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80)화 (180/227)

180화 수복기 (30)

일을 같이 하자고 선뜻 말하기는 했지만 묵호 아쎄이가 내게 의문을 품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묵호 아쎄이에게 궁금한 것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왜 너 혼자냐? 다른 놈들은 다 어디 가고? 기열찐빠 이기열이랑 마장동 정육점 아들인 게 인생 유일 업적인 김호연은?”

“기열이랑 호연이는 평창에 두고 왔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져서 그나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조용한 강원도로 피신했는데, 거기서 구출해 낸 피난민들을 지켜 줄 사람이 우리 말고 없었거든.”

“너희들 정도면 그 민간인들 전부 데리고 대구로 내려가는 것 정도는 가능했을 것 같은데?”

“민간인들을 데리고 겨울 산을 넘어서 수백 km가 넘는 행군을 해야 하는데 그걸 버틸 체력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 물자가 너무 부족했어. 짬나는 대로 강원도 산골에 갇힌 좀비들을 찾아내서 쳐 죽이긴 했지만, 그렇게 벌어들인 DNA 샘플로는 누구 코에 붙이기도 힘들더라고.”

예상대로 셋 모두 진즉에 각성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자랑스러운 북진 용사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다.

“다른 동기들 소식은?”

“우리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수도권 인근에 머무르면서 통원 치료나 입원 치료 받던 놈들이야. 그런 전문적인 인프라의 도움을 받아야 간신히 사회 부적응자 딱지를 뗄 수 있는데, 너처럼 태평하게 지방으로 내려간 놈들이 얼마나 되겠냐. 좀비 사태가 가장 먼저 발발한 곳이 서울이었으니 사실상 다 죽었다고 봐야지. 기열이랑 호연이도 강원도에서 겨우 만난 거다.”

“…….”

당시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끝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작정 지방으로 내려왔지만, 대다수의 동기들은 5년 만에 복귀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을 것이다.

정신병자 취급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열심히 병원을 다니면서 ‘정신적 재활 훈련’을 했을 것이다. 떨어져 지냈던 가족, 친구, 연인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도 보냈을 것이다.

그래야만 전쟁의 참사를 잊고 다시 멀쩡한 사회인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들이 스스로 칼날을 무디게 만들면서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결과가 좀비 사태로 인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라니.

‘사람 인생이 어떻게 그따위로 흘러가는지…….’

이 이상 북진군 얘기를 계속하면 저도 모르게 창원으로 달려가서 죄 없는 현직 대통령 멱살만 잡고 싶어지기 때문에, 나는 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본래 우리가 나눴어야 할 본론으로.

“요 나흘간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지켜봤다면 대충 사정은 알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 사냥꾼들 때문이라는 건 알아. 나도 강원도에서 혼자 내려온 이유가 그놈들 때문이니까.”

듣자 하니 강원도에는 창원, 울산, 포항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범죄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한다.

이 좁아터진 나라에서 용케 삼국지 비스무리한 형국을 만들어 냈다고 하는데, 사이비 종교 단체, 테러리스트 조직 그리고 불법 무기 암시장으로 몸집을 키운 전국구 범죄 조직이 강원도를 천하삼분지계 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놈들이 매일같이 잡아 오는 인간들은 철저하게 상급, 중급, 하급으로 분류돼서 노예, 고기 방패, 좀비 먹이로 쓰이고 있어. 놈들을 더 내버려 두면 평창에 몸을 숨긴 우리들이 노려지는 것도 시간문제라 도움을 구하려고 남부 지방까지 내려온 건데, 설마 포항의 쓰레기들이 인간 공급자였을 줄이야. 이게 정말 우리가 목숨 걸고 지킨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맞나 싶더라.”

“확실히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교훈 비용치곤 지나치게 비싸고 지독하지.”

하지만 어쩌겠나. 세상은 이미 요지경이 됐고, 요지경에 딱 어울리는 쓰레기들이 강자의 반열에 올라 약자들을 핍박하는 더러운 사회 구조가 완성돼 버렸는데.

그러니까 밑바닥부터 싹 엎어 버리고 다시 세울 생각이다.

“그래서 나 혼자였으면 좀 힘들었을 것 같은데, 네가 합류한 덕분에 시도해 볼 만한 계획이 하나 있어. 수신료의 가치가 느껴질 만한 100점짜리 계획이지.”

“말해 봐.”

