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86)화 (186/227)

186화 수복기 (36)

사무실의 얇은 내벽을 무너뜨리며 몰려 들어온 좀비들이 순식간에 김주윤을 비롯한 각성자 집단 조직원들을 포위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허억, 허억, 허억……!”

김주윤은 SF 영화 속 광선검처럼 이질적인 기운이 흘러나오는 팬 라이트를 든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CEO의 지휘봉’이라는 이 무기는 고유 스킬을 사용해서 소환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아이템이었는데,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몰려드는 좀비를 쉴 새 없이 도륙하면서 전례 없는 속도로 빠르게 레벨 업을 하고, 텅 비었던 지갑에 다시 DNA 샘플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안 그래도 지난 나흘간 체력이 크게 소모된 상태였다.

그의 개인실에 방음재를 덕지덕지 발라서 소음 테러를 피해 쪽잠을 자긴 했지만, 제아무리 고강한 각성자의 육체라고 해도 바닥을 찍었던 체력이 쉽게 회복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에너지 드링크나 커피 같은 것으로 버티고 있었건만, 타이밍 나쁘게 적의 침입을 허용해 버렸다.

다만 그조차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만큼 김주윤은 자신이 있었다. 지지 않을 자신이.

각성자만 물경 300에 달하는 이 천혜의 요새에 적이 겁 없이 기어들어 온다고 한들, 되레 압살당해 허무하게 끝날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쿨럭! 후우…… 팀장급 살아 있나?!”

“1팀장 살아 있습니다!”

“2팀장도 아직 거뜬합니다!”

“3팀장도 문제없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부하들의 응답.

악에 받친 좀비들이 죽음조차 불사하고 달려들었지만, 그래도 각성자 짬을 뒷구멍으로 먹은 건 아닌지 다들 여력이 남은 듯했다.

처음부터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낭패를 볼 일도 없었겠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한다.

한 놈을 베면 두 놈이 달려들고, 두 놈을 베면 그 곱절의 수로 빈자리를 메우는 좀비들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래도 이 상태를 유지하며 조금씩 우위를 점한다면, 결국 각성자의 포텐셜로 밀어붙일 수 있다.

‘병신 같은 낯짝으로 이 김주윤을 내려다볼 수 있을 때 실컷 내려다봐라. 여력이 생기는 순간 가장 먼저 네놈의 멱을 따서 빌딩 아래로 던져 줄 테니.’

위기 상황이 닥쳐오자 조직원들은 김주윤에게 더 많은, 더 강렬한 지지를 보내왔다.

몸을 쓰는 진흙탕 싸움이나 목숨을 건 투쟁에 연이라곤 없었던 김주윤이 스킬을 유지하면서 좀비들을 손쉽게 도륙하고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촤아악!

이질적인 기운이 흘러나오는 팬 라이트를 아무렇게나 휘둘렀을 뿐인데, 전방의 좀비 몇 마리가 깔끔하게 양단되었다.

몸의 자세가 흐트러지면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는 권총을 탕탕 쏴 댔다. 탄창이 떨어지면 권총을 뒤쪽으로 내던지고, 또 다른 부하가 던져 준 권총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낸다. 그야말로 CEO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흐뭇한 결과에 김주윤은 잠깐이지만 ‘여유가 있다’고 느꼈다.

자신보다 4~5m 정도 높은 위치에서 무방비하게 음료수나 홀짝이며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사태의 원흉. 조직원 모두가 전방위로 몰려드는 좀비들 때문에 쉽사리 건드리지 못했던 놈이 김주윤의 시야에 딱 들어왔다.

자신도 방심했다가 어처구니없는 기습을 당했으니, 상대도 똑같이 어처구니없는 기습에 당해 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든 순간.

그의 총구는 좀비를 노리는 척하면서 재빨리 방향을 바꿔 무방비한 상대를 겨눴다.

타앙!

김주윤보다 강하든 김주윤보다 약하든, 애초에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절대로 보고 피할 수 없는 음속의 탄환이 공기를 찢으며 상대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저 원흉이 허무하게 죽어 버린다면 마음 편히 이 좀비들을 처리하고 다시 재정비를 할 수 있을 터.

