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수복기 (44)
이 바쁜 시기에 신해룡 육참총장의 호출을 받아 연락을 취해 보니, 현재 전초 기지 확보 및 보급과 통신 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한발 앞서 진출한 선행 부대가 애를 먹고 있다는 모양이다.
듣자 하니 지독한 한파가 불어닥치고 있는 한겨울에 전초 기지를 구축하는 것도 까다로운데, 대체 어디서 몰려오는 건지 알 수 없는 좀비들까지 자꾸 선행 부대를 기습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그만큼 어그로도 쉽게 끌리니까, 시각과 청각이 예민한 야생 좀비들이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것도 이해는 된다.
문제는 각성자가 아닌 일반 군인이 좀비에 대응하는 방법은 오직 총과 폭탄뿐이라는 건데, 이런 화약류 무기는 당장 눈앞의 적을 쉽고 빠르게 처리해 줄 수 있을지언정, 추가적인 어그로를 발생시키는 부작용이 있었다.
적을 처리하기 위해서 총을 쏘고 폭탄을 터뜨리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적들이 몰려오는 셈.
물론 선행 부대에 합류한 베테랑 각성자들이 큰 소음 없이 좀비들을 처리해 주고 있다지만, 애초에 선행 부대인 만큼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압도적인 화력과 머릿수를 자랑하는 본대였다면 좀비가 얼마나 몰려오든 싹 쓸어버리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겠으나, 일도 해야 하고 경계도 해야 하는 선행 부대는 그게 안 된다.
-자네가 이번 작전의 각성자 대표 겸 경남권 지역 대표 아닌가. 조금 이르긴 하지만 본대보다 먼저 출발해서 선행 부대를 도와줄 수 없겠나?
신해룡 육참총장도 이미 질러 버린 전쟁,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작부터 삐끗하는 건 더더욱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내게 조금 더 힘써 달라는 취지로 부탁해 왔다.
무전기 너머로 간곡히 부탁하는 그의 목소리에 나도 지금 바쁘니까 그건 안 될 것 같다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내가 밀어붙인 전쟁이고, 작전의 큰 틀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 전쟁에 참전하는 모든 이들의 생사여탈권에 대한 책임이 내게도 일부 존재하는 만큼 ‘나 하나쯤은’ 같은 마인드로 빠질 수는 없었다.
“스케줄이 빠듯하기는 하지만 이쪽에서도 준비가 거의 끝나 가고 있는 참입니다. 남은 건 제 동료들에게 맡겨 두면 되겠죠.”
-그럼 지금 당장 움직여 줄 수 있겠나?
“예, 곧 채비를 갖춰서 움직이겠습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저도 따로 부탁드리겠습니다만, 아마도 상대방 역시 우리의 움직임을 이미 눈치챘을 겁니다. 대놓고 경상도에서 인간 사냥을 하던 놈들인데 대구에 대해 모를 리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기밀 정보의 관리는 철저히 해 주십시오.”
-보안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나도 숙지하고 있네. 초임 장교 시절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내부자의 배신이나 실수에 의한 정보 유출이 아니라, 명백하게 적의를 가지고 숨어든 외부자에 의한 정보 유출을 말하는 겁니다. 제가 일부러 정보를 잘게 쪼개서 여러 사람들에게 배분한 이유는, 그들 모두가 현장에서 함께 협력하는 것으로 작전을 완성시키기 위함도 있지만, 정보가 통째로 적들에게 유출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내부자가 배신을 하거나 실수를 해도 커버할 수 있지만, 작정하고 깊숙이 파고든 적에게는 오히려 취약할 수도 있습니다.”
나와 김진경, 채성아 같은 몇몇 중요 인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전투원들에게는 그 직책과 전투력, 역할의 중요성에 따라 정보의 배분에 차등을 두었다.
예를 들어 각성자 유격대에서도 1팀은 A를 목표로 하게 되고, 2팀은 B를 목표로 움직이게끔 설계해 두었다. 최종적으로는 A와 B 모두 C라는 주요 목표로 이어지지만, A와 B를 한데 묶지 않는 것으로 전체적인 정보 유출의 위험성을 낮춘 것이다.
