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89)화 (189/227)

189화 수복기 (39)

“확인해 보시죠.”

나는 헤어진 지 약 1개월 만에 다시 보는 신해룡 육군 참모총장에게 USB 하나를 넘겨주었다.

그의 뒤에는 여느 때처럼 대구에서 가장 직업 숙련 레벨이 높은 부관이, 내 뒤에는 말끔하게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최묵호가 서 있었다.

“이게 뭔가?”

“대구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어쩐지 말속에 뼈가 느껴지는군.”

의아한 표정으로 내가 건네준 USB를 받아 든 그가 노트북을 가져와 내용물을 직접 확인했다.

USB 속에는 내가 동대구역에서 따로 정리해 둔 포항의 증거 자료들이 담겨 있었다. 사실 증명을 위해 나와 최묵호의 헬멧에 부착해서 모든 전투 장면을 촬영했던 헤드 캠의 녹화 영상도 첨부했다.

자신의 부관과 함께 가장 먼저 영상부터 확인한 신해룡은 낮은 침음을 흘렸다.

“각성자 집단과 전투를 벌였군. 1인칭 시점이지만 그렇기에 전투가 치열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만한 수의 적들을 상대로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압도할 줄이야. 북진군 출신다워.’

내가 이끄는 생존자 집단이 가진 모든 무력을 동원했다면 아마 그보다 훨씬 더 쉽게 적들을 압도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내 개인적인 감정의 격앙에 관계 없는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어쩔 수 없이 현지에서 나를 거들어야 했던 한동석과 진가희는 따로 연락해서 김해의 호텔로 돌려보낸 뒤 요양하게끔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런데 이게 ‘대구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건지 모르겠군. 자네의 무력이 우리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으니 알아서 협조하라는 의미인가?”

“제가 5년간 몰상식과 부조리로 가득한 집단에 강제로 얽매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몰상식이 제 몸에 밴 건 아닙니다. 그보다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허튼짓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필시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들과 목숨 걸고 싸운 것이겠지. 자네의 개인 사정까지 우리가 알 필요는……”

“개인 사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와는 눈곱만큼도 관계없는 일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포항까지 굳이 기어 올라가서 그 쓰레기들을 몰살시킨 이유는, 대구가 포항을 방치해 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포항을 방치했다?”

군 내부에서 눈치와 정치로 살아남아 기어코 육참총장이라는 자리까지 오른 인물 아니랄까 봐 신해룡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 태도가 가증스럽기는 했으나, 일단은 참았다.

“다 알면서 시치미 떼는 건 그만두죠. 이미 대구 내에 포항에서 도망쳐 온 생존자들이 여럿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물론 군부와 대구 시청 측에서 각 지역에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을 통해 타 지역의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도.”

“…….”

“사태 초기에 급하게 대구에 자리 잡은 당신들은 눈뜬 장님 신세였겠죠. 그렇다고 직접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사람을 내보내자니 리스크가 너무 클 것 같아서, 결국 피난민을 통해 주먹구구식으로 정보를 수집했을 것 아닙니까. 실제로 부산과 김해는 망했고, 울산과 포항에서는 웬 미친놈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정보는 습득했겠지만, 정작 대구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밀양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밀양에 대한 정보는 모르고, 그 쓰레기들과 선뜻 접선해서 협력 관계를 맺으려 했을까요?”

“그건…….”

“밀양에서 도망쳐 올라온 피난민이 없기 때문이잖습니까.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곧장 도망쳐 온 피난민들은 밀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리가 없고, 밀양에서 ‘그런 일’을 겪었던 피난민들은 다 죽었으니까요. 이게 당신들이 피난민들을 통해 외부 정보를 수집했다는 증거입니다.”

당시 밀양으로 몰려들었던 피난민은 전부 이기적인 쓰레기 놈들에 의해 좀비와 함께 도시에 갇혀 불타 죽었다. 밀양에서 살아남은 놈들은 연결된 교각을 끊고 안전한 섬에 틀어박혀 생활하고 있다가 뒤늦게 대구와 접촉한 것이다.