그랬어야 했다.

퍼석!

권총탄이 원흉의 미간을 뚫고 두개골 내부를 헤집을 거라는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투명한 무언가가 탄환을 막아 냈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다. 그곳에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탄환이 튕긴 것을 확인하자마자 음료를 홀짝이고 있던 원흉이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건드렸다.

“이게 바로 ‘상점창 FLEX’라는 거야, DNA 샘플 거지들아.”

총알도 막아 주는 어떤 대단한 아이템을 구매했다는 듯한 뉘앙스에 김주윤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도 이 조직을 운영하면서 제법 많은 양의 DNA 샘플을 손에 넣어 봤고, 포항 급변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는 조직원들이 가진 모든 DNA 샘플을 걷어서 펀드 매니저처럼 관리도 해 봤다.

그렇게 대략 1만이 조금 넘는 DNA 샘플도 만져 본 적 있던 김주윤에게 ‘거지’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을 만큼 상대는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자신과는 달리 근거가 확실한 자신감이.

“그런데 다른 곳에 눈 돌리는 거 보니 아직 할 만한가 봐? 그럼 내가 좀 거들어 드려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원흉이 벌떡 일어나더니 대뜸 검지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 카 콜 라 맛 있 어 맛 있 으 면 또 먹 지.”

타앙!

“아아아아악?!”

원흉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인다 싶더니, 마지막에 지목된 조직원을 향해 냅다 총을 갈겼다. 자신이 쏜 총알은 막혔는데, 원흉이 쏜 총알은 너무나도 쉽게 피해를 입혔다.

손가락에 지목된 조직원은 하필 좀비에게 무기를 휘두르려다 그대로 팔을 관통당해 공격에 실패했다. 그 탓에 죽이지 못한 좀비가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그를 단숨에 끌어당겼다.

으직! 찌이이익!

좀비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끌려 들어간 조직원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분해되었다.

격렬한 분해 작업 중 떨어져나온 조직원의 팔 한 짝이 사후 경직으로 꿈틀거릴 뿐이었다.

노골적이다.

“이 개새끼가!”

죽일 거라면 처음부터 머리나 가슴을 노리고 총을 쐈을 터. 아니, 애초에 자신들을 깔끔하게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 상황이 이렇게 됐을 때부터 은연중에 눈치채기는 했지만, 그래도 절대다수인 자신들이 상대가 품은 오만과 과소평가를 이겨 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김주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단신으로 이 지옥을 편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만큼, 자신들을 채집통 속 벌레처럼 가지고 놀 만큼 상대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을 도륙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임에도 이 모든 상황을 한순간의 유흥으로밖에 여기고 있지 않다.

좀비들로 가득 찬 빌딩에서도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 나갈 수 있다는 그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처음으로 김주윤이라는 사내의 콧대를 짓누르고 있었다.

‘더 레벨 업을 하면, 더 많은 DNA 샘플을 모으면, 스킬 등급을 더 올리면 저깟 놈은……!’

다시 한번 팬 라이트를 휘두르려던 그때, 문득 김주윤은 자신의 스킬과 무기 위력이 다소 감소한 것을 눈치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끝을 모르고 강해지고 있던 자신이 갑자기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것도 모자라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니?

탕!

“아아악?!”

탕!

“끄으으으윽! 잠깐, 누가 나 좀……!”

탕!

방어선을 복구했다 싶으면 여력이 없는 조직원들의 팔이나 다리를 노리고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한다.

그렇다고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쏘면 방어선이 금방 붕괴되니까 아예 일부러 맞추지 않고 깜짝깜짝 놀라는 총성만 흘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주윤에 대한 조직원들의 지지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본래 아랫것들은 자신들을 이끌 수 없는 리더, 지켜 줄 수 없는 리더는 빠르게 불신하고 버리는 법.

김주윤이 굴린 작은 스노우 볼이 순식간에 거대한 눈사태가 되어,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이 방어선을 조금씩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돼!’