-그 부분은 나도 주의하고 있네. 다만 대구는 워낙 큰 도시인 만큼 빈틈이 너무 많아. 사람도 많고. 정상적인 방첩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 이곳에서 자네가 말하는 프락치나 적들의 감시망을 쉽게 파악하기는 힘들 것 같군. 어차피 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감출 수도 없게 됐으니 그 부분은 감안하려고 하네.
“예, 저도 현실적인 부분에서 한계가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보의 공유는 최소화하시되, 모든 전투 부대에 자신들의 역할과 목표를 정확히 인지시켜 주셔야 합니다. 정예한 군대도 결정적인 순간에 제대로 된 명령을 받지 못하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습니다. 경험담입니다.”
-……유념해 두지.
그와 짧은 연락을 끝낸 나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갖췄다.
“벌써 움직이냐?”
“전방에서 선행 부대가 애를 먹고 있다고 하니 각성자 유격대가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우리와 합류한 뒤로 약간의 휴식을 가진 뒤 본래의 컨디션을 되찾은 최묵호가 다가왔다. 피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놈이라 내가 싸우러 간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혼자 가냐? 아니면 나도?”
“각성자 손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니까 당연히 너도 가야지.”
“어떻게? 기차랑 지상 차량은 모두 수송 뺑뺑이 돌리고 있다면서.”
“어떻게는 염병, 당연히 날아서 가야지.”
영역 지정 스킬이 A등급까지 업그레이드되면서 부산역과 밀양역, 그리고 동대구역에서 동시에 운용할 수 있게 된 ATX가 15량까지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난 열차를 경상도 일대에 깔린 철도를 이용해 미친 듯이 뺑뺑이를 돌리고 있는데, 대부분은 전투원과 비전투원, 그리고 각종 물자를 실어 나르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각성자 몇 명 움직이는 데 바쁜 ATX를 붙들 수는 없으니, 결국 또 한 번 날아서 움직여야 했다.
“……설마 이번에도 그 지랄맞은 방식으로 이동하는 건 아니지? 그럴 바엔 난 그냥 기차 꽁무니에 메달려 간다.”
“인마, 네 몸값보다 UCAV 한 대가 훨씬 더 비싸. 최대 항속 거리가 100km밖에 안 되는 걸 누구 코에 붙인다고.”
“그럼?”
“우리가 누구냐. 북괴피셜로 ‘미제앞잡이’ 아니냐. 그럼 당연히 미제의 도움을 받아야지.”
U S A!
난 빌어먹을 USA가 너무 좋다.
우리는 두돈반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갈 때 미군은 쌔끈한 수송 헬기가 영화처럼 등장해서 군인을 픽업해 가는 걸 질리도록 봐 왔다.
코쟁이 형님들은 헬기 실컷 타 봤을 테니까 이제 우리 차례다.
나는 즉시 귓속말 기능을 이용해 나와 계약한 각성자들중 내가 지휘하는 유격대에 배치된 이들을 호출했다.
-훅! 아아, 당직실에서 전파한다. 현재 대구 군부 측에서 ‘대민 지원’을 요청하고 있으므로 나다 싶은 사람은 주저 없이 미군 기지 내 헬리포트로 뛰어오길 바란다. 수송 헬기 탑승 인원 선착순은 10명, 반복한다. 수송 헬기 탑승 인원 선착순은 10명. 가장 빨리 도착한 2명까지는 미니건 좌석 배치 가능함을 알린다.
귓속말을 보낸 것과 동시에 나는 군장을 챙겨서 최묵호와 함께 죽어라 달렸다. 미니건 좌석 배치는 못 참기 때문에.
미리 연락을 넣어 둔 미군 측에서는 이미 정비병들이 수송 헬기의 점검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인원은 없었다. 우리는 즉시 헬기 양측에 배치된 미니건 좌석을 하나씩 꿰찼다.
방탄 성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북한의 낡은 민가를 조지는 데 특화된 이 미니건은 압도적인 빨갱이 킬링 머신 그 자체였다.
크고, 우람하고, 아름답다.
미니건의 흑빛 총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심연 속의 전쟁 군주 악마가 자신과 계약해서 마법 소녀가 되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나와 묵호 아쎄이가 미군의 복잡미묘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크고 우람한 미니건과 정신적, 육체적으로 ‘교감’을 하고 있을 때, 뒤늦게 달려온 각성자 동료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아니, 진짜! 선착순 두 명까지라고 말해 놓고 자기들이 먼저 와 있으면 반칙 아니에요?!”
