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87)화 (187/227)

187화 수복기 (37)

각성자는 같은 각성자 입장에서 보면 훨씬 더 많은 경험치와 DNA 샘플을 주는 황금 고블린 같은 존재였다.

좀비는 레벨 대신 변이의 유무로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와 DNA 샘플이 결정되지만(고정값), 각성자는 특정 레벨에 도달하기까지 쌓아 온 모든 경험치와 현재 보유하고 있는 DNA 샘플 및 아이템을 죄다 뱉어 내는 구조였다.

즉 일반 좀비 수천 마리를 때려잡는 것보다, 고레벨 각성자 몇 명 쳐 죽이는 게 각성자 입장에서 훨씬 더 효율이 좋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고한 민간인을 사육하는 좀비 밥으로 던져 주면서 리스크 없이 안전하게 경험치와 DNA 샘플을 파밍하는 극악무도한 놈들도 서로 동족상잔을 하진 않는다.

가장 큰 이유로는 서로 엇비슷한 놈들끼리 싸워 봤자 금세 또 다른 각성자에게 견제당할 것이 뻔하다는 점이었다.

-어? 저놈이 동료를 쳐 죽인 것도 모자라 혼자 압도적으로 강해지려고 하네? 어? 띠껍네?

서로 등을 맞대고 협력하는 관계임에도 근본이 썩어 빠진 놈들의 이기주의와 기회주의는 어디 가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들 중 누군가가 동료를 제물로 바쳐 압도적으로 강해지려는 ‘개짓거리’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충성심을 바치고 있는 우두머리라고 해도.

집단의 힘으로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무력을 보유한 개인이 등장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법이다.

엇비슷한 수준의 각성자들 사이에는 레벨과 직업, 스킬, 아이템이라는 온갖 변수에 의해 상호 확증 파괴 개념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바꿔 말하자면 ‘선만 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같은 편이다.’라는 의미다.

물론 네가 나를 존중해 주면 나도 너를 존중해 주겠다는 신사적인 약속은 아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에게 그런 품위 있고 세련된 약속이 존재할 리가 없잖은가.

놈들이 아무리 레벨 업과 DNA 샘플에 굶주려 있다고 해도 절대 같은 각성자를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의 밑바닥 계급인 나약한 민간인들을 힘으로 억압하고 가축처럼 취급했던 것을, 압도적으로 강력한 각성자가 나타나 자신에게도 똑같은 짓을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부류의 조직들은 우두머리와 몇몇 고위 간부급 각성자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각성자들이 비슷한 레벨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했던 북한처럼, 누구도 자신보다 앞서 나가지 못하도록, 자신들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덕분에 내가 편하게 레벨 업을 했지.’

예상치 못한 압도적 강자의 등장은 새로운 변수를 알리는 골칫덩어리지만, 이 고층 빌딩에 자리 잡고 있던 각성자 집단은 딱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놈들이었다.

똑같은 레벨의 몬스터가 우르르 등장하는 RPG 게임 속 던전처럼, 놈들 역시 개개인의 전투 센스가 다를지언정 각성자로서의 수준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놈들을 쉽고 안전하게 쳐 죽이면서 금세 경험치와 DNA 샘플을 빼앗을 수 있었다는 거다.

“상태창.”

[생존자: 이승권]

[직업: 퇴역병]

[직업 숙련 레벨: 39 > 40]

[칭호: 오버킬, 피바람, 응급 구조 요원, 동족 포식자, 농성의 왕, 부산의 승궈이햄, 변종 혐오자]

[생존 기간: 72일 차]

[숙련 포인트: 29 > 34]

[특수 DNA 샘플: 1]

드디어 염원하던 40레벨도 찍었겠다, 나 때문에 흉포해진 좀비들에게 포위되어 무한 디펜스를 하고 있는 저놈들의 최후를 느긋하게 감상하다가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놈들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놈이 기습적으로 내게 총을 쏘긴 했지만, 이 즐거운 관람을 위해 상점창에서 거금을 주고 구입한 원거리 투사체 방어막(10회) 덕분에 무난하게 막았다.

잡졸들과 싸울 때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워서 그냥 몸으로 때웠지만, 놈들이 일방적으로 피를 흩뿌리고 있는 상황을 느긋하게 관람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했다.

“척 척 박 사 님 께 물 어 봅 시 다.”

