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역병의 아포칼립스 (175)화 (176/227)

175화 수복기 (25)

여기도 좀비, 저기도 좀비, 좀비, 좀비, 좀비.

묵호 아쎄이, 아니 최묵호는 눈발이 휘몰아치는 평창에서 태백산맥 특유의 험한 산세를 타 넘으며 은밀하게 포항 북구 인근까지 내려온 참이었다.

각성자의 체력과 스킬의 보조, 그리고 본연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거의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서 내려왔건만, 좀비 구경이 힘든 강원도 산골과 달리 경상도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미친, 저게 다 몇 마리야.”

‘군단’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포항 북구 인근은 좀비들로 득시글거렸다.

최소한의 방어선도 존재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좀비들을 처리하는 각성자나 군인, 무장 세력의 존재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좀비들이 좁은 구역에 너무 많이 몰린 나머지 스스로 정체를 유발하고 있었기에 인간들의 영역으로 침투가 늦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저 좀비 대군의 정체가 해소되고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면 대도시 하나쯤은 손쉽게 집어삼킬 것이다.

산 위에서 망원경으로 도시 외곽 지역을 살피던 최묵호는 입맛이 썼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과 포항의 내부 상황은 완전히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보를 직접 가져다주었던 김호연도 몰랐던 사실이다.

포항은 대구처럼 적극적으로 피난민 수용 구역을 형성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좀비들을 잘 막아 내고 있지도 않았다. 심지어 인간 사냥꾼들이 포항까지 내려갔던 이유는 그곳의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직 좀비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지 않은, 비교적 널널한 해안 도로를 타고 포항에서 빠져나와 다시 북상하던 인간 사냥꾼 무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커다란 화물 트럭에 ‘거래’에 쓰인 것처럼 보이는 대량의 인간을 가축처럼 실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인간 사냥꾼들이 정말로 몰래 포항에 침투해서 인간 사냥을 했다면, 절대 그렇게 느긋한 움직임을 보일 리 없었다. 마치 사업 때문에 몇 번이고 익숙한 옆 동네의 거래처를 방문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좀비들을 비교적 잘 막아 내고 있다던 남부 지방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포항은 북구를 비롯한 외곽 지역 대부분이 좀비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였고,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 사냥꾼들은 태연하게 인간을 거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포항에 있는 생존자 대다수는 정말로 오늘만 사는 막장 인생들이란 말인가?

인간 사냥꾼과 동조해 일반인들을 대거 잡아들이고, 그들에게 값을 매겨서 팔아넘기고, 좀비들이 자신들의 코앞까지 몰려들었음에도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시를 지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막장의 원조인 K-드라마 각본도 이렇게 쓰면 개막장이라고 욕먹는다.

‘포기하고 대구로 가야 하나?’

기껏 힘들게 포항 인근까지 내려왔는데, 이제 와서 다시 험한 산세와 야생의 좀비 떼를 뚫고 대구로 건너가야 한다니. 아무리 최묵호라고 해도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내려왔는데 지금 다시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해.’

추위, 굶주림, 목마름, 피로, 그리고 좀비나 인간 사냥꾼들에게 기습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까지.

단독 행동을 하는 건 자신 있지만, 역으로 단독 행동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짊어지게 되는 리스크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그만큼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결국 최묵호는 포항에 진입하지도, 대구로 방향을 틀지도 못한 채 일단 비트(hideout)를 팠다.

이 시기가 되면 더럽게 추워지는 북한 땅에서 종종 작전이 힘들어질 만큼 날씨가 매서워지면 이렇게 비트를 파고 잠시 버티기도 했다.

전우와 함께 비트 속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는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고,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까지는 추위를 막을 만한 것을 최대한 껴 입은 채 보급 핫팩을 터뜨려서 선잠을 자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진다.’

한겨울인 데다 동부 해안 도시라서 그런지 해가 더 빨리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야전삽으로 빠르게 비트를 파낸 최묵호는 주변에서 긁어모은 나뭇가지로 비트 주변을 위장하고, 지면에서 올라오는 추위를 막기 위해 방수포와 단열재를 이중으로 깔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여름이 아니라서 벌레가 없다는 것 정도. 덤으로 정신 사납게 하는 이기열이 옆에 없다는 것도 내심 안심이 되었다.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진 산속에서 최묵호는 포항의 야간을 다시 한번 살피기 위해 야간 투시 망원경을 들었다.

