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84)화 (184/227)

184화 수복기 (34)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같은 사람을 낮춰 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 말이 아주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그리 쉽게 바뀌는 동물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사실 바람에 쉬이 나부끼는 갈대처럼 환경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무조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건 약하고 가난한 사람이 무조건 착할 거라는 언더도그마 현상처럼 잘못된 선입견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필요에 의해 사람을 단순화하여 수치로 판단하는 사례보다, 그냥 자신의 위치가 높으니까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낮춰 보는 사례를 더 많이 겪었을 뿐이다.

그런 문제가 유독 심각한 집단을 딱 3개만 꼽자면 정계, 재계, 그리고 군대다.

속한 환경은 제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를 보이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인간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우월감’에 젖어 있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국민(유권자)은 개돼지다.

월급쟁이(직원)들은 개돼지다.

병사(의무 복무자)들은 개돼지다.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저지를 짓거리는 뻔하지 않겠나.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는 꼼수는 기본이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갑질은 패시브, 누군가의 소중한 목숨은 귀찮아서 손으로 쳐 내는 파리만도 못한 목숨 취급.

나와 최묵호가 목숨 걸고 침투한 이 빌딩의 주인도 그런 유형 중 하나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위험한 자리에, 집단의 리더가 누구보다 먼저 솔선수범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온전히 부하들에게만 떠넘겼으니까.

누구보다 남의 위에 군림하고 싶고, 권력도 마구 휘두르고 싶으면서, 정작 어떤 문제가 터지면 본인이 직접 나서기 싫어하는 모순적인 ‘갑’들을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

쾅! 콰앙! 쾅! 쾅!

최묵호의 산탄총이 연달아 묵직한 총성을 터뜨리며 플레셰트 탄을 쏟아붓자 아주 날카롭고 지름이 작은, 수백 수천 개의 송곳 같은 화살탄이 적들의 방어구를 찢어발겼다.

어디 군대나 경찰서를 털어서 가지고 나온 국산 방탄복을 주워 입은 모양인데, 그런 구닥다리로는 관통에 특화된 플레셰트 탄을 막을 수 없었다. 이건 탄환이라기보다는 무수한 칼날을 쏘아 보내는 것과 같았으니까.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시체들을 뛰어넘어, 놈들이 내려 둔 것으로 추정되는 방화 셔터에 대고 기관총을 쏴 갈겼다.

타타타타타타타!

통짜 금속도 아닌 방화 셔터는 금세 박살나고, 걸리적거리는 잔해는 나와 최묵호가 직접 발로 걷어차서 날려 버렸다.

자욱한 먼지 커튼 사이로 누군가가 던진 단검이 또 한 번 날아들었지만 이번에는 능숙하게 피해 냈다. 놈들이 금붕어 대가리가 아니듯, 나 또한 금붕어 대가리가 아니었으니까.

“놈들이 점점 후퇴하는 것 같은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먼저 달려들었는데, 이제는 일부러 우리 움직임을 늦추고 있어.”

“도망칠 곳 없는 장소에서 굳이 후퇴하는 놈들의 심리가 어떤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나와 최묵호는 묵묵히 통행에 방해가 되게끔 아무렇게나 배치해 둔 장애물을 치워 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기는 하겠지만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 알량한 대가리에서도 중간중간 우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체력을 빼앗아서 기습을 가한다는 그럴듯한 전술을 짜냈을 수도 있다.

세상 일이 다 그렇게 쉽게 돌아가면 즐겁겠지. ‘인생 별거 아니네!’ 하면서 대충대충 살아도 문제없었을 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녹록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인생을 날로 먹으려 했던 놈들은 이미 다 뒤졌다는 거다.

아니면 오늘 뒤질 예정이거나.

또 하나의 층을 완전히 처리한 우리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타고 올라 다음 층으로 향했다.

다음 층, 그다음 층, 또 그다음 층.

얼마나 많은 탄환을 쏟아붓고, 얼마나 많은 적들을 도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애초에 직업 숙련 레벨이 상당히 높은 각성자인 나는 본능적으로 나보다 레벨이 낮은 각성자를 느낄 수 있었고, 거리가 가깝다면 나와 적대하는 각성자가 어디에 있는지 대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모두 후퇴한 게 맞아. 다 같이 모여서 농성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보나 마나 최상층이겠군.”

나는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각성자들이 우글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최묵호와 찢어져서 행동했다.

적들이 먼저 산발적으로 게릴라전을 걸어올 때는 팀원과 뭉쳐서 대응하는 게 낫지만, 반대로 적들이 한데 뭉쳐서 항전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쪽이 신나게 게릴라전을 펼칠 차례였다.

산탄총을 들고 있는 최묵호는 비상계단으로, 나는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강제로 비틀어 열었다.

엘리베이터는 최하층에 처박아 두기라도 한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케이블이 멀쩡하게 남아 있어서 레펠을 타듯 오르내리는 건 가능해 보였다.

“사람은 당해 봐야 안다더라고.”

가장 높은 곳에 있다가 아래로 처박히는 그 참담한 기분을.

* * *

김주윤은 첫 폭음과 진동이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을 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입구 전체를 틀어막고 모든 창가를 가린 이 빌딩을 공략하는 방법은 허리를 부수거나, 옥상 위로 침투하는 방법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신을 포함한 팀장급 이상, 소위 말하는 최정예 각성자들은 모두 최상층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상대가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을 사용해 건물 옥상으로 침투한다면 즉시 요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따져 보면 상대가 헬기를 몰고 나타나지 않는 이상 압도적으로 높은 이 빌딩의 옥상으로 침투할 방법은 전무했다.