타앙!

“아아아아악! 내 팔!”

놈들이 슬슬 한눈을 팔기 시작하자 쇼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총도 몇 발씩 쏴 주고.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여기 방어선 뚫리기 직전이잖아! 안 도와줄 거야?!”

“지금 우리도 여력이 없다고, 시발!”

“뭐? 시발? 너 이 새끼, 지금 누구한테 감히……!”

놈들이 점점 분열되어 가는 모습도 감상하고.

“도, 도와……!”

“크르륵…… 으윽…… 컥!”

결국 버티지 못한 방어선들이 하나둘씩 와해되어 맛집 블로거 좀비들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하는 최후에 갈채도 보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항상 빨리 끝나고, 좋은 것은 금세 손에서 사라져 버린다. 족히 100명이 넘는 각성자들이 필사적으로 좀비들과 맞서 싸웠음에도 슬슬 끝물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지난 나흘간 미친 듯이 체력을 빼 두고 정신을 흔들어 두고, DNA 샘플을 낭비시킨 보람이 있었다.

‘아마 놈들이 100%의 컨디션이었다면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겠지.’

나는 마지막까지 놈들이 최대한 고통스럽게, 공포에 질린 얼굴로, 생존을 갈망하면서도 결국 죽음에 짓눌리는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볼 생각이다.

그것이 인간인 이상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린 놈들에게 어울리는 최후니까.

바로 그때.

-‘CEO’가 사업체 매각을 선언했습니다. 사업체 건물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성체, 중립체, 아군이 60초 후 ‘매각’됩니다.

쾅! 쾅! 쾅!

갑작스러운 시스템의 선언과 함께 빌딩의 모든 출입구와 창문이 강제로 봉쇄당했다.

두꺼운 철판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아주 미세한 틈마저도 확실하게 틀어막아서, 건물 내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사를 표명했다.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각성자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뭔가 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형태의 발악일 것이라고는 나도 예상치 못했다.

막말로 이건 CEO라는 직업을 가진 각성자가 관리하는 사업체 건물에 적들을 몰아넣은 다음 ‘매각’해 버리면 필승하는 개사기 치트 스킬 아닌가.

‘저놈 짓이군.’

나는 저 밑에서 좀비들과 격리되어 가까스로 여유를 되찾은 각성자 집단의 우두머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부하들은 거의 다 죽었고, 자신도 이미 체력이 떨어져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황.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고약한 심보가 엿보인다.

‘어딜 가나 꼭 저런 놈들이 한둘씩 있지. 마지막까지 자기가 처한 상황과 입장을 인정하지 못하고 추하게 발악하는 놈들. 바짓가랑이 붙잡고 살려 달라고 비는 놈들이 차라리 양반으로 보일 만큼 근본부터 썩어 빠진 것들.’

‘매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시스템에 의해 다른 무언가로 환원되는…… 적어도 내가 인간의 형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강제적인 조치가 아닐까 싶다.

나는 각기 다른 스킬임에도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낸다면, 당연히 그 반대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스킬창. 영역 지정에 30포인트 투자.”

[직업 고유 스킬: 거점 연결(A-), 영역 지정(B-) > 영역 지정(A-),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최후의 보루(A+)]

[개인 고유 스킬: 사격(A), 체술(B), 야간 경계(B++), 통증 억제(D)]

[획득 및 특전 스킬: 도구 제작(E), 짚라인(D-), 암행(D), 전투 자극제(C+)]

가장 낮은 등급이었던 거점 지정을 E등급에서 무려 영역 지정 A등급까지 키워 냈다. 이 짓거리를 위해 지난날 동안 내가 감내한 수많은 고통과 노력이 겨우 결실을 맺은 것 같았다.

영역 지정 스킬이 A등급으로 업그레이드된 순간, 나라는 각성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스킬답게 수많은 알람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제 당신의 영역은 용도와 규모에 따라 매시간마다 자동적으로 특정 자원을 일정 비율로 생산합니다.[연계 스킬: 최후의 보루(A+)]

-이제 당신의 영역 내에서 거주, 활동하는 모든 거점 일원과 중립체는 24시간마다 일정 비율의 ‘생존 포인트’를 납부합니다.

