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76)화 (177/227)

176화 수복기 (26)

포항에 자리 잡은 범죄 조직과 각성자 집단은 좀비 사태 발발 직후, 약 2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쓸만한 노예’와 ‘쓸모없는 먹이’를 모조리 잡아서 타 지역 세력에 갖다 팔거나 저들끼리 소모했다.

인간을 ‘소모’한다는 표현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인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좀비와 DNA 샘플, 경험치, 아이템, 제작 레시피, 스킬 등등. 시스템의 메커니즘을 빠르게 깨우친 그들에게 포항으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은 훌륭한 소모품이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멸망하고, 정부가 무너지고, 법과 질서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도시에서 악인들이 좋지 않은 쪽으로 머리를 잘 굴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보여 준 사례이기도 했다.

악인들이 빠르게 단합하여 범죄 조직과 각성자 집단을 결성한 시점에서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악한 자들이 지배 세력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로 배우지 않았던가.

가장 먼저 그들에게 제압된 것은 반항의 여지가 있는 건장하고 젊은 성인 남성들 및 소수의 경찰과 군인이었다.

처음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대부분 죽음뿐이었으며, 어느 정도 인간 청소가 진행된 후에야 노예로 팔려 나간다는 또 다른 선택지가 추가되었다.

특히 비교적 다루기 쉬운 노약자와 미성년자, 그리고 여성들을 ‘쓰임새’에 따라 철저하게 분류했다. 마치 가축처럼.

족히 수십만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그런 방식으로 처리했으니, 고작 2개월 만에 포항이 텅텅 비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이제 포항에 남아 있는 이들은 슬슬 타 지역으로 진출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크고 작은 범죄 조직들과 각성자 집단뿐이었다.

당장은 추운 겨울이니까, 펑펑 낭비하더라도 족히 몇 년은 쓰고도 남을 법한 대량의 물자로 이번 겨울을 난 뒤에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자고 서로 암묵적인 합의를 끝마친 상태였다,

말단 조직원부터 윗대가리까지 포함해서 범죄 조직 인원만 수천 명에, 도시 하나를 지배하고도 남을 각성자들이 수백 명, 그들이 또 다른 도시에서 맞이할 밝은 미래를 꿈꾸며 무방비하게 밤의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던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직장인들도 연말 정산을 끝마치고 나면 다들 축 늘어져서 나태한 연휴를 보내지 않던가.

누구도 자신들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설령 옆동네에 자리 잡은 거대 세력인 대구조차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당연히 남은 건 물자를 흥청망청 낭비하는 파티밖에 없는데, 이제 막 술병을 들어 올린 그들의 고막을 때린 것은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쏘아 올린 폭죽음이었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너무 흥겨운 나머지 어떤 놈이 참지 못하고 파티용 폭죽을 쏘아 올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싹 사라지기까지는 1분도 채 소요되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열, 백.

도시 외부에서, 혹은 도시 내부에서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한 폭죽의 개수는 삽시간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아졌고, 번쩍거리는 불빛과 소음이 사방 천지를 가득 메웠다.

백도진이 이끌고 있는 백도어파도 얼마 전에 강릉 소속 인간 사냥꾼들에게 마지막 노예를 팔아 치운 것을 끝으로 당분간은 푹 쉴 생각이었다.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는 유의미한 수입 없이 물자만 축내야 한다는 사실이 백도진 입장에선 못내 아쉬웠으나, 외부 활동이 어려워지는 겨울만 지나고 나면 다시 자신들의 세상이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랬는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습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혀, 형님! 지금 폭죽이…… 도시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고 있습니다!”

“그건 눈깔이랑 귀 두 짝 제대로 달려 있으면 누구나 다 알아, 이 새끼야! 어떤 미친 새끼들이 이딴 짓을 저질렀냐고 묻는 거잖아!”

“지금 애들이 뛰어다니면서 알아보고 있는데, 전부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합니다!”

“뭐 이런 병신 같은…… 됐으니까 일단 애들 다 불러들여!”

“예?! 지금 상황 알아보느라 밖에 내보낸 애들이 좀 많습니다만…….”

“됐으니까 다 불러들이라고! 상황 파악이고 자시고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봐라! 지금 도시 전역에서 이 난리가 났는데 과연 ‘평상시’와 같은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냐?!”

백도진이 윽박지르자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부하가 다급하게 무전기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간 이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지금까지는 특정 조직이나 집단이 스케줄을 짜서 적당한 시기에 외부에서 몰려드는 좀비들을 처리해 왔었다.

단체 생활에서 당번제로 밥 차리고 쓰레기 버리는 것처럼, 도시의 모든 이들이 합심해서 처리해야 하는 일을 최소한의 인력으로만 뺑뺑이를 돌렸다는 얘기다.

