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수복기 (40)
전쟁, 전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전쟁이 터지면 언제나 사람이 죽고, 건물이 무너지고, 문화와 문명이 불타오른다.
인간이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종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고, 그곳에는 오직 광기 어린 이념만이 남게 된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에게 아무리 빌어 봤자 떨어질 폭탄은 떨어지고, 날아들 총탄은 날아든다.
제발 이 사람만은 살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어도, 사소한 출혈 하나 잡지 못하면 싸늘하게 식은 전우의 주검을 후방으로 떠나보내야 한다.
최초의 인류가 최초의 투쟁을 시작한 그 시점부터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절대적인 진리이자 법칙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다가오면 마땅히 모두가 피를 흘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라는 놈은 반드시 누군가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절대로 만족하지 않는 흡혈귀 같은 것이라, 명분이 있든 없든 누군가의 고통과 절망, 죽음이라는 산 제물을 받은 후에야 우리 곁을 떠났다.
전쟁에서 피를 흘리는 절대다수가 손짓 하나로 명령을 내리고, 서면으로 보고를 받는 권력자들에게 등 떠밀린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이 지독한 악폐습은 절대로 고쳐지지 않았다.
사실 평화의 시대 같은 건 이상향을 꿈꾸는 몽상가들의 개소리에 불과하고, 오직 전쟁이 일어난 후와 일어나기 전의 시대만 존재할 뿐이라고, 세계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전쟁을 겪어 본 자들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반드시 전쟁만큼은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말이 맞다.
문명사회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법과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용납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처럼, ‘모두가 불행해지는 전쟁만큼은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게 옳으니까.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동족상잔의 굴레에 빠지는 건 그 자체로 비극이고, 전 인류의 손실이니까.
전쟁을 통해 기술의 발전이 있을지언정 문명은 퇴보하고, 전쟁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하는 이들이 있을지언정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이들이 한 무더기인 것이 바로 전쟁이다.
평화를 부르짖고, 반전을 외치고, 화해를 종용하고, 조화를 꿈꾸는 건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옳고 절대적으로 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발발한 이유는, 인류 개개인에게는 절대로 포기할 수도, 양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선’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사회가 개개인의 삶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선’을 지키고, 관철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그 결과 또 다른 개인과 충돌하고, 투쟁하고, 종국에는 전쟁으로 끝장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전쟁을 입에 담았다.
나는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니까.
따라서 내가 가진 ‘선’을 포기할 생각도, 양보할 생각도 없기에 타인이 이 ‘선’을 넘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선’은 내 인생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뚝 떼어 간신히 만들어 낸, 흡사 어린아이의 찰흙 놀이 결과만도 못한 졸작이다.
무고한 사람은 고통받으면 안 된다.
무고한 사람이 죄를 뒤집어쓰면 안 된다.
무고한 사람이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면 안 된다.
몸소 전쟁을 겪으며 무고(無辜)란 무엇인가, 거기에 어떤 기준이 있고, 어떤 시선으로 판단하여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끝에 완성한 나만의 ‘선’이다.
나는 무고한 이들을 지키고자 부모의 부고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총을 들고 적들과 싸웠으며, 나는 무고한 이들을 대변하기 위해 전쟁 범죄를 저지른 북한군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처형했다.
역사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여러 지도자나,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든 이들에겐 다양한 이유와 명분이 존재할 것이다.
이제 나 또한 그들과 별다를 것 없는, 그저 ‘내 손으로 지킨 나라에서 무고한 이들이 고통받지 말아야 한다.’는 허울 좋은 변명만을 내세운 전쟁광에 불과하다.
“여기가 창원이란 말이지.”
강원도에서 포항, 포항에서 대구, 대구에서 창원까지 내려오게 된 최묵호가 살짝 감상에 젖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대구에서 신해룡 육참총장과 담판을 지은 나와 최묵호는 곧바로 동대구역에서 ATX를 타고 움직였다.
최묵호가 동기들이 강원도에서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 탓에 어쩔 수 없이 휴식 시간도 잘라 내야 했다.
그렇게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를 죽이고, 공평하게 모두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전쟁이 확정된 지금, 우리는 추악하게도 더 많은 병력과 군수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자 창원으로 왔다.
“전 세계가 그 난리를 겪었는데 네 기차만 멀쩡하게 움직이고, 이젠 네가 관리하는 공장들만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단 말이지. 확실히 일반적인 각성자랑은 급이 다른데?”
“난 원래 어나더 레벨이었어.”
“흐흐, 미친 새끼.”
