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수복기 (41)
에빈 부함장은 갑작스럽게 자신들을 고용하고 싶다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용병 계약… 말씀이십니까? 확실히 머지않아 그런 제안을 받게 될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렇기에 이유를 묻고 싶군요.”
“이 땅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기가 무섭게 그의 표정이 굳었다.
전쟁이란 군인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하고 두려운 단어이기 때문에 그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이 나라는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난 지 이제 1년하고도 조금 더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갑작스럽게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몹시 당황스럽군요. 저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들을 상대로 전쟁이란 단어를 가벼이 입에 담지는 않으셨을 테고, 이미 적대 중이거나 곧 적대하게 될 생존자 세력이 있는 모양이군요.”
“예. 이런 시국에 무고한 민간인을 다수 납치하여, 좀비를 사육하기 위한 먹이로 사용하거나 노예로 삼는 미치광이들이 강원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라 확 와닿지 않으시겠지만, 제 믿음직한 동기들이 강원도에 머물며 증거를 낱낱이 수집했습니다.”
내가 슬쩍 눈짓하니 최묵호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증거 자료를 에빈 부함장에게 내밀었다. 신해룡 육참총장에게도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증거였다.
스마트폰 속에 찍혀 있는 수백, 수천 장의 사진과 동영상에는 인간이길 포기한 짐승들이 종말을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 여과 없이 보여 주었다.
인터넷의 가장 깊숙한 어둠이라는 다크웹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잔혹한 스너프 필름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겠다고 생각될 만큼,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참극이 에빈 부함장의 눈과 귀를 통해 인식되었다.
미군은 우리와 달리 대부분 순환 근무에 의해 짧으면 반년, 길어도 1년 정도면 한반도를 떠났다. 그 말인즉슨 우리보다 이런 광경에 대한 내성이 낮다는 거다.
“빌어먹을. 아프간에서도 종종 미군 포로나 현지 협력자를 붙잡아서 잔혹하게 고문하고 참수하는 영상을 접한 적은 있었지만, 이건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 아니죠. 우리가 추정하고 있는 희생자들의 수만 해도 가볍게 2~3백만을 넘습니다.”
“Fuck! 전쟁 중인 적성국의 군인도 아니고, 어떻게 같은 국가의 국민들을…… 그것도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을 그렇게까지 학살할 수 있는 겁니까?!”
미군이 치를 떠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을 건드리는 행위다.
당연히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고문, 학살하는 등의 행위는 국제법상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도 하지만, 미국은 유독 그런 경향이 짙었다.
설령 자국 군대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적성국의 민간인에게 절대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전술 교리에 못 박아 둘 정도다.
그런 국가의 군인에게 민간인들이 끔찍하게 살해당하거나, 짐승만도 못한 노예 취급을 받고 있는 증거를 보여 주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이 땅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당연히 막아야 합니다. 그럴 힘이 없다면 모를까, 다행히 현재 아군의 비전투 손실율이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함장님께도 이 증거 자료와 함께 미스터 리의 제안을 전달한다면 분명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실 겁니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군을 동원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겠으나, 문제는 보급입니다. 탄약, 의약품, 개인 화기, 피복, 식료품 등 다수의 군대를 움직이려면 체계적이면서도 부족함 없는 보급이 필수적입니다. 미스터 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이 도시에서 제 소유의 공업 단지가 한창 가동 중이라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양산 체계는 이미 확립해 두었고, 제품 생산을 위한 원자재와 현장 기술직, 연구자의 확보도 끝내 두었습니다. 게다가 공업 단지가 이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죠. 김해에도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탄약, 의약품, 개인 화기, 피복, 식료품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물자도 장기 보급이 가능합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보급일 뿐이고, 미군이 협력해 준다면 협의한 계약 내용에 따라 보수도 따로 지급해 드릴 겁니다. 화폐나 금품은 의미가 없는 시대이니 현물로 지급하겠지만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에빈 부함장은 어찌어찌 겨울을 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내심 군인들과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민간인들의 각종 물자 수요가 급증하고 있음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프리랜서들이 원래 계약을 따내야 먹고 살 수 있듯이, 자국 정부와 연락이 닿지 않는 지금 그들도 계약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민간 용병 기업(PMC)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전쟁을 종용하러 온 것이었다면 설령 미스터 리의 부탁이었다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눠 보니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타국 국민들을 위해서 다시 한번 위험을 무릅쓰고 협력해 주겠다는 여러분께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다만 사태가 일각을 다투고 있는 만큼 확실한 답변을 빠른 시일 내에 들었으면 합니다.”
