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수복기 (31)
각성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멸망하기 직전인 인간을 보호하고자 대자연이 내려 준 선물이라고 하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사실 어떤 위대한 존재가 멸망해 가는 인류의 마지막 발버둥을 지켜보기 위해 추가한 유희 도구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21세기에 초자연적 현상의 개입은 확실히 수많은 인간들을 당황시킬 만했으니, 김주윤은 각성에 대해 누가 어떻게 평가하든 확실한 정답과 오답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정말 중요한 건, ‘각성에 성공한 당사자들이 그 힘을 어떻게 휘두르느냐’였다.
미개한 원시 시대, 왕조 시대,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현대의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변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진실된 사상이 있지 않았던가.
약육강식(弱肉強食).
권력, 무력, 재력 있는 자들이 언제나 자신들보다 약한 존재를 희생시키거나 노예처럼 부려서 눈부신 발전과 부귀영화를 누려 오게 했다.
마치 역사의 산 증인과도 같은 이 흉악한 사상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세대가 얼마나 교체되었든 단 한 번도 고려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모든 인간들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할 때부터, 아니 어쩌면 DNA 단위에서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 잡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김주윤은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부터, 그리고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에도 딱히 ‘변화’를 느끼지 않았다.
그저 세상의 형태가 조금 바뀌고,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 세계의 절대 법칙과도 같은 약육강식은 언제나 그들 곁에 있었으니까.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허어, 이놈도 죽었나.”
김주윤은 ‘폰팔이’라는 직업으로 각성한 놈에게서 구매했던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고작 통화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방이 죽었을 거라고 장담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만, 사실 돌아가는 사태를 보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주기적으로 연락하던 포항 내의 권력자들이, 갑작스러운 포항 급변 사태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 이틀 차에 연락이 두절이 되었다.
사흘까지 버티고 연락을 한 이들은 손으로 꼽을 만큼 극소수였다. 그리고 개중에는 김주윤이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하고 친분을 쌓아 오기도 했던 인간 도살자 백도진도 있었다.
그런 백도진이 바로 어제, 굉장히 힘들어하는 기색이 담긴 연락을 보내왔었는데 나흘 차인 오늘은 더 이상 연락을 받지 않았다.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직접 상황을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제 백도진이 보냈던 연락을 곱씹어 보면 굉장히 위태롭기는 했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가장 먼저 죽고, 그다음 사람 팔아먹으면서 세를 키운 놈들이 죽었으니, 이제 스스로 힘을 키운 우리 차례라는 건가?”
김주윤이 이끄는 각성자 집단 구성원 모두가 좀비 사냥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명색이 각성자라고, 조직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좀비를 사냥하고 힘을 키운 ‘강자’들이었다.
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약육강식에 어울리는 인재들’.
이 도시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오래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것이 바로 김주윤과 휘하의 각성자들이었다.
‘범인을 특정하지는 못했지만, 우린 충분히 버틸 여력이 있다.’
조직 구성원 모두가 각성자인 데다, ‘약육강식’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쌓아 둔 엄청난 양의 물자도 있다. 심지어 일반인처럼 멍청하게 물자를 창고에 쌓아 둔 게 아니라 모든 조직원들이 각자의 인벤토리에 물자를 쟁여 둔 상황이다.
그마저도 부족하다면 상점창을 이용할 수도 있다. 상점창을 이용할 DNA 샘플이 부족하다면 다 같이 협력해서 좀비를 사냥하면 된다.
도시 전역이 좀비들에게 집어삼켜진 이 최악의 상황이 일반인들에겐 재앙이라면 각성자들에겐 오히려 기회나 다름없었다.
단지 예상치 못한 기습을 허용한 탓에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할 뿐.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회장님, 바리케이드 보수 작업을 모두 끝냈습니다. 사옥 주변에 좀비들이 절대로 닿을 수 없는 높이까지 강화 콘크리트와 철근을 섞어서 벽을 쌓았으며, 외부에서 내부를 확인할 수 없도록 모든 창문에 강화 필름을 발랐습니다.”
“소음 문제는?”
“그 또한 상점창에서 방음재를 구입해 주요 생활 구역에 설치했습니다. 소음 측정 실험을 해 본 결과 매우 효과적으로 외부 소음을 차단했습니다. 이미 인원을 짜서 교대제로 휴식과 경계 근무를 병행시키고 있습니다.”
“좋네. 역시 일 처리가 빨라. 아버지가 괜히 박 비서를 좋아하신 게 아니라니까?”
“……과찬이십니다.”
김주윤은 피식 웃으며 중년 사내를 손짓을 내보냈다.
포항의 꽤 유명한, 대기업은 아니지만 견실한 중견 기업 정도는 되는 건설사의 주인이었던 아버지가 사고로 죽자, 김주윤은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꿰찼다.