“이거 순 양아치구만!”
“아무리 젊은 사장이라지만 일등석을 독차지하는 건 좀 아니지!”
그들은 성난 원숭이 떼처럼 내게 비난을 아낌없이 퍼부었으나,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누가 늦게 오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단 말인가?
“꼬우면…… 아시죠?”
김해 군주 겸 부산 시장 후보 겸 구미의 환경 보호가 겸 포항의 CEO 되시는 이 이승권에게 감히 개길 자 누구인가.
덧붙여서 최묵호는 내 군 시절 동기라는 비선실세의 권력을 꿰차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난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눈빛만으로 ‘힘의 차이’를 보여 주자 그들은 이내 입을 다물고 하나둘씩 헬기에 탑승했다. 항공기로 치면 가장 값싸고 좁아터지고 불편한 이코노미석이었다.
각성자는 짐 챙겨서 인벤토리에 쑤셔 박고 몸만 움직이면 되는 편리한 인종이라 호출부터 집합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헬기도 상당히 빨리 뜰 수 있었다.
“그런데 각성자 유격대는 며칠 뒤에 본대와 함께 움직이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호출한 건데요?!”
내 옆자리에 앉은 진가희가 큼지막한 헤드셋으로 흩날리는 머리를 짓누르며 외쳐 물었다.
“급한 대민 지원이라고 했잖아! 미필 티 내지 말고 적당히 알아들어!!”
“아씨! 꼬우면 여자도 군대 보내시든가!”
“어, 이미 보냈어~!”
각성자 유격대 자진 입대를 환영한다, 가희 아쎄이!
칼 한자루로세상을평정할수있어 유격대원님께서는 뭐가 그리도 불만이신지 오리주둥이처럼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상태로 고개를 홱 돌렸다.
생각해보니 지금 이 헬기에 탑승한 인원 중 99%가 군필이고, 진가희만 유일하게 미필 여고생(아님)이었다. 남녀가 서로 공감하기 힘들듯, 군필과 미필의 공감대 형성 또한 이토록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본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작전 준비를 하고 있는 채성아와 김진경만큼이나 각성자 유격대원들 역시 적잖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들 나름대로 훈련을 하거나, 동료와 정보를 교환하면서 더 효율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강구하는 등, 내가 일일이 신경 써 주지 않아도 알아서 먹고 자고 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노력한 사람들 중 한 명인 진가희가 고작 미필이라는 사소한 찐빠 하나 때문에 차별받아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산 시장 후보 이승권은 해냅니다. 진정한 남녀평등을.
“흠흠! 대민 지원이라고 뭉뚱그려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이제부터 ‘선봉대’가 되는 거다! 현재 대구에서 강릉으로 향하기 위한 2개의 루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안동과 영주로 올라가서 평창으로 진입해 강릉의 옆구리를 치는 A루트 그리고 해안 도로가 잘 깔려 있는 포항과 울진, 동해를 이용해 강릉의 거시기를 치는 B루트다!”
“아니, 거시기가 뭐예요, 거시기가!”
아뿔싸!
부산 시장 후보 이 모 씨가 막말 논란으로 인터넷의 뜨거운 감자가 되는 미래가 그려진다.
다행히 구세주 한동석이 적절하게 공을 받아 어머니의 손맛이 깃든 등짝 스매싱을 날려 주었다.
“악! 왜 때려 아재!”
“喝!!!!! 자고로 사장님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법이여……!”
“입도 심심한데 다들 뱀술 한 잔씩 할 텨?!”
“좋지, 한 잔 말아 주쇼!”
“아니, 미자도 있는데 술을 마시면 어떡합니까!”
“헬기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지적해야죠!”
“…….”
내가 모은 정예 각성자들이지만 참 잘 모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양반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경험치를 획득하지 않아도 레벨 업을 하는 기분이다.
그렇게 우리를 태운 수송 헬기는 경남권을 빠르게 벗어나 전운이 감돌고 있는 경북권 상공에 도달했다.
기존의 작계와는 조금 다른 움직임이지만, 어차피 각성자들이 움직여야 할 일이라면 우리가 선봉대로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시끌벅적한 헬기 내에서 조용히 미니건의 총대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