-이제 당신의 영역 내에서 거주, 활동하는 모든 거점 일원과 중립체를 상대로 ‘강제 구금’, ‘강제 추방’, ‘강제 징집’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의 우호 영역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거점 일원들의 신체 능력과 스킬에 한 등급 높은 효과가 적용됩니다. 또한 레시피를 이용한 아이템 제작 시 더 높은 등급의 결과물이 나옵니다.

-‘거점 경계 강화(E)’, ‘거점 방어 강화(E)’ 스킬이 ‘천혜의 요새(A-)’로 통합됩니다.

-영역 강제 탈취 확률이 90%로 상향 조정됩니다.

“오우 쉿.”

아직 승리를 자축하는 치맥 파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국밥 열 그릇은 먹은 것처럼 배가 든든해졌다.

일단 스킬의 자세한 변경 사항 같은 건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나는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다 불태운 사람처럼 제멋대로 만족하고 있는 각성자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반격을 가했다.

“영역 강제 탈취.”

-영역 강제 탈취 성공.

-해당 영역은 ‘사업체 매각(A-)’의 효과를 받고 있습니다. 영역 지정(A-)에 의해 ‘매각’이 강제 중단됩니다.

-서로 다른 스킬의 상쇄 작용으로 인해 영역이 일시적으로 리뉴얼되지 않습니다.

-영역의 주인이 변경됨에 따라 해당 영역 내에서 ‘퇴역병’에게 우선 통제권을 할당합니다.

-이제 당신은 영역 내에서 ‘CEO’의 일부 권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권한: 중징계(B+), 인사고과 반영(E), 업무 배치(D-), 커피 심부름(E-), 보너스 지급(C++)

90%까지 확률이 치솟은 영역 강제 탈취는 예상대로 스무스하게 놈이 매각하려던 사업체를 강제로 탈취했다. 기업 사냥꾼들이 거금을 들여 한다는 적대적 M&A보다 더 쉽게 날로 먹은 것이다.

다만 상대가 시전한 스킬의 등급과 효과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지, 평소였다면 즉시 리뉴얼되었을 내 영역이 여전히 반쯤 망가지고 봉쇄된 상태 그대로 남겨졌다.

그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놈이 시전한 회심의 일격을 카운터 쳤다는 거다.

응~ 아무것도 못 하죠? 억울하죠? 때리고 싶죠? 근데 다 뺏겼죠? 빈털터리죠? 어쩔티비죠?

당연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놈이 추하게 발악했으니 이제 밑바닥에도 밑바닥이 있다는 걸 보여 줄 차례다.

-중징계: 해당 영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성체, 중립체, 거점 일원 중 1인을 지목하여 모든 신체 능력 -50%, 경험치 획득 불가, DNA 샘플 사용 불가 상태 부여.

“대가리 딱 대.”

흘러빠진 기열찐빠를 직접 상냥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진정한 고수는 혀로 명치를 찌르는 법.

-중징계 사유: 아아, 모르는가. 이것은 ‘사업체 긴빠이’라고 하는 것이다.

“허어?”

지금껏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막 살아왔던 놈은 이 지독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고장 난 TV처럼 멍청한 반응을 보였다.

놈의 자존심을 저 깊숙한 구렁텅이에 처박은 나는 즉시 건물 내의 봉쇄된 격벽을 모두 해제했다.

격벽에 막혀 분노하고 있던 온갖 변종과 일반 좀비 떼가, 나조차도 한순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흉포한 기운을 흩뿌리면서 쏟아져 들어왔다.

좀비들의 목표는 당연하게도 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죽는 건 저놈들뿐이다.

“캬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으으으으으으응!”

자신이 쌓아 올린 부와 레벨, 부하, 자존심, 그리고 마지막은 내게 한 방 먹이는 것으로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정신적 승리’마저도 모두 무참히 빼앗기고 무너져 내렸다.

나는 드디어 절망과 공포로 물드는 놈의 마지막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이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자유를 빼앗고, 그들의 인권을 유린하며 상품으로 써먹었던 놈이다.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 알량한 힘이나 휘두르면서 더러운 우월감을 충족시켰던 놈이다.

자신이 짓밟던 이들에게서 절망과 공포를 수집할 때는 꽤나 기분 좋았겠지.

“아직 길동무로 보내 줄 놈들 많으니까 너무 억울해하진 말라고.”

어느 이름 모를 북한군에게 했던 말이 습관처럼 툭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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