오갈 곳 없는 회사 직원들 중 싹수가 있어 보이는 인재들만 자신의 휘하에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새로운 회사를 구축했다.
부하들에게 꼬박꼬박 회장님 소리 듣고 대접받는 것도 그의 개인적인 취향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그는 강자니까.
강자는 대접받을 자격이 있고, 받들어 모셔지는 게 당연한 존재다.
약자들은 강자에게 빌붙어 자비와 낙수 효과를 기대하면서 하루하루 비루한 삶을 연명해 나가면 된다.
그들의 삶에 ‘자주(自主)’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강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애초에 강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버러지들 아닌가.
강자가 약자를 의미 있게 사용해 주면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국에, 최근에는 갑질이니 뭐니 떠들어 대면서 반항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이번 포항 급변 사태도 자신들의 행동 방침에 불만을 품은 어느 돼먹지 못한 놈들이 합심하여 일을 벌인 것이겠지.
김주윤은 조직원 모두의 휴식과 재정비가 끝나면 곧바로 정예를 이끌고 직접 나서서 역공을 가할 생각이다.
좀비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 봤자 집단으로 움직이는 각성자에 비할 바는 아니며, 하물며 좀비의 손을 빌려 자신들을 차도살인 하려 했던 버러지는 더더욱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다.
추적에 능한 각성자들도 있으니 사태가 해결되는 대로 그들을 풀어 범인을 수색하고, 반드시 붙잡아서 약자가 강자에게 대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알려 줄 것이다.
죽을 땐 죽더라도 자기 주제는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 * *
세상에는 생각보다 자기 주제를 알기도 전에 죽는 놈들이 많다.
쾅! 쾅! 쾅!
대한민국이 만들어 낸 무식한 전자동 샷건계의 역작 USAS-12가 맹렬하게 불을 뿜었다.
묵직한 12게이지 산탄쉘이 발포될 때마다 크레모아를 터뜨린 것처럼 무수한 쇠구슬이 전방의 모든 것을 찢어발긴다.
산탄쉘에 들어가는 쇠구슬도 사용처에 따라 각기 다른 구경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선호하는 쇠구슬의 지름은 8.5mm 매그넘 벅샷이다.
쇠구슬의 지름이 작아서 대인 살상력이 떨어지는 버드샷에 비해, 벅샷은 커다란 짐승도 한 번에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다. 심지어 이 벅샷을 전자동으로 갈겨 버린다면 문자 그대로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지금처럼 최소한의 방탄복도 갖춰 입지 않은, 애초에 인간과의 총격전을 상정하지 않은 무식한 놈들이 상대라면 이 K-산탄뿌리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예절 주입기가 된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작은 쇠구슬 하나가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찢어지고, 운이 나쁘면 급소에 적중해서 치명상을 입힌다. 그런 산탄을 정통으로 얻어맞으면 사지가 찢기듯이 떨어져 나가는 건 당연했다.
꼴에 각성자라고 자신의 시그니처 무기를 꼬나쥐고 덤벼들었던 놈들은 스킬을 발동하기도 전에, 혹은 스킬을 발동했다고 해도 산탄이 박힌 채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끄릅, 크흑! 커흐으으으……!”
팔다리가 찢어져서 바닥을 뒹굴고 있는 놈, 산탄을 얻어맞고 반대편 벽까지 튕겨 나가서 울컥울컥 피거품을 토해 내고 있는 놈, 플라스틱과 나무로 만들어진 칸막이 뒤에 숨어 있다가 관통당해서 머리가 깨진 놈까지.
지난 2개월간 자신들이 너무나도 압도적인 강자 포지션을 유지했던 탓에 현실 감각을 잊어버린 놈들투성이였다.
아무리 강력한 각성자로 구성된 집단이라고 해도, 전쟁이 끝난 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은 국가에서 ‘총알 한 발에 죽을 수도 있다’는 당연한 상식을 배제한 건 어떨까 싶다.
철컥!
재장전을 끝마친 나는 꿀럭꿀럭 피를 토해 내고 있는 한 각성자에게 다가갔다.
놈은 폼 나게도 양손에 손도끼를 하나씩 쥐고 자신만만하게 달려들었는데, 벅샷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즉사하지 않았다. 아마 근접 전투에 특화된 직업으로 각성해서 육체를 강화하는 스킬을 얻은 것이겠지.
당장 나만 해도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을 극도로 높여 주는 전투 자극제나, 특정 영역을 장악해서 우호 지역으로 설정하면 아군의 신체 능력을 높여 주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내가 각성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너무 스킬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거야.”