밀양과 대구가 접촉한 시기가, 내가 밀양을 거쳐 대구에 방문한 시기와 비슷했기 때문에, 대구가 피난민들을 통해 외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약 대구가 직접 나서서 타 지역의 정보를 수집했다면 밀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냈을 테고, 당연히 그 사태를 일으킨 주범들을 먼저 처벌하거나 어떤 조치를 취했을 테니까.

하지만 밀양에서 벌어진 사건도 내가 정보를 알려 준 뒤에야 겨우 검증 작업을 거쳐서 주범들을 처벌했다.

즉 대구는 모를 수밖에 없는 정보는 정말로 몰랐지만, 알 수밖에 없는 정보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포항은 대구의 바로 옆에 위치한 경산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해안 도시입니다. 당연히 거기서 건너온 피난민들도 많았을 텐데, 사태 초기에 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했다면 포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제 말 틀립니까?”

“……맞아. 알고 있었네.”

“그럼 왜 방치했습니까? 그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것도 당신들이 그렇게나 혐오하고 경계했던 각성 범죄자들이 주도한 학살이었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그때 우린 대구에 막 피신을 온 참이었어. 당장 먹여 살리고 보호해야 할 민간인만 수백만 단위에,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각성 범죄자 처리, 좀비와 맞서 싸울 군의 재편과 각성자들의 관리까지. 우린 당장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했네. 비교적 가까웠던 밀양과 접촉이 늦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

“하지만 여력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언젠가 분명히 대구의 위협으로 작용할 그 각성 범죄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초동 대응 부대를 파견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겁니다. 사태 초기에는 도시 규모의 좀비 웨이브가 없었을 테니까요.”

한반도 전역에서 좀비들이 생존자를 찾아내 뜯어 먹으며 동료를 늘리고 있던 사태 초기에는 대규모 좀비 웨이브가 있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생존자가 제법 있었던 김해도 초기에는 웨이브 걱정 없이 비교적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유령 도시가 탄생하고, 어마어마한 수의 좀비 대군이 완성된 후에야, 더 이상 먹잇감을 찾을 수 없게 된 놈들이 생존자가 넘치는 도시들로 진격을 시작했을 터.

좀비의 수가 적고 각성자가 우후죽순 탄생하던 사태 초기에는 분명히 대처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신해룡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고.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신해룡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당시 내겐 운용할 수 있는 군인들만 수만 명이 넘었고, 협조를 구할 수 있는 각성자들도 최소 수천 명이 있었는데 어째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거냐는 뜻이겠지. 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답변은 앞서 말한 이쪽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부산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것처럼, 내 입장에선 대구가 최후의 부산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히 이곳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지.”

“피난민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하고, 손익을 따져 보고, 결국 외면했다는 것 아닙니까. 당신들이 2개월이 넘도록 포항을 방치한 끝에 그곳에선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들이 강대하고 부유한 각성자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초기에 잡을 수 있었던 불씨를 대형 산불로 키운 셈이죠. 덕분에 경상도 일대를 복구하기 위해 울산과 포항을 방문했던 제가 그 산처럼 쌓인 똥을 직접 치워야 했습니다.”

“…….”

내 신랄한 비난에 신해룡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원래 높으신 분들은 할 말이 없으면 저렇게 입을 다무는 게 전통이라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요, 백 보 양보해서 정말 대구를 지키기 위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포항과 울산에서 일어나는 일을 애써 외면했다고 칩시다. 목숨 바쳐서 국민들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긴 했지만, 원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역사적으로 정당화되는 법이었으니까요.”

내가 대를 위해 희생당하는 입장이 되어 봤기 때문에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좆같은 기분이 들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생각해 보니 또 나만 일방적으로 희생한 입장 아닌가.

그래서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이 많은 군대와 각성자들을 거느리고, 풍부한 물자와 안정된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대체 왜 도시 안에만 처박혀 있는 겁니까? 왜 그만한 힘과 여유가 있음에도 주변 지역을 복구하지 않죠? 왜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죠? 왜 당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있느냔 말입니다! 그럴 거면 그냥 대의명분이니 뭐니 하는 것 다 때려치우고 계급장 떼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당신네들이 군바리 소리나 듣는 겁니다!”