“적어도 내일 중으로는 함장님을 통해 공식적인 답변을 듣게 되실 겁니다. 덧붙여서 지금쯤이면 군함의 정비도 거의 다 끝났을 테니 출격 준비가 끝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군함에 물자 적재가 용이하도록 사람들을 시켜서 미리 물자를 항구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미 해군의 결정권자인 함장의 공식적인 답변은 아직 듣지도 못했지만, 에빈 부함장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 건은 무조건 통과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혹시라도 함장이 우리의 참전 제안을 거부한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다.
그렇게 되면 나는 즉시 에빈 부함장을 통해 개개인 단위로 보수를 받고 일할 미군을 따로 모집해서 데리고 갈 생각이니까.
당장 지옥 같은 겨울을 나기 위해 창원에 자리 잡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군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들이 이곳에서 확실하게 기반을 다지고 미래에 대비하려면 적절한 일과 보수가 필요한데, 그걸 제공해 줄 수 있는 건 내가 유일하다.
뭐,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에빈 부함장의 반응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그때, 깔끔하게 얘기를 마무리 짓고 떠나려던 우리를 에빈 부함장이 붙들었다.
“그런데 미스터 리,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독도함의 함장에게는 이 얘기를 전달했습니까?”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할 생각도 없고요. 나중에 선조치 후보고라는 형태로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음, 미스터 리가 이끄는 생존자 집단과 독도함 측의 고위 인사들이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대충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 경우에는 대한민국 내부의 문제 아닙니까. 혹시 압니까? 독도함의 협조도 받을 수 있다면 저 짐승 같은 놈들을 토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필요로 하는 건 우리와 함께 싸워 줄 사람들이지, 우리보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정치적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위선적인 도움을 주는 아귀 집단이 아닙니다.”
신해룡에게는 잘못에 대한 책임이라는 형태로 협조(대가)를 받아 낸 것이고, 미군에게는 내가 최소한의 체면치레(보수)를 하는 대신 도움(협력)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을 필두로 움직이는 국군 측은? 아마 우리가 이 정보를 가지고 가면 십중팔구 우리를 휘어잡으려 들 것이다.
마침 저쪽에는 군 최고 통수권자라는 대통령도 있겠다, 전쟁은 전직 병사가 아니라 현역 지휘관이 지휘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독도함 함장도 있겠다, 벌써부터 우리 머리 위에서 놀겠다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일전에 협상 테이블에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눠 봤기 때문에, 굳이 이 문제를 들고 가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한 미래가 보인다.
적당한 시기에 신해룡 육참총장과 저들을 연결해 주면 저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을 테니, 그때까지는 내 일을 방해하거나 숟가락을 올리지 못하도록 깜깜이 상태로 방치하는 게 낫다.
“저는 이런 문제에 사사로운 정치나 권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괜히 저들에게 감 놔라 배 놔라 소리 들으며 스트레스 받느니, 그냥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전문가들만 나서서 깔끔하게 해결하는 게 베스트입니다.”
“으음, 그렇게 되면 추후에 우리도 저들의 공식적인 항의를 피할 수 없겠군요.”
“그때가 되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부탁 하나 더 하죠. 만약 예정대로 함장님께서 협조하겠다고 하신다면 출격 준비를 할 때 가능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부탁드립니다. 저들에게 괜히 꼬투리 잡히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 부분도 함장님께 전달하겠습니다. 병사들 입단속도 좀 시켜야겠군요.”
무슨 비밀 작전 준비하는 007 요원도 아니고, 우리는 서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인원 확보는 얼추 끝났다.’