“놈들이 거점의 방비를 굳히고 무한 존버에 들어간 탓에 기껏 어렵게 불러들인 좀비들도 소강 상태에 빠졌어. 그러니 너랑 네가 놈들의 거점에 직접 침투해서 파괴 공작을 벌이는 거야. 가게가 손님을 안 받고 배짱 장사를 있으니 우리가 직접 오픈해 줘야지.”

“……잠깐,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계획인데?”

“표절 시비 걸릴 일 없는 이승권 함량 100%짜리 계획인데?”

“당연히 네 계획이겠지. 북한 땅굴 소탕할 때 썼던 계획이니까.”

“아아, 모르는가. 이것은 전문 용어로 [자기 복제]라고 한다.”

“그리고 평범한 북한군이나 좀비도 아니고 각성자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적 소굴에 우리 둘만 들어가자고? 그건 미친 짓이야.”

“그래서 싫다고?”

“당장 하자.”

피식 웃은 나와 묵호 아쎄이는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각자의 무기를 챙겼다.

나는 창원에서 확보한 공업 단지에서 생산한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신품 USAS-12 전자동 산탄총 한정을 거점 창고에서 꺼냈다.

대한민국 방산 기업들의 공장과 연구소가 밀집되어 있는 창원의 공업 단지를 확보한 이유는 다양한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다목적 군수 물자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언제까지고 국밥 같은 K-2 소총과 .38 구경 리볼버만 우려 먹을 수도 없으니, 슬슬 다채로운 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받아라, 묵호 아쎄이.”

“미친, 이거 USAS잖아. 상태 보니 완전 신삥인데 어디서 구한 거냐?”

“네가 강원도에서 하얀 똥이나 맞고 있을 때 나는 김해의 적법한 군주로 등극하고 부산 시장 후보로 등록했으며, 대구의 아들이 되었고, 창원의 경제 전문가로 거듭났거든.”

“각성해서 좋은 스킬이라도 얻었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센스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지만, 이승권의 인간 승리를 ‘방장 개사기 맵’ 하나로 퉁친 것은 조금 아쉬웠다.

내가 어떤 직업으로 각성해서 어떤 스킬을 얻었는지, 지난 두 달간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눈곱만큼도 궁금하지 않은 듯, 묵호 아쎄이는 말없이 손만 내밀었다. 총만 주고 탄약은 왜 안 주냐는 의미였다.

벅샷, 슬러그, 플레세트(Fléchette)로 산탄 쉘을 왕창 꺼내고, 상점창에서 탄알집을 따로 달려 있는 조끼와 방탄복, 헬멧을 구매해서 넘겨주었다.

자국 군인들이 사용하는 국산 방탄복과 헬멧의 성능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경험담이다), 보호 장구는 반드시 DNA 샘플을 비싸게 지불하더라도 상점창에서 직접 구입했다.

20발들이 드럼 탄창에 벅샷 2 : 슬러그 0.5 : 플레세트 0.5 비율로 꽉꽉 채운 최묵호는 내가 건네준 보호구도 군말 없이 착용했다.

지금까지 물자도 없어서 굶주렸다고 하니, 아마 상점창에서 이런 FLEX를 해 본 적이 없을 거다.

“상점창에서 판매하는 현대 무기나 장비 같은 건 아무리 싸도 수백에서 수천 DNA 샘플은 받아먹던데, 넌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구매할 만큼 여유로운 모양이다?”

“많이 여유롭지. 저런 버러지 새끼들처럼 좀비 키워서 죽이지 않아도 될 만큼 다방면으로 벌어들이고 있으니까.”

집단으로 활동하는 각성자들은 서로 경험치와 DNA 샘플을 나눠 먹느라 상대적으로 레벨 업도 늦고 수익도 그리 높지 않겠지만, 나는 직업과 스킬 특성상 거의 모든 경험치와 DNA 샘플을 독식했다.

“상태창.”

[생존자: 이승권]

[직업: 퇴역병]

[직업 숙련 레벨: 39]

[칭호: 오버킬, 피바람, 응급 구조 요원, 동족 포식자, 농성의 왕, 부산의 승궈이햄, 변종 혐오자]

[생존 기간: 67일 차]

[숙련 포인트: 29]

[특수 DNA 샘플: 1]

슬쩍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 보니 창원과 울산, 그리고 포항에서 잔뜩 지지고 볶은 덕분에 벌써 직업 숙련 레벨이 39에 도달한 상태였다.

‘곧 40 찍겠네.’

숙련 포인트가 30을 넘기면 영역 지정(B-) 스킬을 단번에 (A-) 등급으로 업그레이드할 생각이다.

