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수복기 (35)
최묵호는 폭발이 일어난 직후에 막혀 있던 비상계단 문을 박살 내고 자욱한 먼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강습병의 고유 스킬 중 하나인 ‘도어 브리칭(B++)을 사용하면, 중량 500kg 이하의 모든 ‘문’ 형태의 장애물을 도구의 도움이나 힘 들일 필요 없이 즉시 돌파하는 것이 가능한 덕분이었다.
“쿠헙?!”
먼지 커튼 속에서 지반 일부가 붕괴한 탓에 크게 당황하고 있던 한 각성자의 안면을 한 손으로 단단히 잡아채서 끌어당겼다.
무방비한 상태로 속절없이 끌어당겨진 각성자는 스킬을 발동하거나 반격을 가할 틈도 없이 갈빗대 아래에서 쳐올리듯 파고든 칼날에 호흡이 막혔다.
칼날이 막힐 가능성이 있는 갈빗대 틈새로 칼날을 박아 넣는 것보다, 명치 아래 횡경막 부근에서 칼날을 박아 올리면 매우 손쉽게 폐부를 찢어발길 수 있었다.
“그르르르…….”
폐 속에 피가 차오르면서 자력으로 호흡할 수 없게 된 각성자는 스스로의 피에 익사하는 농담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각성자를 뒤로 내던진 최묵호는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자신이 진입하기 전에 일어난 폭발은 아마 이승권의 소행일 터.
사실 적들이 이 최상층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한데 뭉쳐 있는 적들을 손쉽게 일망타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이승권은 종종 ‘저것들은 고통 없이 죽어선 안 될 놈들이다’라며 적들에게 죽음 직전까지 최대한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것이 육체적 고통이라면 차라리 낫다. 운이 좋으면 과다 출혈이나 격통으로 인한 쇼크사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승권이 적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같은 부대원들도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인간의 심리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가장 여리고 무른 속살을 날카로운 칼날로 저며 내듯이 조금씩 잘라 낸다. 그리고 때가 무르익었다 싶으면 다음 송곳으로 찌르고, 불로 지지고, 사정없이 으깨 버린다.
그건 상대가 일말의 희망도 가질 수 없도록 철저하게 짓밟고 부순 다음 높은 절벽 아래에서 떨어뜨리는 잔혹한 수법이었다.
그래,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이승권은 상대의 발밑을 노리는 걸 좋아했다.
인간이란 동물은 발 딛고 서 있을 발판이 존재하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라며,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야 고통과 공포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가 어째서 ‘개또라이’라고 불렸는지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 지금, 최묵호는 반쯤 무너진 최상층의 지반 아래에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놈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고작 층 하나만 무너져 내린 것이기 때문에 각성자쯤 되면 이런 높이에서 떨어졌다고 쉽게 죽지 않는다. 그래도 5~7m 높이쯤에서 추락했으니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긴 했겠지만, 저들은 차라리 즉사하길 기도했어야 했다..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추락한 시점에서 이미 반쯤 이승권의 계획대로 되었으니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운 좋게 지반 붕괴의 피해를 입지 않은 놈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뿐.
쾅! 쾅! 쾅!
갑작스럽게 무너진 지반과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때문에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놈들에겐 자비 없이 산탄을 먹여 주었다.
벅샷, 플레셰트, 슬러그, 가리지 않고 퍼붓기만 하면 백발백중, 평소처럼 상대를 빠르게 침묵시켰다. 최묵호는 이승권과 달리 상대에게 가능한 오랫동안, 큰 고통을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이 개새끼가!”
뒤늦게 자신들의 등 뒤에서 산탄을 쏘고 있는 최묵호의 존재를 눈치챈 몇몇 각성자들이 달려들었다.
그래도 아래에서 마주친 놈들보다는 좀 더 실력이 있는지, 몸을 쓰는 솜씨가 확실히 남달랐다. 그 사실이 오히려 최묵호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런 쓰레기들은 빨리 처리하고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강원도로 복귀해야 하는데, 꼴같잖게 각성 좀 했다고 주제도 모르고 덤벼드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다들 필사적으로 악행을 저지르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날 일이라면 그냥 쉽게 쉽게 항복하고, 항복할 수 없다면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끝내면 될 일 아닌가.
