 이상 좀비를 보내지 않는 것이라면, 상대도 꽤나 영악한 놈이다. 우리가 좀비의 이질적인 움직임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는 거니까.
‘현재 전초 기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곳 안동시는 태백산맥에서 가장 커다란 물줄기를 끼고 있는 도시다.’
무려 도시의 절반가량을 가로지르는 이 거대한 물줄기는 자연적인 좀비 방파제로 작용한다. 좀비들은 수심이 최소 2m 이상인 물가는 단단히 얼어붙지 않는 한 바로 근처에 인간이 있어도 결코 건너오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미에서도 좀비들은 강을 건너지 않고 인간처럼 연결된 교각을 이용하거나, 아예 강둑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좀비가 물속에 들어가면 죽거나 행동 불능에 빠지는 건지, 아니면 그것도 시스템 영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안동이 이렇게까지 좀비로 시끄러울 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주변 지리에 익숙하거나, 최소한 지형을 확인할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정찰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산과 들판, 그리고 강이라면 이골이 났을 전직 엽사 한동석과 전직 땅꾼 박마춘 아재를 불러들였다.
평소 같았으면 최묵호도 불렀겠지만, 녀석은 실내전에 더 익숙한 강습병이었기 때문에 산악 환경같은 야전에서는 제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아 이곳에 남겨 두기로 했다.
좌우간 내 호출에 응한 한동석과 박마춘은 둘다 원거리 공격으로 쏠쏠하게 경험치와 DNA 샘플을 빨아먹었는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나와 알고 지내는 각성자들은 대부분 DNA 샘플을 이용해 상점창 이상의 서비스를 구입하고 있으니 기쁠 만했다.
“두 분만 따로 부른 이유는 아무래도 안동시에서, 혹은 더 위쪽 지역에서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같이 조사할 겸 근방 지형지물을 확인하고자 부른 겁니다.”
“이상 현상이라고 하신다면?”
“일반 좀비들이 좀 과할 정도로 호전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게다가 듣자 하니 선행 부대가 이곳에 전초 기지를 구축하면서 딱히 어그로를 끌지도 않았다고 했는데, 족집게처럼 핀포인트로 이곳을 노린 것도 이상하고요.”
“듣고 보니 이상한 것 같습니다. 좀비들도 평소에는 생존자들을 찾아 주변을 배회하기는 하지만, 이런 눈에 잘 띄지 않는 도시 외곽까지 우르르 몰려나와서 공격하는 건 조금……. 애초에 안동은 지방 도시 중에서도 인구 규모가 상당히 작은 축에 속하잖습니까.”
“좀비들 중에도 명령을 내리는 우두머리 개체 같은 게 있다는 걸 이미 구미에서 확인하지 않았나? 고것들이 장난을 친 건 아닌감?”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박마춘 아재가 그럴싸한 추리를 내놨지만, 이번만큼은 좀비들이 자발적으로 우리를 기습한 게 아닌 것 같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이 나온 김에 이것 좀 보시죠. 놈들의 시체가 사라지기 전에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월계수 잎과 비둘기 문양이 인두로 지진 것처럼 새겨져 있더군요.”
“이거…… 그 전국적으로 반전 운동 하던 사이비 놈들 문양 아닌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양이 왜 좀비들에게 새겨져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미리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두었던 걸 두 사람에게 보여 주자마자 곧바로 새천년평화교의 문양임을 알아차렸다. 5년간 군에 처박혀있던 나보다 전쟁 중에도 어찌어찌 사회생활을 하던 두 사람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문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젊은 사장은 이놈들이 우리가 오기 전에 어떤 수작질을 부렸을 것 같다?”
“대구 같은 대도시에서 군이 대거 움직이는데 적들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움직임을 대략적이나마 예측하고 미리 손을 썼겠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특히 경북과 강원도 일대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산과 강이니 수작질을 부리기에 최적의 환경입니다.”
우리가 괜히 강릉까지 연결된 지방 도시와 크고 작은 마을들 사이에 ‘라인’을 구축하는 게 아니다.
이 겨울에 군대를 아무런 준비 없이 거친 산맥으로 밀어 넣으면 진짜 좆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나마 최적의 루트를 짠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조금이라도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안다면 우리가 사용할 루트가 어디인지,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어느 정도 답을 도출했을 것이다.
즉 전초 기지를 습격한 좀비들은 우리의 움직임을 예측한 상대의 ‘찔러보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어차피 선봉대보다 한 발 더 앞서서 정찰팀이 움직여야 하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가 정찰팀 역할을 맡도록 하죠.”
“뭐, 산이라면 수십 년 넘게 질리도록 타 봤으니까 나는 상관없으이.”
“강원도 사나이쯤 되면 집보다 산이 더 편합니다, 하하.”
“잘됐네요. 그럼 바로 출발합시다.”
우리는 웅장한 태백산맥을 앞두고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