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수복기 (42)
세상이 격변을 맞이한 것과 동시에 기존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득권 계층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휴지 쪼가리에 불과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절대적인 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곧 힘이었지만 각성주의 사회로 변모한 지금은 오직 각성 유무에 따라 철저히 계층이 나뉘었다.
각성자는 지배층, 비각성자는 피지배층.
마치 로열 블러드(왕족)만이 만인의 위에 군림할 수 있었던 옛 시대처럼, 이제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각성자들만이 세상을 지배할 권리를 가지게 된 셈이다.
“오늘은 물이 좋군.”
한 남자가 투명한 크리스탈 잔에 소량 담긴 고급 위스키를 살짝 흔들어 공기 중에 매혹적인 향을 흩뿌렸다.
술을 맛으로 즐기는 건 삼류, 색을 즐기는 건 이류, 향을 즐기는 것이 진정한 일류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시국에 걸맞지 않은 사치스러운 여유를 즐기며 자신의 권위를 드러냈다.
물론 그가 ‘오늘 물이 좋다’고 언급한 이유는 비단 자신의 손에 들린 고급 위스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 바깥에서 들려오는 약자들의 절규로 이루어진 하모니가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고, 저들의 무가치한 육신에서 최대 효율로 뽑아낸 경험치와 DNA 샘플이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안 돼! 제발 목숨만은……!”
“시키는 대로 다 했잖소!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애… 불쌍한 우리 애……!”
“이 개새끼들아! 천벌 받을 새끼들! 너희가 그러고도 정녕 사람이냐! 지옥이 두렵지 않은…… 컥?!”
“엄마! 엄마아아아아아아아악!”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고, 언제 봐도 늘 새로운 광경이다.
대한제국파의 수장이자 자국의 전쟁을 이용해 순식간에 국내의 암시장을 지배한 암흑계의 대부.
대한민국 양지에는 헌법이 인정하는 대통령이 존재한다면, 대한민국의 음지에서는 모든 범죄자와 테러리스트가 인정하는 대통령이 바로 그였다.
대한민국에 불화와 죽음을 퍼뜨린 역병 그 자체.
통칭 죽음의 상인 한대상.
그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특등석에 앉아 진한 죽음의 향을 음미하고 있는 것을 딱히 이상하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강릉 전체가 이미 그의 손바닥 위였고, 강원도의 타 도시나 산골을 하나씩 꿰찬 사이비 신도들과 테러리스트 고객들도 그 부분에 대해선 딱히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애초에 세상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도 대한민국 경찰과 군대는 그를 어쩌지 못했다.
세계 최강국이라 불리는 미국도 오사마 빈라덴 하나를 잡기 위해 무려 10년을 허비했는데, 하물며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이 나라의 윗대가리들이 그를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필요하다면 도심 한복판의 하수도, 깊은 산속의 동굴, 혹은 이 나라에 수천 개가 넘는 무인도까지. 용케 발각되지 않고 거점을 옮겨 가면서 무기를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꾸준히 상품을 판매했다.
그 결과, 내부의 분탕질을 견디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는 허울뿐인 범죄와의 전쟁만 선포하는 것에 그쳤다. 그가 이끄는 대한제국파의 꼬리만 신나게 잡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것이다.
보라!
성공한 것도, 살아남은 것도, 새로운 시대의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자신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무능한 머저리들은 이미 소리 소문 없이 죽었거나 어디 구석에 처박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자신 같은 각성자들은 이렇게 구시대의 잔재나 다름없는 ‘발판’을 딛고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어찌 나라의 홍복(洪福)이 아니겠는가?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똑똑.
그때 들려오는 조용한 노크 소리에 한대상은 이미 향이 모두 날아가 버린 잔을 내려놓았다.
휘영청 밝은 달이 뜬 겨울밤 아래에서 이 정취와 유흥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지만, 하나둘씩 모여든 손님들이 어느덧 집주인의 등장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 슬슬 움직여야 할 때다.
“다 모였나?”
“예, 형님. 춘천의 사이비 놈들이 조금 늦긴 했습니다만 참가자 명단의 마지막 인원까지 도착한 것을 조금 전에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강릉과 거리가 조금 있으니 그 정도는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그런 놈들이라고 해도 일단은 우리 고객이 아니더냐.”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정신병자들이 형님의 관대함을 알기나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곧 알게 되겠지.”