자신에 대한 지지도가 줄어들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는 김주윤은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몸을 던졌다.

필요 이상으로 체력을 소모해서 좀비들을 처리하고 방어선을 지켜 낸다. 그렇게 벌어들인 DNA 샘플로 즉시 바리케이드를 구입해서 좀비들의 침입을 저지하거나, 탄약을 구입해 조직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갖은 노력을 해서 간신히 지지도를 끌어올렸다 싶으면, 다시 총성이 울려 퍼지고 누군가가 쓰러졌다.

사방 천지가 좀비들로 가득한 이 지옥도에서 즉사도 아니고 팔다리를 못 쓰게 된다는 것은 곧 극심한 공포로 다가왔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무시하고 깔보던 일반 좀비도 떼지어 몰려들면 부상을 입은 각성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저리 꺼져, 이 개새끼들아!”

“여기 지원 좀 해 줘!”

“아니, 그보다 저 위에서 총질하는 새끼 좀 어떻게 해 봐!”

“총을 쐈는데 안 먹힌다고 시발!”

“총알 낭비하지 마, 이 새끼들아!”

더 이상 유능한 리더가 이끄는 각성자 집단은 없다.

사분오열된 오합지졸 패거리가 당장 나부터 살자고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다.

김주윤을 도와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 팀장급 각성자들도 더 이상 통제가 먹히는 상황이 아니란 걸 눈치챘는지, 아예 자신들의 팀원들을 모아 방어선을 더욱 좁히기에 이르렀다.

공포와 불안, 혼란과 무질서가 가중되면서 더 이상 집단이 가지는 막강한 화력과 단합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군의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 부상자들은 속절없이 좀비들에게 끌려가 뜯기거나, 좀비로 감염되어 역으로 주변인을 덮치기에 이르렀다.

김주윤은 자신의 스킬과 아이템을 시스템에게 도로 빼앗기면서, 다시 제약으로 가득 찬 반쪽짜리 지휘자 타입의 각성자로 돌아왔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대통령은 임기 내내 욕먹고 정책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하는 것처럼, 김주윤도 허수아비 각성자 신세로 전락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주윤은 마지막까지 악의에 가득 찬 투지를 불태웠다. 더 이상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자신 혼자만 패배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는 노릇. 자신이 패배할 운명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함께 패배해야 함이 옳다.

“사업체 매각.”

CEO가 유일하게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막강한 스킬이 발동되자 곧 건물 전체에 비상벨이 울려 퍼지며 모든 출입구와 창문이 시스템에 의해 봉쇄되었다.

-‘CEO’가 사업체 매각을 선언했습니다. 사업체 건물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성체, 중립체, 아군이 60초 후 ‘매각’됩니다.

본래는 걸리적거리는 경쟁 상대를 자신의 사업체 건물에 가둬 두고 확실하게 처리할 때 쓰려 했던 히든카드였으나, 모든 것이 끝난 지금이라면 아낌없이 자폭에 사용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패배할지언정 상대에게 승리를 허락할 수 없었던 김주윤은 만족스러운 조소를 흘렸다. 자신에게, 자신이 이끄는 조직에 단신으로 이만한 피해를 입힌 놈이니 저승 길동무로 아깝지는…….

-‘퇴역병’이 영역 강제 탈취(A-)를 선언했습니다. ‘CEO’의 사업체 매각(A-)이 저지되었습니다.

-당신은 해당 사업체 건물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상실하였습니다.

-‘퇴역병’이 해당 사업체 건물이 포함된 모든 영역의 새로운 CEO로 취임했습니다.

-‘퇴역병’이 당신에게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중징계: 퇴역병의 영역 내에서 모든 신체 능력 -50%, 경험치 획득 불가, DNA 샘플 사용 불가,

-중징계 사유: 아아, 모르는가. 이것은 ‘사업체 긴빠이’라고 하는 것이다.

“……허어?”

자신의 사업체가 존재하지 않는 CEO는 더 이상 CEO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김주윤은 억겁의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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