포항 북구는 예상대로 불빛 한 점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그나마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라 인프라가 발달한 도심 생활권에선 크고 작은 불빛들이 다수 포착되었다.

당장 포항 북구가 좀비 대군으로 득시글거리는 마당에 저 미친놈들은 도심에 틀어박혀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의미 있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인간 사냥꾼들에게 잡혀가지 않고 거래를 할 정도라면 저 도심 속 세력들도 다수의 각성자를 보유하고 있거나, 규모가 큰 무장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즉 좀비들이 코앞까지 다가와도 자신들이 당할 거라는 걱정 자체를 안 한다는 건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멍청한 생각이지만, 의외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반적인 좀비는 무리 단위로 몰려다녀서 겉으로만 좀 무서워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탄약이 충분하다는 가정하에 총화기로 무장한 소수의 인간들이 다수의 좀비를 그리 어렵지 않게 쓸어 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인간들의 화력보다 좀비들의 물량이 더 압도적이라면 당연히 버틸 재간이 없겠으나, 저들은 각성자들까지 무장을 했을 것이다. 일반 좀비가 수백, 수천 마리가 우르르 몰려온다고 한들 겁쟁이처럼 징징대지는 않을 터.

‘저곳에 자리 잡은 모두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한 끝에 지금 포항 북구는 어마어마한 좀비 대군이 쌓인 상황이다. 놈들은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야.’

각성자가 대단한 건 맞지만 결코 무적은 아니다.

특정 아이템이나 스킬의 보조가 없는 한 총을 맞으면 한 방에 죽는 건 똑같고, 좀비에게 스치기만 해도 똑같이 감염된다.

고요한 어둠이 내리깔린 포항에서 주의하지 않고 불빛과 소음을 계속 내보낸다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좀비들을 포항에 불러들이는 꼴이 된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좀비가 결국 둑 터진 댐처럼 쏟아지면?

‘각성자를 비롯해서 무장 인원이 단체로 합심하면 어찌어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포항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저기 자리 잡은 놈들은 결국 하나둘씩 망해 버린 포항을 벗어나 기존의 범죄자 집단이 자리 잡은 강원도로 올라와서 합류할 것이다. 안 좋은 상황에 안 좋은 일만 더하게 되는 꼴이다.

최묵호는 야간 투시 망원경을 내려 두고 비트 속에서 결심했다. 포항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내일 해가 뜨는 대로 대구로 방향을 틀자고.

대구도 위험한 사상과 가치관을 가진 범죄 조직이 강원도 전역을 꿀꺽하고, 급기야 타 지역까지 마수를 뻗치는 걸 달가워하진 않을 것이다.

덤으로 포항에 대한 진실을 전해 준다면 외부 상황을 잘 모르는 대구 측 지배 세력이 자신을 좋게 봐 줄 가능성도 있다.

보온 효과가 뛰어난 침낭 속에 파고 들어가 고치 속 애벌레처럼 웅크린 최묵호는 기약 없는 내일을 위해 눈을 감았다. 푹 잠들 필요도 없다. 몇 시간 정도 조용히 선잠만 자면…….

쒸우우우우우우우우우! 뻐어어어엉!

끼이이이이이이이이! 퍼엉! 펑! 퍼퍼퍼퍼퍼펑!

“…….”

사흘 밤낮을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 탓에 슬슬 환청이 들리는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산 위에서도 훤히 보일 만큼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과 엄청난 소음이 최묵호의 감각을 또렷하게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침낭에서 뛰쳐나온 최묵호는 도시 전역에서 솟구치는 불꽃놀이, 그러니까 지역 행사에서나 사용할 법한 폭죽의 연쇄 폭발에 정신이 멍해졌다.

“대체 어떤 개또라이가……!”

* * *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손톱과 발톱을 하나씩 뽑아내고 생살이 드러난 부위에 못을 박은 다음 철사를 연결해서 전기를 흘려보내는 거? 아니면 총알에서 뽑아낸 화약 가루를 목구멍에 조금 쏟아붓고 불을 붙여서 체내에서부터 태워 죽이는 거?