영역 지정 A 등급부터는 타 적성체나 중립체의 영역을 영역 전쟁 없이 거의 확정적으로 강제 탈취할 수 있다. 영역의 자체 내구도와 규모, 방위 무기의 수준도 훨씬 더 향상될 테니 그때부턴 작정하고 ‘이제부터 다 제 겁니다.’를 시전할 수 있을 거다.

수신호 확인부터 무장 점검, 그리고 서로의 직업과 레벨 정보까지 모두 공유한 우리는 드디어 저 앞에 보이는 벙커 비스무리한 적지 침입 준비를 끝냈다.

덧붙여서 최묵호의 직업은 ‘강습병’이었으며 레벨은 11이었다.

생각보다 레벨이 낮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나 최묵호나 그 부분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린 상태창이나 각성 시스템이 없던 시절에도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예외 없이 잘만 쳐 죽였기 때문이다.

어그로가 풀린 좀비들이 흥미조차 가지지 않는, 포항 도심 생활권의 시가지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은 고층 빌딩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간과 좀비가 닿을 만한 높이의 모든 입구와 창문이 콘크리트 벽으로 봉쇄되었고, 외부에서 내부를 확인할 수 없도록 모든 창문에도 암막 커튼이나 나무 판자 같은 걸 덧댄 흔적이 있었다.

흡사 거대한 빌딩형 벙커를 연상케하는 저 각성자 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빌딩 입구, 빌딩 창문, 빌딩 옥상, 어느 쪽으로 침투해도 적들의 정열적인 환영 인사가 기대된다.

내게 힘을 줘. THE 인비지블 핸드 애덤 스미스.

그러자 정말로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하늘을 잘 날아다니고 있던 UCAV를 붙잡아 인정사정없이 빌딩의 허리춤을 향해 꼬라박았다.

꽈아아아앙!

꽤 요란한 폭발이 일어난 것치곤 튼튼한 빌딩의 측면 일부가 파괴되는 것에 그쳤다.

폭연과 불씨가 흩날리는 빌딩 측면을 향해 힘껏 뛰어올라 짚라인의 후크를 발사했다. 길게 뻗어 나간 짚라인을 미친 듯이 되감자 내 몸이 자연스럽게 빌딩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럼 우리의 레벨 11따리 강습병 묵호 아쎄이는 어떻게 넘어왔는고 하니.

“뭐 하러 그리 요란하게 넘어가냐?”

하늘에서 날다람쥐처럼 가볍게 양팔을 확 펼친 것만으로도 교과서 같은 ‘강습’에 성공한 묵호 아쎄이가 나를 비웃으며 스쳐 지나갔다.

나의 오갈 곳 없는 수치심과 분노는 순식간에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 원한은 빌딩 내부에 틀어박힌 놈들이 값을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쿨럭! 쿨럭! 치, 침입자……!”

“아가리.”

콰앙!

샷건의 묵직한 반동과 총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복도에서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던 놈이 다시 복도로 쫓겨났다.

불타고, 바스러지고,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 사무실에서 방독면을 착용한 우리는 ‘평소 하던 대로’ 최루탄부터 까서 휙휙 던졌다.

복도로 굴러 나온 최루탄이 오크처럼 취이이이익 하는 소음을 흘리면서 삽시간에 희뿌연 가스를 퍼뜨렸다.

인프라가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면 지금쯤 화재경보기가 울리고 스프링 쿨러가 작동하면서 물이 쏟아져 나왔으련만, 파괴와 약탈 외엔 재주가 없는 버러지들이 생활 인프라를 유지시켰을 리가 없다.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피로에 찌들어 있을 놈들이 필사적으로 대가리를 굴려서 생각해 낸 계획이 고작 거점과 외부를 완전히 차단하고, 그 틈에 휴식을 취하며 재정비를 한다는 것이었다니.

누가 너희의 꿀 같은 휴식을 보장하고, 누가 너희의 생명 연장을 허락한다더냐.

쾅! 쾅! 쾅! 쾅! 쾅!

복도에 최루탄을 까 던진 우리는 사무실의 얇은 벽과 유리문을 산탄총으로 미친 듯이 깨부수며 지형을 강제로 넓히고 루트를 확보했다.

그리고 방독면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거나, 한발 늦게 방독면을 착용한 놈들이 쿨럭거리는 기침을 토해 내는 곳으로 총구를 돌렸다.

희뿌연 최루 가스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기회를 잘 노려서 역으로 기습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철컥!

그런 놈들은 샷건에 다짐육이 돼 봐야 정신을 차리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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