쾅!

참다못해 회의용 테이블을 내려치자 쩌적 하고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맞은편의 신해룡과 그의 부관은 무거운 표정으로 묵묵히 내 항의를 받아들였다.

“변명처럼 들리는 것도 당연해. 아니, 실제로 나 역시 말하면서도 지독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네. 실제로 중대 몇 개를 꾸려서 포항으로 보냈다면 그 쓰레기들의 근거지를 기습해서 남은 생존자라도 구출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네. 그럴 여력이 있는 것과 실제로 가능한가는 전혀 다른 문제니까.”

“…….”

“자네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군인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입장이라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 가령 지금 우리 군의 사기가 얼마나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지, 비축된 물자를 얼마나 아껴 써야 더 버틸 수 있는지, 피난민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려면 얼마나 많은 군인들에게 총 대신 삽을 들게 해야 하는지 등등. 그래서 당시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군을 파견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놈들은 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물들에게 휩쓸려 사라질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도 품었지.”

“그 결과가 이겁니다. 빌어먹을 놈들이 시체의 구더기처럼 아득바득 살아남아서 둥지를 틀었고, 제가 때맞춰 처리하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대구와 김해, 부산에도 마수를 뻗쳤겠죠.”

“그래, 인정하네. 자네들이 가져온 이 증거 자료를 보니 놈들이 미래의 우리를 위협했을 게 틀림없어. 명백한 우리의 실책이자 과오야. 자네 말마따나 정말로 가능했다면 계급장이라도 떼 버리고 싶을 만큼. 하지만 입장상 그러지 못하는 걸 이해해 주게.”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꾹꾹 누르던 신해룡은 뒤이어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우리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으니 이런 증거들을 가지고 온 것 아니겠나. 사람을 원하나? 아니면 정보? 물자? 혹은 동대구역처럼 또 대구의 일부 구역을 할당해 주길 원하는 건가?”

“그런 자잘한 것들에는 관심 없습니다. 대구가 지난날 동안 도시에만 처박힌 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책임을 지길 원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책임을 말하는 건가?”

“어려울 것 있습니까? 군대를 동원하고, 더 많은 각성자들에게 협조를 구하세요. 대구 주변 지역부터 진출해서 전초 기지를 세우고, 인프라를 복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하시라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머지않아 시행할 계획이기도 했네. 자네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으니 그런 형식적인 걸 원하는 건 아닐 테지. 우리에게 진정 바라는 게 뭔가?”

“북진.”

내 짤막한 답변에 신해룡과 그의 부관이 헛숨을 들이켰다.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전 언제나 제정신입니다. 뒤에 있는 제 동기는 반쯤 이상하긴 합니다만.”

“인간의 영역을 되찾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은 이해하네. 우리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자네가 원하는 건 마치…….”

“전쟁을 원하는 것 같다고요?”

“…….”

“예, 그 말대로 전쟁을 원하는 게 맞습니다.”

허어, 하고 짧게 탄식을 토해 낸 그는 진중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당혹감이 가득한 반응만을 보여 주었다. 그만큼 내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강렬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 같은 사람 입에서 전쟁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그 지독한 5년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그때와는 다릅니다. 북한과의 전쟁은 그저 국방의 의무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했던 것이고, 제가 말하는 북진은 포항처럼 더 방치해 두면 좀비를 비롯해 온갖 역겨운 것들이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남하할 테니, 우리가 먼저 움직여서 그것을 막고자 하는 겁니다.”

“예방 전쟁이군.”

그 말대로다.

수백만이라는 인간의 피를 마신 암 덩어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강원도에서 급속히 세를 불리고 있다.