사기적인 스킬은 분명 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런 스킬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면 다양한 변수 창출도 할 수 있으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과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
나도 스킬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다른 각성자가 무심코 자신의 스킬을 맹신하게 되는 것도 아주 이상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레벨 업을 했을 뿐인데, 스킬의 등급을 높였을 뿐인데, 좋은 아이템으로 무장했을 뿐인데, 죽도록 노력해야 겨우 변화했던 과거의 자신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강해질 수 있다.
사람에 치여 살던 간호사가 능숙한 전투원으로 거듭나고, 실탄 사격 한 번에 시말서 쓸 걱정이나 해야 했던 경찰이 최강의 보안관이 되는 시대다.
아버지 밑에서 검도를 배우던 여자아이가 전광석화로 움직이며 모든 것을 베어 버리고, 심심풀이로 야생동물이나 사냥하던 엽사가 무시무시한 저격수로 진화하는 시대다.
그런 시대의 격류에 자신의 변화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적잖이 기뻤겠지.
어? 사실 나도 좀 치는 거 아냐?
나 정도면 꽤 강한 편이지.
내 힘으로 못 할 일은 없어!
기껏해야 약자를 상대로 힘을 휘두르던 놈들이 이런 망상에 빠져서, 자신이 뭐라도 된 양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게 얼마나 꼴같잖고 한심한지.
무식할 정도로 성실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경험을 쌓고, 스스로를 단련한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좆으로 보이는 건가?
“불법 무기도 있다며. DNA 샘플로 저런 쓸모없는 콘크리트 벽까지 구입해서 세우는 놈들이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방탄복 한 벌 갖춰 입지 않은 거지? 대답해 봐, 이 새끼야.”
내가 총구 끝으로 놈의 머리를 툭툭 치며 물었지만, 놈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자동 묵비권을 행사한 셈이다.
나는 놈이 바닥에 떨군 손도끼 하나를 집어서 그대로 반대편 복도로 던졌다.
퍽!
뒤늦게 방독면을 구입해서 조심스럽게 최루가스를 헤치고 접근하던 놈의 이마에 도끼날이 파고들었다.
“포복의 기본도 모르는 새끼. 북한군도 너보다는 더 조용히 접근했었다.”
희뿌연 가스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감각적으로 손도끼를 때려 맞춘 놈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그 뒤로 최묵호가 쏜 산탄이 휩쓸고 지나갔다.
가스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접근하던 놈들이 산탄에 갈려 나간 것을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총은 살살 맞아도 아프기 때문에 죽지 않은 놈은 반드시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기 때문이다.
“이 개새끼야! 죽어어어!”
동료들이 순차적으로 산탄에 쓸려 나가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걸까, 계단을 타고 위층에서 뛰어 내려온 놈이 이쪽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 난사를 가했다.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저 낯익은 동구권 총기는 참 질리도록 봤던 러시아제 AK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총기계의 베스트셀러, 너무 만들기 쉬워서 테러리스트 놈들이 가내 수공업으로도 만드는 놈 아니랄까 봐 무식하게 연발로 당겨도 잔고장이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각성자가 사용하는 총기 아니랄까 봐 어떤 특수한 처리가 된 것인지, 바닥이나 벽, 천장에 맞은 총알은 그대로 박히지 않고 반드시 한 번 이상은 튕겨 나갔다.
탱탱볼처럼 어지럽게 튕기는 도비탄이 이따금 내 방탄복이나 헬멧을 스치고 지나가며 적잖은 충격을 전해 주었다. 이래서 자신 있게 조준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난사한 거다.
“스킬을 맹신하지 말라니까.”
자세를 낮추고 수류탄의 핀을 뽑은 뒤 2초 대기, 총성이 울려 퍼지는 곳을 향해 휙 던졌다.
수류탄은 보통 3~4초에 터지기 때문에 실내전에서는 핀을 뽑은 뒤에 반드시 1~2초 정도 기다리고 던지는 게 좋다.
꽈아아아앙!
그럼 이렇게 상대가 대응할 틈도 없이 날아간 수류탄이 곧바로 터진다. 상대의 머리 위에서, 혹은 발밑에서.
수류탄에 분쇄된 상대의 살점과 뼛조각들이 아무렇게나 날아들었다. AK를 들고 쏘다가 수류탄에 죽는 꼬라지가 마치 북한군 같았다.
-전부 죽여야 해.
“내가 리드한다. 따라와.”
무전을 보내자 곧바로 최묵호가 내 뒤에 따라붙었다. 녀석에게서도 나와 같은 피와 화약 냄새가 확 풍겨 오는 걸 보니 꽤나 때려잡은 모양이다.
“위로? 아니면 아래로?”
“위로 간다.”
나는 건물 아래에서 좀비들이 내뿜는 특유의 집단 소음이 울려 퍼지는 것을 확인한 뒤, 위쪽으로 총구를 겨누며 계단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