그래도 작정하고 포항에서 급변 사태를 일으킨 만큼 뭔가 보여 주겠지 싶어 기다리고 있었더니, 자신의 예상 범위 내였던 빌딩의 허리를 공략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걸어왔다.

상대가 자신들과 같은 각성자라면 지상에 득시글거리는 좀비 떼와 꽉 막힌 입구를 뚫기보다는, 비교적 쉽게 침투할 수 있는 적당한 층의 창가를 뚫고 침투할 거라는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변변찮은 놈들이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조소를 흘린 김주윤은 즉시 부하들에게 명령해 침입자를 상대하게끔 했다.

가능한 살려서 데려오되, 팔다리 하나쯤 자르는 건 상관없다는 뉘앙스로.

자신의 휘하에만 거의 300에 달하는 각성자들이 존재하는데, 휴식을 위해 일부 인원이 지하로 빠졌다고는 해도 상대를 제압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각성자가 일반인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고, 기상천외한 스킬이나 아이템의 유무 덕분에 전투력의 평균값을 도출해 내는 것도 굉장히 힘들지만, 그럼에도 이쪽과 상대의 전력 차는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즉 김주윤이 자신들의 부하가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을지언정 절대로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당장 자신들조차 만전의 상태가 아니면 압도적인 머릿수를 자랑하는 좀비 떼를 이겨 낼 방법이 없어 빌딩에 틀어박힌 상황이다.

물론 중화기 수백 수천 정을 이용해 포화를 쏟아붓는 것보다 그냥 핵폭탄 한 발을 터뜨리는 게 훨씬 더 강력한 것은 사실이나, 그런 예외 중의 예외를 누가 심각하게 고려한단 말인가.

상식이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회의 약속이며, 또 여러 상황에서 매우 빈번하게 통용되는 진리 같은 것이기에 상식인 법.

극소수의 일부 예외까지 고려하면서 상식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되레 심각한 오류다.

“내가 그리 많은 걸 기대했던가?”

“…….”

“……”

그리고 당연한 상식이 부정당했을 때 인간은 매우 혼란스러워하거나, 극도로 분노한다.

“내가 명령한 건 단 하나였다! 그 빌어먹을 놈의 사지를 잘라 내든 전신의 뼈를 아작 내든 내 앞으로 데려오기만 하라고!”

특히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한 사람일수록 ‘자신만의’ 상식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김주윤은 부하들이 그 쉬운 명령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심지어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는 보고에 황당함을 넘어 분노하기에 이른 것이다.

부하들이란 당연히 상급자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법이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뭘 위해서 지금까지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키워 줬겠는가.

유능한 손발이어도 모자랄 판국에도 명령 하나 제대로 듣지 못하는 손발이라니. 이쯤 되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불량품 아닌가?

“회장님, 외람되지만…… 상대는 정말 강했습니다. 다년간 전투 경험을 쌓은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무기를 효과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측 각성자들을 제압했습니다.”

“각성자의 능력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전투 기술과 센스에 당한 게 더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편하게 좀비를 잡고, 편하게 경험치와 DNA 샘플을 얻어서 강해졌으면 그에 상응하는 밥값을 해야지!”

“…….”

괜히 나섰다가 쿠사리를 먹고 찌그러진 3팀장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다른 팀장들을 훑어보았다.

“우리가 부족한 게 뭐가 있지? 물자? 장비? 사람?”

부족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만한 수의 각성자들이 마음껏 날뛰었음에도 상대에게 밀렸다는 것은 순수한 능력 문제였다.

김주윤의 말을 바꿔 말하면 다른 건 다 충분한데, 인재가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 팀장급들이 그의 면전에서 욕을 먹는 것도 당연했다.

소수의 침입자도 제압하지 못하는 각성자 팀을 이끄는 팀장들 또한 무능하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여간 이래서 천성이 버러지인 것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진 김주윤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째서 회사 직원들을 막 대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놈은 무능한 놈, 버티고 버텨서 강해지는 놈들은 인재.

사람을 인격체가 아니라 성과를 보고 판단했던 선대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깨우침을 얻은 그는 셔츠의 손목 단추를 풀었다.

“쯧, 됐다. 내가 직접 나서지.”

부하들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 자신이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나서면 된다.

김주윤이 각성한 직업은 CEO.

자신이 부하들에게 보여 주는 카리스마가 짙을수록, 부하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지지가 높을수록 신체 능력이 큰 폭으로 상승하고, 순차적으로 개방되는 전투 스킬 및 지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부하들이 상당수 죽거나 다치는 바람에 능력 일부가 제한되긴 했지만, 반대로 살아남은 부하들이 더 열렬하게 자신을 지지한다면 다시 메꿀 수 있는 틈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자 부하들이 보내는 지지도가 큰 폭으로 상승했다. 제약되었던 능력도 다시 개방되면서 본래의 전투력을 복구했다.

심지어 일반인이 아니라 각성자들이 보내는 지지였기 때문에 능력의 상승폭은 더욱 큰 상황.

이제는 절대로 패배할 수 없고, 패배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다짐하고 집무실을 나선 그는 친정을 나서는 왕처럼 위엄 있는 모습으로 부하들 앞에 섰다.

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150이 넘는 대인원이, 모두가 각성자로 구성된 전투 집단이 자신에게 강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미 피해를 입은 건 입은 거고, 침입자를 제압해서 직접 처리한 뒤 포항 전체에 일어난 급변 사태를 잘 헤쳐 나간다면 자신은 전례 없는 강력한 각성자 리더가 될 것이다.

그 순간, 폭발과 함께 지반이 붕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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