최묵호는 어째서 다들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밑바닥에 처박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원도에서부터 꾹꾹 눌러 왔던 분노 게이지가 슬슬 임계점을 돌파할 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내 호의를 무시하는 놈들이 참 많아.”
사람이 좋게 좋게 총을 쏘면 곱게 죽어 줘야지, 염병할 놈들은 꼭 이런 식으로 자신을 실망시키고, 분노케 하는 재주가 있었다.
-무의식 통제(B-) 실패!
최묵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더 이상 눌러 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단신으로 북한군이 숨어든 땅굴로 뛰어 들어가 적들을 도륙했던 그날처럼.
그가 ‘강습병’으로 각성하게 된 계기가 또 한 번 스위치처럼 작동한 것이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매우 단순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탄창이 빈 산탄총을 내던지고, 군용 대검 한 자루만 쥔 채 적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달려들어 목을 베고, 맨손으로 사람을 찢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 형태를 한 쓰레기를 분리수거할 수 있도록 알맞게 분해한 것이다.
지반이 붕괴되지 않은 최상층의 반대편에선 연신 비명이 울려 퍼지고 피보라가 휘몰아쳤다.
* * *
권력, 재력, 무력을 가진 놈들의 공통점은 ‘자신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권력자니까, 나는 돈이 많으니까, 나는 강하니까,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의 목숨을 지킬 만한 보험을 들어 뒀을 테니 자신의 절대적인 안전을 당연시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놈들도 자기 발밑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허무하게 추락하거나, 발목이 통째로 날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수많은 사례를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덕분에 나는 비로소 인간의 가장 취약한 부위를 알 수 있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가장 멀고, 주변을 살펴야 하는 눈이 가장 신경 쓰기 어려우며, 본능적으로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지반은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뇌를 속일 수 있는 곳. 바로 발밑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집요하게도 상대의 발밑을 공략하는 법을 터득했다. 평범한 인간, 노말 그 자체였던 쁘띠쁘띠 이승권에게 사실 지독한 발 페티시가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만큼.
끄기기기기긱!
전력이 공급되지 않아 굳게 닫혀 있던 엘리베이터 문을 강제로 개방하자, 폭발로 지반이 반쯤 무너진 최상층이 자욱한 먼지와 함께 나를 반겨 주었다.
그렇게 강력한 폭탄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폭탄 하나로 저놈들을 싹 다 날려 버리는 건 너무 아까우니까, 한 층의 지반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도록 적당한 균열을 만들었을 뿐이다.
C4 폭약을 찰흙처럼 오밀조밀 조금씩 빚어서 일일이 신관을 설치하고, 천장에 넓고 고르게 설치한 다음, 펑.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서 지반만 붕괴시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쾅! 쾅! 쾅!
지반이 붕괴된 최상층의 반대 층, 저 멀리서 시끄러운 총성과 비명이 울려 퍼지는 걸 보니 비상계단으로 올라간 최묵호는 자신의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지반이 붕괴된 끄트머리에 다가가 저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놈들을 내려다보았다.
무너져 내린 잔해와 박살 난 집기 사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놈들은 꼴에 각성자라고,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각성자의 튼튼함은 이미 질리도록 경험했기 때문에, 아마 저놈들 중 가장 심하게 다친 놈도 어디 한두 군데 부러진 수준에 그쳤을 것이다.
당장 선베드를 꺼내서 편하게 드러누워 놈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내 프로 의식이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만류했다.
하나둘씩 정신을 차린 각성자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잔해 속에서 동료들을 구해 내기 시작했다. 빠르게 재정비를 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이 마냥 병신들은 아님을 증명했다.
하지만 저 아래로 곤두박질친 순간부터 놈들은 더 이상 결말을 뒤집을 수 없게 됐다.
쿠구구구구…….
저 아래, 놈들이 먼지를 털어 내며 욕설을 내뱉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할 ‘하이라이트’가 올라오고 있었다.
“쿨럭! 쿨럭! 뭣들 하고 있어! 스킬이든 아이템이든 사용해서 다시 위로 올라갈…잠깐.”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놈들 중 유독 세련된 정장을 갖춰 입은 남성이 고개를 휙휙 돌렸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일까.