자신의 비서 겸 충직한 오른팔인 황근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준 그는 화려한 조명과 세련된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복도를 걸었다.
주인 없이 버려진 고급 호텔을 개조한 것이라 다수의 투숙객들을 받는 숙박업소가 아닌, 마치 현대풍과 중세풍을 적절하게 섞은 거대한 성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쓸데없이 넓은 주제에 토지의 대부분을 산이 차지하고 있는 이 강원도에서 각기 다른 성향의 세력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했으니, 어떤 의미로는 상당히 역할에 충실한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황근철과 함께 회담 장소에 도착한 한대상은 자신에게 쏠리는 수많은 시선들을 잠시 ‘음미’했다.
저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소란스러운 시선과는 정반대로 약속이라도 한 듯 꾹 다물고 있는 입. 이는 곧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주변에서 그의 권위와 힘을 대변해 주는, 일종의 무대 장치나 다름없었기에.
오직 주인 되는 자, 가장 강한 자, 가장 높은 자만이 앉을 수 있는 상석에 앉아 천천히 좌중을 둘러본다.
으레 권력자가 그러하듯, 진중한 분위기와 무거운 침묵,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압박을 주고자 하는 허례허식이었다. 한대상은 이조차도 자리에 걸맞은 하나의 풍류라고 생각했다.
그런 한대상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현재 강원도를 삼분하고 있는 세력들 중, 두 개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이비 교단과 테러리스트 조직이었다.
그들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긴 직사각형 테이블을 양분하듯 마주 앉아 있었다.
본래 헬조선과 새천년평화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매우 잦은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실질적인 물주이자 무기 공급책인 한대상이 일시적으로 분쟁을 중재하고 이렇게 대화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분위기가 너무 경직되어 있군. 다들 연말정산을 앞둔 직장인들처럼 그렇게 예민해서야 쓰나.”
“저 사이비 새끼들이 사태의 심각성도 모르고 지각을 했으니 그러는 거 아니요. 알고도 지각했다면 더 괘씸하고.”
“형제님,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이 조금 급하다고 해서 어렵게 만든 평화를 함부로 깨서야 되겠습니까?”
“그 지랄맞은 평화 타령만 안 해도 벌써 문제의 반은 해결했겠다, 이 사이비 새끼들아. 그리고 평화에 미쳐 사는 놈들이 우리에게 그따위 짓을…….”
“그쯤 하지.”
모두가 인정하고 존중하고 경외하는 권위란 곧 범접할 수 없는 힘과 출중한 리더십에서 나오는 법.
한대상은 자신의 영역에서 타인이 경거망동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지금은 그런 일로 언성을 높일 이유가 없지 않나. 이런 바쁜 시기에, 서로 간에 쌓인 케케묵은 감정은 잠시 내려 두고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설마 내가 구태여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모를 리는 없을 테고…… 내 말이 틀린가?”
강원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대한 세력의 우두머리는 자연스럽게 웃어른의 포지션을 취할 수 있다.
새하얀 천에 비둘기와 월계수 잎이라는 상징적인 로고가 새겨진 로브를 뒤집어쓴 새천년평화교도, 화약내를 풀풀 풍기며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한 헬조선도 그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여럿 있지만,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뭔가?”
다 알면서도 굳이 되묻는 것만큼 재미없는 질의도 없지만, 이 자리에 한대상의 성정을 모르는 이들은 없는지라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국내 유일 테러리스트 조직인 헬조선을 이끄는 중년 사내가 나섰다.
“우리 헬조선의 중요한 보급창이자 미래의 위성 도시로 쓸 계획이었던 창원이 당했소. 창원에서 내 지령을 받으며 대구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내 단원들이 제3자에게 전멸을 당했는데, 내막을 파헤쳐 보니 대구에서부터 갑자기 두각을 드러낸 신흥 세력이더군. 거두절미하고, 창원 지부를 전멸시킨 그 신흥 세력의 머릿수가 얼마나 되었을 것 같소?”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이내 한 손을 활짝 펼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다섯. 고작 다섯에게 전멸당했소.”
“창원 지부에 있던 인원은 못해도 500 이상 아니었던가?”