비대하고 강대해진 놈들에게 좀비가 어디 위협이나 되겠는가? 포항에 자리 잡았던 각성자 집단조차 자신들의 편리함을 위해 귀찮은 상품 공급(인신매매)을 맡겼던 놈들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각 세력들 간의 성격이 워낙 판이하게 달라서 아직 연합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놈들이 성향과 성격 차이를 넘어 기적적으로 연합을 하게 된다면, 대구도 충분히 위협할 수 있다. 그런 놈들에게 계속 시간을 주면 줄수록 위험도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겠지.

“아까 자네가 한 말과 완전히 상반되는 얘기라는 건 알고 있나? 지켜야 할 국민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게 바로 전쟁이야.”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죠. 사리사욕을 위한 전쟁이라면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금 싸우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에 말한 겁니다. 울산과 포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놈들보다 더 강하고 악독한 놈들이 대구의 인간들을 잔혹하게 유린하고 약탈하는 미래를 막고자 하는 겁니다.”

“그건…… 후우.”

내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신해룡도 알고 있다.

넘겨준 USB에는 내가 확보한 증거 자료만이 아니라, 최묵호와 김호연이 강원도에서 직접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두었던 각종 사진과 동영상도 첨부해 두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최묵호가 강원도에서 급하게 내려온 이유도 내가 대구 측의 참전을 요구하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최묵호는 동기들과 함께 직접 확보한 증거 자료들을 토대로, 지금 강원도에 자리 잡은 범죄 조직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다음 타깃은 무조건 대구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내 동기들이 강원도에서 소수의 피난민들을 보호하면서 악착같이 증거를 수집한 이유는, 조금이라도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권력자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면 필시 강원도를 처리하기 위해 손을 보태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체도 알 수 없고 대규모 감염의 위험이 있는 좀비보다는 그래도 같은 인간이 훨씬 상대하기 편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무엇보다 권력자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대의명분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걸 더 좋아하는 족속들이다.

신해룡도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의 근간에는 권력욕에 대한 야망이 서려 있음을 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신해룡에게 증거 자료가 들어 있는 USB를 넘겨주면서 ‘대구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했던 거다.

“……정말 전쟁을 원하나? 이런 시국에, 인간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무의미한 동족상잔을?”

“놈들이 먼저 시작한 동족상잔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그걸 방치한 탓에 적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성장할 수 있었고요. 가만히 앉아서 적들이 오길 기다릴 생각이라면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니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그게 아니라면 제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셔야 할 겁니다.”

“설령 전쟁을 하겠다고 해도 이 겨울에 움직이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 최종 목표가 강원도라면 더더욱.”

“적들이 준비하고 성장할 시간을 주는 것보단 조금 더 힘들어도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증거 자료에 첨부된 내용대로, 강릉에 자리 잡은 저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이 좀비 사육에 쓸 인간이 다 떨어지면 다음 타깃은 무조건 대구입니다. 놈들은 계절 따위 신경도 안 쓰겠죠.”

저들이 포항과 교류하며 타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면 대구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놈들이 대구를 공격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좀비를 때려잡고, 또 얼마나 더 강해지겠습니까? 우리가 평범한 효율로 성장하고 있다면 저쪽은 곱절의 효율로 성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있고요.”

“으음…….”

고작 2개월 만에 강력한 각성자 집단을 구성한 포항의 사례를 미루어 볼 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강원도의 범죄 조직들이 다음 먹잇감을 찾아서 붓물 터지듯 타 지역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는 이미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여전히 생각의 늪에 빠진 신해룡에게 나는 확실하게 쐐기를 박았다. 어차피 그는 내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기회는 주어질 때 잡는 겁니다.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내가 대구에 주는 마지막 기회든, 선량한 생존자 집단이 범죄 조직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든, 양쪽 모두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이룰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그는 이 기회들을 놓쳐서 받게 될 불이익과 입게 될 손해보다, 나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더 두려울 것이다. 이미 간접적으로나마 내 힘을 보여 주었으니까.

결국 신해룡은 장고 끝에 내 요구에 따라 동원령을 내리고 경북권 안정화 및 강릉 초토화 작전을 입안하기로 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전제 조건하에.

“올겨울은 지독하겠군.”

“미래 없는 봄을 맞이하는 것보단 낫습니다. 경험담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멈춰 있던 국방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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