발밑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으니 당연히 이 상황이 이상하기야 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사자도 그걸 모르는 눈치는 아닌 듯, 연신 고개를 돌리면서 귀를 기울이거나 인상을 찡그렸다.
쿠구구구구……!
점점 더 가까워지는 진동과 소음. 내가 깔아 두었던 밑밥이 드디어 월척이 되어 이 고층 빌딩의 최상층 바로 아래까지 치고 올라왔다.
쿵! 쿵! 콰앙!
계단까지 반쯤 무너져 내린 벽을 부수고, 찌그러진 문짝을 아예 뜯어내면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공공의 적’ 디버프 효과를 받고 있는 내게 어그로가 끌린 좀비 떼였다.
“조, 좀비!”
“어떻게 놈들이 여기까지?!”
“분명 빌딩 입구는 다 막아 뒀잖아! 우린 어그로를 끌지도 않았는데……?”
좁은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좀비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약해진 내벽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좀비 하나가 필사적으로 기어 들어오기 위해 온몸을 던져 헤집을수록 점점 진입로가 넓어졌다.
무너져 내린 층에 고립된 각성자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중심으로 모여들어 원형 방진을 짰다.
각성자는 분명 강하다.
일반인과 멍청한 일반 좀비가 상대라면 하품을 하면서 설렁설렁 싸워도 이길 수 있다.
그들이 가진 막강한 스킬과 아이템은 마치 RPG 게임 속 고레벨 캐릭터처럼 적들을 도륙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본능적으로 머릿수에서 압도당하면 인간이 가진 심리적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물러서기 마련이다.
애초에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누가 좀비 같은 것과 목숨 걸고 싸워 봤겠는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요람에서 무덤으로 가기까지 남들과 주먹다짐 몇 번 하는 게 고작일 텐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목에 걸린 밧줄처럼 서서히 옥죄어 오는 그 감각을 저들이 알기는 할까?
싸우지 않으면 죽고, 죽이지 않으면 죽고, 죽음을 넘어서지 않으면 죽는 지옥을 경험해 본 이가 몇 명이나 있겠나.
‘그런 주제에 장난처럼 남에게 고통을 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목숨을 빼앗아 왔단 말이지.’
인간은 무언가를 이루는 것으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진다. 이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합의된 일종의 법칙이었다.
물리적으로 책임을 질 수 없는 인간들은 죄책감이라는 형태의 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책임도 지기 싫고, 짐을 지는 것조차 거부하는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인 놈들에게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오직 죽음으로만 치를 수 있는 대가다.
“쫄지 마, 이 새끼들아! 어차피 좀비들일 뿐이야! 죽이면 우리 경험치랑 DNA 샘플밖에 안 되는 좆밥들이라고!”
과연 그럴까?
구미에서 특수 좀비를 처리하고 획득한 이 디버프 덕분에 좀비에 대한 내 어그로 효과가 엄청나게 상승했는데, 그 덕분에 좀비 군단이 집어삼킨 이 포항 내부라면 이론상 수십만 마리의 좀비들이 나 하나만 노리고 달려드는 상황이다.
이미 창원에서 좀비들이 나 하나 때문에 미쳐 날뛰는 꼴을 경험해 본 바, 저 상태로 인간을 향해 달려드는 수십만 좀비 대군은 결코 좆밥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좀비 무한 디펜스 무대를 만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좀비를 죽이고 죽이다 보면 점점 더 강해져서 더 많은 좀비를 죽이고, 끝내 살아남는다는 희망적인 전개로 가득한 탈출구 없는 미궁.
나는 선베드를 설치하는 대신 인벤토리에서 시원한 레모네이드 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저 아래에서 이제야 내 존재를 확인한, 아마도 놈들의 우두머리일 것으로 추정되는 기생오라비 같은 남자를 향해 캔을 흔들었다.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가능한 오래 버텨서 날 즐겁게 해 주길 바란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으으으응!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응!”
“아아아아아아! 카아아아아아아아!”
마침내 벽이 무너지고, 형상화된 죽음이 저들에게서 대가를 징수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