어쩌면 거꾸로 매달아서 전신의 피를 머리로 쏠리게 한 다음, 물이 가득 들어 있는 양동이에 머리만 푹 담그는 것도 썩 괜찮은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유발하면서도, 가장 끔찍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을 알고 있다.

쒸이이이이이이이이! 퍼어어엉!

바로 24시간, 단 한 순간도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끄트머리에 불을 붙인 대형 폭죽을 하늘에 대고 쏴 올렸다. 이미 반쯤 폐허가 된 건물 옥상에 비스듬하게 세워두고 미친 듯이 쏴 대는 폭죽만 수십 개가 넘었다.

매캐한 화약연과 시끄러운 소음, 눈이 시릴 정도로 밝고 화려한 불꽃의 향연은 마치 국가 규모의 대축제가 개최된 것처럼 보였다.

이 자리에 없는 진가희와 한동석에게도 족히 몇 시간은 계속 쏠 수 있는 폭죽 산더미를 인벤토리에 넘겨주고 포항의 각기 다른 구역으로 보냈다.

다른 구역으로 건너간 두 사람 역시 포항의 하늘을 뒤덮는 폭죽을 미친 듯이 쏘아 올리고 있었다.

아까 했던 설명을 계속해 볼까.

일반인이 평균적으로 잠들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약 48시간이다. 그 이상 잠들지 못하면 서서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자신이 어떤 말을 내뱉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깜빡깜빡하게 된다. 거기서 시간이 더 지나면 급기야 죽은 듯이 쓰러져 잠든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요원이나 특수 부대 대원들은 에너지 드링크나 커피, 각성제 같은 별도의 도움 없이 일반인보다 좀 더 오래 버티는데, 평균적으로 3~4일을 버틴다.

물론 고도로 훈련받은 이들이라고 해도, 극도로 강인한 육체와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인간이 가진 한계는 명확하기에 ‘자력으로’ 잠들지 않고 버티기란 무척이나 힘들다.

자꾸 옆에서 누군가가 흔들어 깨워 준다는 조건하에 기네스 기록을 세운 인간도 최장 11일을 버텼을 뿐이다.

그럼 이제 여기서 새로운 조건들을 추가해 보자.

단 1초도 잠들 수 없는 정신 나갈 것 같은 환경, 그리고 엄청난 소음과 밝은 불빛으로 이루어진 혁명적 어그로에 이끌려 포항으로 진군하는 좀비 대군.

일반인을 상회하는 신체 능력과 각종 스킬, 아이템의 보조를 받을 수 있는 각성자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좀비 대군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물론 단 한 순간도 잠들 수 없다는 전제 조건하에.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무난하게 버티겠지. 애초에 극한의 환경 속에서 생존할 자격이 있다고 판명되었기에 각성자가 된 것이니까.

하지만 사흘은? 나흘은? 일주일은?

나는 말없이 상점창에서 새로운 폭죽을 구입해 불을 붙였다.

이미 포항은 포위되었다.

매일같이 대구 방어선을 두들기는 일상적인 좀비 웨이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수의 좀비들이 포항 하나를 노리고 몰려들고 있을 테니까.

불법 무기로 무장한 인간들과 강력한 스킬과 아이템을 보유한 각성자들이 힘을 합친다면 좀비 수백 수천 마리쯤은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수만, 어쩌면 수십만 단위가 24시간 쉬지 않고 몰려든다면 어떻게 될까?

이 나라는 국토도 쥐똥만 한 주제에 쓸데없이 인간이 많다. 인간이 많다는 건 좀비도 많다는 뜻이다.

아마도 전국에는 과장 없이 수천만 단위의 좀비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을 터.

“너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각성자 3인의 뒷공작과 암살, 24시간 이어지는 수면 방해와 좀비 어그로, 그리고 이곳에 있는 쓰레기들을 모조리 말살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 좀비 대군.

내가 감히 장담하건대, 누구도 이 도시에서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좀비 사태 이후 처음으로 도시 하나를 완전한 석기 시대로 되돌릴 것을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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