대구에서 동원하게 될 병력만 최소 1개 사단 이상, 용병처럼 따로 보수를 지급하는 형태로 협조를 구한 각성자들은 대략 1~2천.
창원에서 우리와 함께해 줄 미 해군은 군함 1척과 지상 작전이 가능한 해병대 수십 명.
마지막으로 내가 이끄는 각성자 집단에서 따로 징발하게 될 각성자 수십과 훈련시킨 군인 500명.
병력 규모도 제각각이고 합동 훈련 한 번 해 본 적 없는 임시 연합군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사태를 일각을 다투고 있다.
‘좀비 사태가 발발한 이후부터 포항과 강원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면 대비라도 했을 텐데.’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80일이 흐르는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고, 그에 비해 수집할 수 있었던 외부 정보는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정보를 알게 된 이후에도 사실 나와는 하등 관계없는 일 아니냐며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들이 벌이는 행태와 추악한 목적을 알게 된 지금은 더 이상 무시할 수만도 없게 되었다. 애초에 다음 타깃이 우리인 것은 거의 확정 사실 아닌가.
지금 나는 몽골군이 쳐들어올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중세 유럽의 변방 지역 영주가 된 기분이다.
세상이 그냥 다 좆같고, 괜히 억까당하는 느낌이라 억울하고, 그럼에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라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
이런 입장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내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나는 최대한 빨리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해 최묵호와 함께 바삐 움직였다.
강릉 초토화 작전에 투입될 모든 전투원에게 군수 물자를 보급하고, 실전 경험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지휘 체계와 전술 교리, 작전 교범을 때려 박고,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하며, 각성자와 비각성자 전투원에게 걸맞은 역할 분담까지 책임져야 한다.
이 모든 준비 과정에만 최소 사흘에서 일주일 이상 걸릴 것이라고 본다.
게다가 무턱대고 병력을 진군시키기만 하는 것으로 전쟁이 애새끼들 소꿉장난처럼 쉽게 흘러간다는 보장도 없으니, 통신과 보급선을 확실히 깔아 두고 병참을 포함한 전초 기지도 여럿 세우면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본대 앞에는 선행 부대, 선행 부대 앞에는 극소수의 정예로 구성된 정찰 팀을 여럿 배치하는 것도 상식 중의 상식이다.
또 뭘 준비해야 하지? 뭘 대비해야 하지? 아군의 피해는 가능한 줄이면서 적의 피해를 증대하려면 어떤 세부 작전을 짜야 하지? 애초에 나는…….
빡!
“아직 전쟁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과몰입하지 마라.”
“…….”
나는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최묵호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일어날 전쟁은 일어나게 돼 있어.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다는 건 반드시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다는 소리야. 이미 진득하게 겪어 봤으면서 왜 그래? 아니면 요 1년 사이에 감이 무뎌지기라도 했냐?”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지금도 사람을 믿지는 않지만, 전쟁의 참상과 국가적 재난인 좀비 사태의 비극을 겪으면서 내 주변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은 배웠다.
모든 인간이 같을 수는 없지만, 목숨의 가치만큼은 같은 법이니까.
그 가치를 훼손하고 위협하는 놈들을 단호하게 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그 과정에서 잃게 될 또 다른 목숨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쿡쿡 쑤시고 입맛이 썼다.
아무것도 모르는 높으신 분들 때문에 일어났던 수많은 역사 속 비극을, 이제 내가 높으신 분이라도 된 양 재현하는 것 같아서 자괴감과 혐오감이 치솟는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그냥 최선을 다하고,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찢고 죽여야 할 놈들을 찢고 죽이는 것뿐인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 있냐?”
“그때는 일개 병사였던 내게 책임이 없었지만, 지금은 책임이 생겼잖아.”
“아니지. 네가 모두를 대신해서 총대를 멘 거야. 누구도 원하지 않는 총대를 멘 사람은 원래 까방권 있는 거 몰라?”
까방권이라. 현실에 그런 편리한 기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묵호 아쎄이 덕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머리가 조금은 식었다.
“가자. 저 좆같은 새끼들한테 크리스마스 선물 줘야지.”
크리스마스에 세계를 붉게 물들이는 건 ‘상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