최묵호는 포항의 유명한 제철소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군수 공장에 감탄했다.
사실 포항의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그쪽의 버려진 제철소를 내가 확보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촉박해져서 일단 후일로 미뤄 두었다.
항구, 조선소, 제철소, 농장, 거주 영역 등등 내가 영역으로 삼아야 할 장소는 넘쳐 났는데 스킬 시전은 3일에 한 번씩 가능했으니 벌써 예약 스케줄도 엄청 밀렸다.
만약 김주윤이 그때 개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면 그 빌딩을 내가 탈취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차치하고, 영역 지정 스킬이 A- 등급으로 업그레이드된 덕분에 공장의 규모가 더 커졌을 뿐만 아니라 자원 자동 생산 기능이 추가되었고, 기존의 반자동화 시스템도 거의 완전 자동화로 바뀐 것을 확인했다.
문외한인 내가 괜히 공장에 방문해서 이것저것 건드리는 것보단,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군수 공장 근로자들과 연구원들에게 관리를 맡겨 두면 된다. 김해의 남부 공업 단지도 이미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저 창원의 공업 단지와 김해의 공업 단지에서 미친 듯이 찍어 낸 군수 물자들이 이미 거점 창고에 어마어마하게 쌓였어. 어지간한 규모의 군대는 충분히 무장시키고 전쟁을 지속시킬 수 있을 만큼 여유는 돼. 진짜 중요한 건 군수 물자가 아니라 직접 싸워 줄 사람을 구하는 거야.”
“대구에선 이미 육참총장에게 확답을 받았는데 창원에서도 얘기를 나눠야 할 사람이 또 있냐?
“지금 창원에 누구 있게?”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병신아.”
“대통령 있다.”
“…….”
대통령 얘기가 나오자 최묵호는 잠시 벙찐 얼굴이 되었다.
우리 입장에서 전직 대통령은 찢어 죽일 놈이고, 현 대통령은 우리랑 데면데면한 관계다.
“전 대통령은 아니지?”
“현 대통령이야. 사태 초기에 서울에서 측근들이랑 헬기 타고 동해까지 날아가서 독도함에 의탁했다더라. 네가 아직 강원도에 있을 때 창원에서 만났다.”
“그럼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 빤스런 대통령이네. 아니, 이미 나라가 망했으니까 대통령도 아닌가?”
“글쎄, 본인은 이 악물고 대통령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고 싶어 하던데?”
협상 자리에서 대놓고 자신이 정치적 편의를 봐줄 테니 은근슬쩍 나를 끌어들이려 시도했던 것만 봐도 권력자 특유의 야망이 엿보였다.
특히 신해룡과 비슷한 부류이면서도 근본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는 인물인데, 신해룡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싶어 하는 보수주의적 면모가 짙었다면 대통령은 상황 그 자체를 이용해 이득을 보려는 기회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둘 다 우리 입장에선 썩 내키지 않는 타입이고 가급적 멀리하고 싶은 인물들이지만, 최소한 적이 아니라면 필요에 따라 서로 협력하거나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 뺀질뺀질한 인상의 대통령 만나러 가는 거냐? 말뿐인 동원령이나 계엄령 선포해 달라고?”
“구국의 결단을 내려 주십사 하고 간청해야 할 인물은 그럴 힘과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나 하는 거야. 신해룡은 그럴 힘이 있었지만 의지가 없어서 내가 강제로 끌어들였고, 이 도시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대통령은 힘이 없는데 의지만 충만하면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 처음부터 배제하는 게 상책이지.”
대통령 밑에서 알랑방귀를 뀌고 딸랑대는 독도함의 함장과 그 휘하 측근들도 마찬가지다. 괜히 그들과 얽혀 봤자 또 복잡한 정치로 내 속을 뒤집어 놓을 것 같으니 아예 접선도 안 할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면 저들도 나중에 강원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또 대한민국 육군이 아직 건재한지 알게 되겠지만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문제다.
난 전쟁에 정치를 관여시키고 싶지 않다.
“그럼 창원까지 내려와서 자칭 대통령도, 그 양반 보호해 주는 국군도 아니면 대체 누굴 만날 건데?”
“미군.”
갓 블레스 아메리카!
항상 굶주리고 지쳐 있던 우리에게 일용할 MRE를 내려 주시고, 야간 투시경 긴빠이를 허락해 주시니, 그 하해와 같은 은총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우리는 국군 측과 마찬가지로 미군 측에게 따로 떼어 준 미군 전용 생활 구역으로 향했다.