지금까지는 도시 생활권 내부로 흘러 들어오는 놈들만 적당히 처리하면서 다음 당번에게, 그 당번이 또 다음 당번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무난하게 생활해 왔다.

인간을 다수 포식하거나 감염시키지 못한 야생의 일반 좀비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멍청하고 약했기 때문에 그만큼 대응이 쉬웠던 덕분이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하면서 더이상 적당히 대응해도 넘어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졌다.

야생의 일반 좀비들은 분명 멍청하고 약하지만, 어그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반응하기 때문이다.

‘곧 좀비 웨이브가 온다. 그것도 자연적인 웨이브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하고 만들어 낸 초대형 인공 웨이브가 올 거야.’

수백, 수천 마리의 좀비 따윈 조금도 무섭지 않다. 놈들이 작정하고 우르르 몰려들어도 그보다 더 많은 탄환을 흩뿌리고 폭탄 몇 개 쓰면 금세 사그라드는 작은 불씨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포항 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는 폭죽 어그로에 끌려서 몰려들게 될 좀비 떼는 최소치로 잡아도 수만 이상이다.

“빨리빨리 애들 불러들여! 바리케이드 한 번 더 확인하고, 각성자들은 상점창에서 추가 자재 구입해서 부족한 부분 보강해! 일반 조직원들은 무기랑 탄약 나눠 주고 경계 세워!”

도시 하나를 지배하고, 수십만에 달하는 민간인을 잔혹하게 처분한 그들조차 섣불리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야생에서 판치는 좀비들의 머릿수가 워낙 압도적이니까. 심지어 외부에서 활동할 때는 안락한 안전 가옥(거점)도 없다.

굳이 안전한 도시를 벗어나 인간 사냥에 나서는 인간 사냥꾼들이 오히려 미친놈들이었다.

“야, 이 새끼들아! 빨리 안 들어와?! 확 문 닫아 버린다!”

“지금 다 들어왔습니다!”

입구 근처에선 벌써부터 행동 대장 격인 부하가 뒤늦게 달려 들어오는 부하들을 다그치며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도 지금 도시 내부 상황이 어떤지, 어떤 미친놈이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지 알아볼 상황이 아님을 인지한 것이다.

“인원 파악해! 낙오된 놈 있는지 확인해 봐!”

본거지에 있는 모든 조직원들이 자기 일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고, 무기와 자재를 옮기고, 거점의 상태를 확인했다.

백도진은 고생하고 있는 부하들을 뒤로한 채,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폰팔이’라는 직업으로 각성한 놈에게서 구입하고 개통까지 한 이 스마트폰은 별도의 전파탑이나 통신국이 없어도 반경 100km 이내에 존재하는 모든 기기 사용자들과 연락할 수 있는 특수 아이템이었다.

-어, 전화받았다. 무슨 말 하려는지 예상되니까 미리 대답하는데 우리 애들이 한 거 아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됐고, 그쪽 상황은 좀 어때?”

-좆, 씨발, 미친, 이런 표현 말고 다른 말은 안 떠오른다. 우리도 지금 대가리 터지기 일보직전이야.

현재 백도진이 연락한 인물은 그가 머물고 있는 포항 남구와는 거리가 제법 있는, 포항 중심지의 도심 생활권에 위치한 고층 빌딩의 주인이자 각성자 집단의 리더 김주윤이었다.

일반적인 범죄 조직보다 훨씬 더 강한 힘과 발언권을 보유한 각성자 집단의 특성상 막 나가는 놈들이 많았기에 ‘혹시?’ 하고 연락해 봤지만, 예상대로 그는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며 칼같이 선을 그었다.

하기야 아무리 막 나가는 놈들이라고 해도 오밤중에 폭죽을 쏴 올리는 미친 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 백도진도 딱히 거짓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서로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좀비 소탕을 미뤄 두었던 포항 북구의 상황이었다.

“얼마 전에 스캐브 놈들이 포항 북구는 완전히 먹혀서 더이상 못 들어가겠다고 하던데, 그쪽에서 보기엔 좀 어때? 막을 수 있겠어?”

-막을 수 있냐고? 막기만 할까, 아예 싹 쓸어버리고도 남지. 이 지랄이 나지만 않았으면.

스피커 너머로 간간히 울려 퍼지는 크고 작은 총성과 비명, 그리고 좀비 떼가 내지르는 괴성이 백도진의 고막을 섬세하게 긁었다. 이미 저쪽은 시작된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움직인다는 것도 미친 짓이긴 한데, 괜히 남구 애들만 살겠답시고 도망치는 미련한 짓은 안 하길 바란다. 지금 포항 전방위로 몰려들고 있을 놈들이 얼마나 많을지 나조차도 가늠이 안 되니까.

“빌어먹을. 그럼 사실상 포위당한 거네?”