“그랬지. 심지어 전멸당한 단원들 중 단 한 명도 그 신흥 세력의 일원을 저승길 동무로 데려가지 못했소. 모든 단원들은 단장인 나와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공적’도 확인할 수 있는데, 사살 공적에 그 다섯 명의 이름이 없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지. 그런 반면 해당 세력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인물 ‘이승권’. 이 개새끼는 무려 단원의 8할을 혼자서 처리했더군.”
강력한 각성자들에 의해 특정 거점이나 세력이 멸망하는 건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당장 자신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오히려 한대상은 헬조선 단원 수백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창원을 잃었다는 사실이 더 아쉬웠다.
“중요한 보급창이자 미래의 헬조선 위성 도시가 적의 손에 넘어간 것은 뼈아픈 손실이군. 특히 고작 다섯으로 100배 이상의 전력 차를 압도한 인물이 그 도시를 점거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어. 그것뿐인가?”
“후우, 거기까지라면 나도 이 자리에서 직접 얘기를 꺼내진 않았을 거요. 하지만 이 자리에서 최근 포항 일대에서 ‘가축’ 공급이 끊어진 사실을 모르는 양반은 없겠지.”
단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조소를 흘리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포항에 더 이상 공급할 가축이 없어져서 가축 공급이 중단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사냥꾼들과 공급업자들이 협력해 추가 물량을 확보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소. 그랬던 것을…… 바로 얼마 전에 어떤 놈이 박살을 내 버렸지.”
증거 자료가 없었던 창원과 달리, 이번에는 포항에 위치한 공급업자들의 아지트가 죄다 박살 난 흉물스러운 사진 몇 장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대량의 좀비 떼와 함께.
“언뜻 보면 도시 규모의 좀비 웨이브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전멸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포항에 남아 있는 공급업자들의 수를 생각해 보면 절대 그만한 수의 좀비 웨이브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쯤은 다들 알 거요.”
“또 제3자가 포항의 공급업자들을 덮쳤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승권.”
이미 한 번 들었던 그 이름이 또다시 언급되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헬조선 단장에게 집중되었다.
“공급업자들 사이에 심어 두었던 내 조직원이 이 사태에 휘말려 죽으면서 또다시 놈이 개입했다는 걸 알아냈지. 믿기지 않겠지만 놈은 창원을 점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울산을 거쳐 포항으로 올라와서 공급업자들의 멱을 모조리 따 버린 거요.”
“믿기 힘들군.”
“나도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믿고 싶지 않았소.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시스템은 우리 각성자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지. 즉 우리가 인정하든 말든, 이미 우리의 계획, 우리의 사업에 이승권이라는 놈이 흙발로 기어들어 와서 분탕을 친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 이거요!”
헬조선 단장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열변을 늘어놓자 한대상은 흥미롭게 사진을 살폈다.
사진 속에는 포항의 여러 공급업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아지트가 마구잡이로 파괴되어 있었다. 또한 헬조선 단장의 말마따나 좀비들의 일반적인 파괴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인간의 소행임이 확실했다.
특히 폭발물을 이용한 파괴 흔적이 가장 눈에 띄었는데, 현시점에서 충분한 보급 체계를 갖춘 군대가 아니면 일반인이 폭발물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설령 상점창을 개방한 각성자라고 해도 폭발물처럼 강력한 무기는 쉽게 구입하기 힘들다.
시스템은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밸런스를 저해하는 요소는 아예 배제하거나, 필요 이상의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방식으로 각성자들의 행동 양식과 사고를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누군가가 특수한 직업으로 각성했거나, 자신처럼 처음부터 엄청난 양의 군수 물자를 소지하고 있지 않은 한, 이제 현대적인 전쟁을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벌써 두 번이나 언급된 이 이승권이라는 남자는 명백하게 이질적이었다.
무려 100배 이상의 전력 차를 손실 하나 없이 압도한다든가, 제법 많은 각성자들과 범죄자 집단이 자리 잡고 있는 포항을 일거에 쓸어버린다든가, 같은 말도 안 되는 결과들을 보여 주었다.
매우 강력한 각성자임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거리낌 없이 다수의 인간을 학살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전투 경험과 강인한 정신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마지막 퍼즐이 하나 빠진 느낌이라 조용히 헬조선 단장을 바라보니, 곧 그가 마지막 퍼즐을 제공해 주었다.
“결정적으로 이 이승권이라는 놈, 북진군 출신이요.”
북진군 출신이라는 한마디에 어째서 헬조선 단장이 경기를 일으키듯 격하게 반응하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그렇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흥미롭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