창원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미군은 더 이상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돌 필요가 없어지자, 정치적 성향이 짙게 밴 국군과 조금 거리를 두면서 내가 이끄는 생존자 집단과 자주 교류하기 시작했다.
창원에서 도시 관리 업무를 임시로 담당하고 있는 채성아와 김진경이 내게 주기적으로 보고를 해 왔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미군은 생활 전반에 필요한 생필품과 의약품을 얻기 위해 창원 외곽 경계 근무와 자잘하게 흘러들어 오는 좀비 소탕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힘들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적당한 일을 맡기고 그 대가로 넉넉하게 물자를 내어 준 덕분에 어느샌가 양 집단 간에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미군 생활 구역으로 접근해 왔음에도 초병들이 우리를 무턱대고 제지하지 않았다. 나 이승권은 이미 경남권의 아이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사실 일개 초병이라고 해도 나를 모를 수가 없었다.
“기, 긴빠이 마스터다! 이번에는 자기 부하까지 데려왔다!”
“그 예언이 맞았어! 우린 이제 다 긴빠이당할 거야!”
“모두 MRE와 고가의 장비를 숨겨라! 반복한다! 모두 MRE와 고가의 장비를 숨겨라!”
아무리 미군 MRE가 국군 전식보다 맛있고 영양이 풍부해도 이제 그런 것에 일희일비할 만큼 굶주린 건 아닌데. 물론 여전히 미군만 쓰는 비싸고 성능 좋은 야간 투시경은 탐이 난다.
좌우간 우리는 괜히 호들갑을 떨며 무전을 치는 미군 초병들을 지나쳐, 새롭게 단장한 병원에 자리 잡은 미군 임시 기지에 방문했다.
창원에서 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미군 장교들은 마치 사단장의 기습 침투 보고를 받은 대대장처럼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마스터, 아니 미스터 리! 이렇게 연락도 갑자기 찾아오면 어떡합니까? 기별이라도 넣어 줬다면 우리가 직접 마중을 나갔을 텐데……”
“어쩌다 보니 시간은 촉박한데 당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겨서, 이렇게 급하게 찾아오게 됐습니다. 미리 연락을 넣지 않은 점에 대해선 사과드리겠습니다.”
일전에 협상장에서 나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고, 지금은 미군 임시 기지의 관리를 맡고 있는 에빈 마커스 부함장과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아닙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보다 옆에 계신 분은……?”
“저와 함께 미군의 MRE에 참 많이 신세를 졌던 친구들 중 한 명입니다. 중요한 참고인이라 데려왔습니다.”
“아, 그 3인조.”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나와 함께 미 야전 부대를 털고 다녔던 3인조로 이해하는 걸 보니, 이미 미 해군 내에서도 우리 얘기가 도시 전설이나 괴담처럼 유명해진 것 같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날도 춥고, 여긴 보는 눈도 많습니다.”
남부 지방은 한겨울에도 기온이 미친 듯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바다와 인접해 있다 보니 칼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댔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 깔끔하게 정리된 병원 내부로 들어가니, 예상대로 바다 생활을 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몇몇 이들이 병실에서 치료받고 있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창원에 자리 잡기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먹지 못하거나 청결 상태를 유지하지 못해, 건강한 사람이라면 잘 걸리지 않는 감기 몸살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영양과 위생 문제로 몸이 쇠약해지면 누구라도 몸져누울 수밖에 없으니 마냥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대로 잘 먹고 잘 쉰다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들 병석을 털고 일어나리라.
“우선 우리가 무사히 겨울을 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점에 대해서 미 해군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배의 관리를 맡고 계신 함장님께서도 꼭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우리도 과분할 정도로 도움을 받았는데, 받은 만큼 베푸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쟁 중에 달달한 것이 너무 먹고 싶어서, 미군 MRE에 잔뜩 들어 있던 초콜릿이나 사탕 따위에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긴빠이의 끝은 사회 환원이라고, 내가 가장 절박했던 시기에 누렸던 것을 상대가 가장 절박한 시기에 누리게 해 주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렇게 서로 자잘한 공치사와 안부를 주고받은 우리는 마침내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이제부터 좋았던 분위기를 헤치게 될 것 같아 몹시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어렵사리 본론을 꺼냈다.
“갑작스럽지만 군함을 비롯해 현재 가용할 수 있는 미 해군 대부분을 고용하고 싶습니다, 충분한 대가를 지급하는 용병 계약이라는 형태로.”
나는 우리 조직의 기둥을 뽑아서 그들에게 넘겨줄 각오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