-일단 내일 아침 해 뜨기 전까지 최대한 버티면서 웨이브만 막아 봐. 해 뜨고 나면 폭죽도 소용없을 거 아냐. 그때 되면 다 같이 모여서 도시 청소하고, 해안 도로 따라서 강릉으로 올라가든가 해야…… 야, 이 새끼들아! 거기 똑바로 막아! 꼴에 각성했다는 새끼들이 좀비 상대로 애먹고 지랄이야! ……일단 끊는다.

갑작스럽게 전화가 뚝 끊어지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백도진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창가에 서서 바깥을 살폈다.

평소에는 속만 썩이던 부하들이 그래도 의기투합해서 바리케이드를 보강하고 경계 인원을 정하는 등, 그들 나름대로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 주니 아주 헛된 조직 생활을 하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포항 북구에서 잔뜩 몰려 내려온 좀비들은 각성자 집단이 어떻게든 해 줄 것이고, 이제 자신들은 도시로 몰려드는 잔챙이들만 처리하면서 내일 아침까지 버티면 된다.

“아니, 그런데 저 미친 새끼들은 언제까지 폭죽을 쏘는 거야.”

건물 내부에 있어도 만만찮은 소음이 전해지는 폭죽 세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도시내의 세력이 지금 웨이브에 대비하느라 범인 수색을 못 하고 있어서 그런지 더 날뛰는 듯했다.

붙잡으면 반드시 사지를 잘라서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하는 고기 인형 신세로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한 순간, 백도진은 기묘한 진동을 느꼈다.

폭죽이 터지고 있기 때문에, 조직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진동이 아니었다.

좀 더 거대하고, 좀 더 위협적인, 오직 포식자가 피식자를 상대로 숨김없이 자신감을 드러낼 때나 느껴질 법한 특유의 진동이었다.

“온다아아아아아아아!”

폭죽이 펑펑 터지는 시끄러운 소음을 뚫고 날아든 누군가의 외침이 백도어파 식구들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달음에 건물 옥상으로 뛰어 올라간 백도진은 밝은 하늘 아래에 위풍당당하게 진군하고 있는 한 인간형 무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했으며, 무리라고 부르기엔 이상하리만치 수가 적었다.

“저게 무슨……!”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일반 좀비와는 확연히 다른 거구를 자랑하는 좀비들이 쿵쿵 발을 구르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머릿수는 기껏해야 두 자리 수에 불과했지만, 놈들이 내뿜는 압박감은 일반 좀비 수천 마리를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다.

“형님! 발포합니까?!”

“…….”

옥상에 자리잡은 조직원이 소총을 들고 물었지만 백도진은 쉽사리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저게 총으로 쏜다고 막힐 만한 놈들인가? 그 이전에 놈들이 신체 곳곳에 걸치고 있는 이상한 금속 구속구는 대체 뭐지? 이 근방에서 저런 기괴한 좀비를 본 기억이 있나?

“형님!”

“쏴! 쏘라고! 이 새끼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레 겁먹은 놈들부터 잔뜩 긴장하고 있던 놈들까지, 탄약을 아껴 쓴다는 당연한 상식 따위는 저 멀리 던져 버리고 그저 미친 듯이 방아쇠만 당겼다.

타타타타! 타타타! 투타타타!

폭죽에 이어 총성까지. 하루만 지나도 멀쩡했던 고막이 나가 버릴 것 같은 이 미친 소음 공해 속에서 수천 발의 탄약이 대형 좀비 무리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으으으으으으응! 흐으으으으응!”

“으으으응! 으으으으으응!”

선두에 있던 놈들은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걸레짝이 된 채 쓰러졌지만, 후열에 있던 놈들은 무려 반 이상 살아남아 진군을 속행했다.

두서없이 쏴 갈긴 총탄의 대부분은 푸짐한 살덩어리를 찢는 것 이상으로 큰 효율을 내지 못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고기 벽을 이쑤시개로 미친 듯이 찌르는 느낌이었다.

“바리케이드 더 보강해! 저 덩치 큰 놈들이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도시 외부에서 내부 거리에 쏟아져 들어오는 다른 좀비들의 무리도 하나둘씩 포착되었다. 지금 바리케이드 수준으로는 저걸 다 감당할 수 없다.

각성자들이 창고에 짱박아 두었던 컨테이너 박스까지 모조리 끌어 와서 주요 입구를 단단히 봉쇄했지만 그래도 백도진의 불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대로 무한 디펜스를 하면 결국 머릿수가 빠르게 줄어들게 될 좀비들이 불리한데, 내일 아침까지 무난하게 버틸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가슴 한편이 무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백도진이 자신의 각성 직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프’를 뽑아 들까 말까 고민하던 그때, 거구의 좀비들이 무수한 총탄의 포화를 뚫고 기어이 백도어파 본거지 입구 앞까지 도달했다.

꽈아아아아아앙!

좀비의 주먹 한 방에 입구를 막고 있던 바리케이드가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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